영광 법성진성(전라남도 기념물 제205호)
전라도 일대 세곡을 모았던 법성창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 중종 9년(1514)에 돌로 쌓아 만들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성벽의 둘레가 1,688척(약 800m로 추정)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는 약 460m이며 · 북벽은 전구간 · 서쪽과 동쪽은 일부 구간만 확인된다
1872년 만들어진 「법성진지도」를 볼 때 성 내부에는 동헌 · 객사 등 관아시설 뿐만 아니라 세곡 수납과 관련된 창고시설도 확인된다
성벽에서는 축성에 동원된 전라도 관내의 군현명과 쌓은 길이
축성 책임자 · 재정 담당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법성진성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성 주변에서는 조선시대의 기와 · 자기 토기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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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걷기 때 지났던 법성포를 찾았다
거의 9년이나 지났지만 그때 굴비 맛을 잊질 못했다 하지만 이젠 굴비로 이곳을 찾을 일은 없을 듯하다
물론 이 말을 들은 이곳 사람이 법성 토우를 가보라 하여
아직 희망을 다 버리진 않았지만...
굴비교
시점이다
대덕산
굴비교 오른편이다
법성삼명당이 있는 언덕이다
굴비교 왼편이다
굴비교
태성이발관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법성면사무소
강화식당
예전 서해안 걷기 때 굴비정식을 먹은 집이다
그때의 맛은 황홀했다
굴비로1로
법성포2교 앞에서 돌아 봤다
오늘의 바다 굴비정식
「3대가 이어온 110년 정통」 간판을 보고 저녁을 예약했다
9년 전 들린 칠산식당이 문을 닫혀 있어 이곳을 택했는데 한마디로 실망이다
연희굴비
법성진성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오른쪽에 있다
진내리 탐방길 벽화
진내리 탐방길
법성진성으로 오르는 길이다
여행
그것은 삶의 의미다
당산나무 전망대
법성진 숲쟁이 팽나무
풍수적으로 법성포를 명당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숲이다
숲쟁이공원이 영광 9경 중 제7경이다
법성포 당산제
숲쟁이는 2007년 2월 1일 국가명승 제22호로 지정된 명승지로 수령 100~300여 년에 이르는 노거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노거수들의 정기를 받아 법성진성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법성포 당산제는 진내리 으뜸 당산(할아버지 당산)에서 매해 음력 정월과 단오제 때 지낸다
「하늘의 재앙과 땅의 환란을 막아주고 후환이 없기를 기원」하는 법성 고을의 크고 중요한 행사다
법성삼명당(琺成三明幢)
이곳 2층에서 이동식을 했다
법성면
대덕산 왼쪽 법성포다
대덕산 방향이다
대덕산 · 구수산
바닷가 방향이다
법성포 선착장
법성삼명당에서 숲쟁이꽃동산으로 가는 길이다
법성진성 서문지 기념물
법성포 법성진성(전라남도 기념물 제205호)은 높이 약 4m · 둘레 약 1.5km 규모로
1514년(조선 중종 9)에 법성진 관할 전라도 28개 수세 군현의 고을 백성들이 동원되어 쌓은 석성이다
법성진성은 국방의 요새인 수군진과 국가 재정의 중추기관인 국내 최대 조창이 성내에 공존한 독자 행정권역으로
조선시대 경제 · 군사 및 행정제도 연구에 학술적 가치가 크고 시대성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숲쟁이꽃동산
백제 불교 최초도래지 350m 안내판이 있다
법성면
인의산과 숲쟁이꽃동산이 감싸고 있다
사면대불(四面大佛)
아미타불(동면)을 주존불로 모시고, 관음보살(북면) · 대세지보살(남면)
서면에는 아니타불상을 가슴에 안고 있는 마라난타 존자가 조각되어 있다
마라난타 기념관 상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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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방문 때와 비교해도 공사가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알아보니 예산 때문이라 한다
실망감으로 더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부용루
풍광을 가로막는 영광대교가 새로 생겼다
탑원
불탑과 감실형 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감실형 불당은 불상과 소탑을 봉안하는 감실이다
법성진내 근린공원 전망대
숲쟁이꽃동산을 돌며 오른다
영광대교
백수읍 · 홍농읍을 연결하는 다리다
구암천 제방
예전 서해안 걷기 때 구암천 다리를 건너 고창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숲쟁이꽃동산 정상이다
홍농읍 칠곡리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본다
홍농읍
구암천 건너 봉대산 앞에 있다
검산마을
뒤로 망덕산과 덕림산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안의산
검산제가 품에 있다
법성삼명당이 있는 산 오른쪽으로 한옥펜션마을이 보인다
숲쟁이꽃동산을 한 바퀴 돌았다
법성진성
보성 성돌의 안내판이 있다
보성(寶城) 성돌
왼쪽 큰 돌에 보성(寶城)이란 글자가 보인다
현재 법성진성 성돌에 6개의 군 · 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당산나무전망대 아래 나무다
해남 성돌
해남현 성돌이 유일하게 「(정덕 갑술) 9월 10일 감관(監官) 임회(任會) 도색(都色) 강영호(姜英浩)」라고
명문(銘文)이 각자(刻字) 되어 있다
당산나무
왼쪽 줄기는 뿌러졌고, 또 다른 줄기는 앞으로 길게 뻗어 뿌러질 듯하다
나뭇가지 받침대가 필요하다
당산나무
금줄로 보아 할아버지 · 할머니 나무 같다
장성 성돌
장성현은 70척( 약 37m)을 쌓았다
장성(長城) 70척(七十尺) 각자(刻字)가 있다
영광 법성진 숲쟁이
법성진은 법성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가에 축조한 군사시설을 말하며 숲쟁이는 법성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 숲이다
「쟁이」는 「성」이란 뜻으로 「숲쟁이」는 곧 숲으로 된 성을 의미한다
법성진 숲쟁이는 조선 중종 9년(1514) 법성진성을 축조할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법성진성 북벽치
나무들은 법성진성의 북벽과 연장해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포구와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 역활을 함과 동시에 자연적인 아름다움도 더했다
길이는 법성에서 홍농으로 넘어가는 산허리 능선을 따라 약 300m에 이르며 종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다수를 차지한다
법성진 숲쟁이
수목 · 법성진성 · 법성포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법성포 단오제 등 각종 민족행사가 열리고 있어 역사 · 문화적 가치 또한 매우 뛰어난 명승지다
법성진 숲쟁이 팽나무
인의산 능선을 타고 700m에 이르는 해송 · 느티나무 · 개서어나무 · 팽나무 등의 숲으로 한국의 10대 아름다운 숲이다
부용교 · 충용비
1970년대 홍농읍으로 지방도로가 개설되면서 인의산 맥을 잇기 위해 개설된 비보(裨補)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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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법성면 등 각 면의 수복을 위해 전라남도 경찰국에 무장지원을 요청하려고
소대원들을 데리고 광주로 가던 도중 공비의 습격을 받아 전사한 백인기 지사의 충용을 기리기 위해
지역유지와 친지들이 1951년 5월 독바우삼거리에 세웠다가 1981년 6월 이곳으로 이설했다
고 박균상 위령비
수백 년간 이어온 법성포 숲쟁이공원에서 펼쳐지는 단오제에서 비명에 가신 분의 회갑되는 을해년에 세운 비다
숲쟁이길
부용교에서 진내리 탐방길 들머리로 가는 길이다
작청 터(청년회관) · 상동문 터
밭으로 쓰이고 있는 자리다
동헌 터
구수산
해가 산 너머로 넘어 갔다
동조정 터(董漕亭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양곡(暘谷) 소세양 공이 전라감사 재임 때 지은 동조정(6칸) 터다
동조정은 법성첨사가 전라도 28고을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검사하고 계량했던 곳이다
이 건물 아래 지역을 조대(租臺) 마당이라 한다
동조정은 1896년에 신설된 지도군 향교와 객사를 짓기 위해 철거하여 지도(智島)로 이설되었고
1908년에 법성초등학교가 이곳에서 개교하였다
객사 터(客舍址)
조선시대 공무수행을 위해 법성진에 온 관리들에게 숙식편의를 제공했던 건물 터다
객사는 1896년에 신설된 지도군 향교를 짓기 위해 동헌, 동조정과 함께 지도(智島)로 이설되었다
1906년에 영광군 최초로 법성초등학교가 설립된 곳으로 마을사람들은 이 일대를 핵고당이라 부른다
3 · 1운동 모의 처
법성포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여 1919년 3월 23일(법성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이곳 박명서 학생(당시 18세) 집 골방에 모여 시위군중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만드는 등
법성포 3 · 1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하고 거사를 준비했던 곳이다
이 운동은 거사 전에 일본경찰에 적발되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박명서 · 최복섭(당시 17세) · 유영태(당시 17세) 학생이 실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고 여러 사람이 일본경찰에 끌려가 무진 고생을 하였다
이외 전주에서 3 · 1운동을 주도하여 신흥학교 재학생인 남궁현(당시 18세) · 고형진(당시 23세) 학생과
임실에서 3 · 1운동을 주도하여 양태환(당시 34세) 은선암 스님이 옥고를 치렀다
월랑대(月浪臺)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을 반대한 훈련도정 이척(1572~1639) 공의 아들인 이상원(1597~1662) 공이 효종 10년(1659)에 지은 제월정 터(霽月亭址)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 쓴 중수기가 남아 있다
제월정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어 1957년 복원하였는데 1974년에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제월정은 오횡묵 초대 지도군수가 부임길(1897)에 들려
"이 누각은 ... 시원스럽고 시야가 넓어 환하게 확 트여 호남의 명루라 할만하다"고 극찬했고
날아갈 듯한 추녀 · 고풍스러운 경관이 법성포의 품격을 대변했던 정자이다
월랑대(月浪臺)
무안 굴비
법성포
오늘의 바다 굴비정식에 실망하고 들어와 숙소 창문을 통해 만들었다
뉴타운으로 변한 법성포에 관광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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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