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다
전주 이씨 조선왕실의 본향으로, 조선 역대 임금들이 몸과 마음의 뿌리로 여긴 고향이다
숱한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주부성과 감영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경기전과 그 주변 수백 채의 옛 한옥 등이 살아남아 전주를 전통문화의 본고장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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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풍패지관(豊沛之館 객사)을 시점으로
한옥마을 골목으로 경기전 · 최명희문학관 · 오목대 · 풍남문 등을 거쳐 다시 객사까지 1박 2일 걷기로 한 둘째 날이다
RGB HOUSE
하룻밤을 쉬었던 곳이다
시점이다
전주천 갈대밭
전주천길을 따라 걷는다
강암서예관 · 생가
전주를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한벽당(寒碧堂) 현판을 쓴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의 서예관 · 생가다
청연루(晴烟樓)
전주 8경 중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인 한벽당(寒碧堂)과 대칭적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청연루에 올라 앉아 동쪽을 바라보면 멀리 기린봉 자락에 자리잡은 동고사가 아스라이 보인다
전주시 교동 한옥마을과 서학동을 잇는 남천교 위에 팔작지붕으로 세워졌다
전주천 걷기길
전주목판서화관
한국의 대표적인 고인쇄 문화를 감상하고 목판인쇄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열린 문화공간이다
향교 홍살문
큰 하마비가 옆에 있다
전주향교 하마비
하마비에는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라 적혀 있는데, 한자 개(皆)의 경우는 마멸이 심해 확인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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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보았던 대부분의 하바비에 비해 길쭉한 형태가 독특하다
하마비 상 · 하단의 색깔로 보아 하마비 밑부분이 한동안 땅속에 파묻쳤던 것으로 보인다
완판본 문화관
전주 향교 장판각(藏板閣)은 전국 향교중에서 유일하게 인쇄 원문 구조의 목판본을 보유하였는데
서적을 발간하여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배포하여 공부시킨 곳이다
장판각에는 목판본은 총 9,600판을 보유하고 있으며
발간할 수 있는 책은 자치통감강목 · 주자대전 · 성리대전 · 율곡전서 · 사기평림 · 동의보감
사략 · 호남삼강록 · 주서백선 · 증수무원록 · 언해 등을 보유했다
현재는 판본의 부패와 변질을 방지하고 역사적 보존 분야를 연구하기 위하여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이며
향교 앞에 원판본 문화관을 건립하여 목판본을 일반이 볼 수 있게 전시하고 있다
오목교
2017년 9월 4일 개통한 인도교로 한옥마을 관광객들이
이 다리를 통해 전주천 건너 국립무형유산원과 남고산성 · 서학동예술촌 등을 갈 수 있다
남양집
지금은 한벽교와 한벽보 때문에 굽이쳐 흐르는 전주천을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지만
아쉬운데로 여름철에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얼큰한 오모가리탕을 맛볼 수 있는 야외 좌석도 있다
앞에 보이는 한벽교 토끼굴로 나가면 한벽당으로 연결된다
한벽집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 나온 집으로 SINCE 1944 간판이 걸려 있다
전주 오모가리탕은 예전 1급수였던 전주천에서 잡은 빠가사리 등 민물고기를 오목하게 생긴 옹기 뚝배기에 끓여내는 민물 매운탕인데
그 그릇의 생긴 모양을 본따서 오모가리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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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집 · 남양2호점 · 순집 등 4집이 남아 옛 맛이 그리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4곳 모두 장사한지 70년이 넘은 집이다
전주 한벽당(寒碧堂)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전주천 뒤 승암산(僧岩山) 기슭 바위 절벽에 세워진 누각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낙향하여
태종 4년(1404년)에 지은 별장으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월당루(月塘樓)라 했으나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한벽당으로 바뀌었다
한벽당은 남원의 광한루(廣寒樓) · 무주 한풍루(寒風樓)와 함께 호남삼한(湖南三寒)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
한벽당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하였다
한벽당(寒碧堂)
1986년에 요월대가 복원되기 전 한벽당만 있을때는 보통 한벽루라 불렀다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옆에 요월대는 일제 때 지은 정자다
한벽당(寒碧堂) 현판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의 친필이다
한벽당(寒碧堂)
정면 3칸 ·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바닥 전체가 마루 구조다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 계자난간만 둘러져 있어 주변 경치를 조망하기에 좋다
천장 아래 벽에 한시 글판이 많이 걸려 있다
전주천과 마을 풍경
한벽당 풍광에 대해 옛 사람들은 옥처럼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치며 흩어지는 모습이라 하여 벽옥한류(碧玉寒流)라고 표현하였다
한벽당에서 바라보는 전주천의 풍경을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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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에서 전주천을 따라 전주자연생태원으로 이어지는 데크형 산책로가 있다
요월대(邀月臺)
석전(石田) 황욱(黃旭)의 글씨다
요월대는 「달을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으로 한벽당 옆에 흡사 한벽당의 부속 건물처럼 서있다
한벽굴
요월대가 왼쪽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1년 일본은 철로를 놓는다는 명분 아래 한벽당을 허물려 했으나
월당의 17세손인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반대로 한벽당 뒤로 한벽굴을 뚫어 철로를 개통했다
한벽굴 안내문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전주팔경의 하나였던 한벽당의 정기를 자르고 철길을 만들었다
한벽굴은 그때 만들어진 전라선 터널이다
1931년 10월 전주 ~ 남원간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당시 전라선 철길은 이리역에서 삼례 · 덕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이 있던 전주역을 지나 오목대 - 이목대 - 한벽굴을 거쳐 중바위 서쪽 아래를 타고 색장동을 통과해서 남원을 향했다
한벽굴은 나들이 장소로 유명한 한벽당 그리고 전주천 빨래터와 더불어 전주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곳이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이곳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으나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한벽굴을 나와 돌아봤다
월당선생찬시비(月塘先生讚詩碑)
월당 최담 선생이 조정을 떠날 때 안평대군 · 정인지 · 김종서 등의 선비들이 선생을 치하한 것을 후손들이 비석으로 세웠다
월당 최담(月塘 崔霮 1346~1434) 유허비각
유허비각 뒷편으로 창암 암각서(蒼巖 岩刻書)가 있는 울타리가 있다
월당 최담(月塘 崔霮) 유허비
유명조선통정대부호조참의(有明國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
집현전직제학월당최공유허비(集賢殿直提學月塘崔霮遺墟碑)
비문은 1828년 송치규가 짓고 앞면을 쓰고, 후손 최설이 뒷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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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 안내문에는 최담선생이 조선의 건국을 도운 공신이라 있으나
유허비를 보면 "고려 말에 참관을 잠시 하신 적이 있으나 전사년 문과 급제 후 노모를 모시러 낙향하였다가
조선 건국 후 천거에 의해 다시 벼슬생활을 하다 낙향하셨다"고 적혀있다
창암 암각서(蒼巖岩刻書)
월당 최담(月塘 崔霮)의 유허비 뒷편 바위에는
조선 후기 서예가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7)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여러 개 남아있다
창암은 조선 후기 서예가로 전주 자만동(지금의 교동)에서 태여났다
친구 사귐이 늦고, 학문이 늦고, 후손이 늦다고 30대 이후에 스스로 삼만(三晩)으로 개명을 했다고 한다
창암의 필력은 당시 중국에 알려져 서예를 배우기 위해 전주까지 온 사람이 많았고
제주도로 유배가던 추사 김정희가 굳이 전주에 들러 창암을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창암 이삼만은 눌인 조광진 ·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의 삼대명필」이다
전주한벽문화관 전통혼례청
2002년 개관한 전주시 대표 문화시설로서 예술공연 · 교육체험 · 전통혼례 등을 진행하는 복합문화시설이다
이곳은 전통문화행사 · 전시회 · 연극 · 전통춤을 비롯한 각종 공연이 거의 매일 열리고 있는 공연장이다
주말에는 년중 계획으로 전통 문화공연이 있기에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은 거의 무료로 이 공연들을 볼 수 있다
전주향교 대성전(全州鄕校 大成殿) / 전북유형문화재 제7호
전주 향교(사적 제379호)는 고려 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지금의 경기전 근처였으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 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張晩)이 부성(府城)과 너무 떨어져 있고
객사를 기준으로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순찰사 장만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서무(西廡) · 은행나무(암)
전주향교의 경우 동 · 서무의 크기가 전면 9칸 · 측면 2칸으로 굉장히 크다
이는 과거 전주 지역의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는 지표다
건물은 1603년에 건립되었다가 1987년에 해체 복원된 건물이다
명륜당(明倫堂)
명륜의 뜻은 인간사회 윤리를 밝힌다는 의미로 맹자 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시대 인재 양성과 학문부흥을 위하여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국민의 도의정신과 사회정의를 부식하고 교화하는 근원이 된 건물이다
조선시대 관학의 성격을 띄고 양반 자재 90명을 정6품 교수 1명 · 종9품 훈도를 두어 4서5경을 가르쳤다
건물은 전면 5칸 · 측면 3칸 · 일익공 맞배 가적지붕에 전면은 교차무늬 창살문에 눈썹천장에
도리가 길게 뻗어나온 114.4㎡의 건물로 1603년에 건축되어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명륜당으로 유명하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 명창대첩 · YMCA야구단 등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서재 은행나무
나무 옆에 있는 사람으로 미루어 굉장히 큰 나무다
나무 높이 32m · 둘레 6.6m · 나이 380년 · 지정일자 1982. 9. 20
효자비각
향교 정문 밖 왼쪽 담 앞엔 오래된 효자비가 있다
비각 안에 1398년 세워진 효자군수박진지려(孝子郡守 朴晉之閭) 비가 있다
영암군수 때 부친이 위독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병수발을 들었다
그 부친도 훌륭하신 분이다. 병이 깊어지자 아들에게 시를 남겼다
"나이 80에 평상에 누워 있으니 60살 늙은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죽고 사는 것은 피하기 어려우니 네 어미 무덤 가까이 내 무덤이나 준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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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맏아들인 박진은 영암군수와 청도군수에 임명되어 목민관의 도리를 다하지만
관직을 수행하다보니 항상 마음속에는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가슴 아파했다 한다
효자비 /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
박진의 효자비는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향교 옆으로 옮겨 왔으며
이 비석은 1398년(홍무 31)에 세워진 것을 1724년에 중각을 하였다
전북민예총
기념품점인데 일요일이라 닫혀있다
정읍고택(별채)
보천교를 창시한 월곡 차경석(1880~1936)이 정읍 대흥리에 세운 50여 채의 보천교 본당 부속 건물의 하나로 전해진다
1936년 보천교가 해체된 뒤, 정읍지역의 유지가 사들여 정읍시 장명동으로 옮긴 것을
1988년 박성기(박중조의 부친) 씨가 내장산으로 다시 옮겨 사용하였다
ㅁ자 건물의 정읍고택은 보온 효과를 높이고 바람을 막으려는 북부지방의 한옥 양식으로 중부지방 이남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풍락헌(豊樂軒)
전주 동헌인 풍락헌(豊樂軒)은 음순당(飮醇堂)으로도 불리었으며 조선시대 전주부윤(종2품)의 업무공간으로 지금의 전주시청에 대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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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락헌이란 「풍년을 즐거워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오목대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현대수퍼마켓
정겨운 골목을 걷다보면 50년 된 현대수퍼를 만난다
전화번호 국번이 한 자리인 간판이 전주서 이거 하나라 한다
골목엔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슬핸드백
차 없는 거리에 있다
교동집
1957년부터 3대째 이어온 중화요리집이다
맷돌에서 시작되는 물길이다
풍년제과
1926년 창업주 (고) 강정문씨가 전주의 일본인 제과점에서 센베 및 제과 · 제빵 기술을 전수받고
전수받은 기술을 응용하여 우리 입맛에 맞는 베이커리를 연구하고 레시피를 개발하였다
1951년, 전주시 중앙동3가에 풍년제과를 개업하였다
1978년 2대 강현희씨가 승계하여 오리지널 초코파이 등 인기상품을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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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2층에서 초코파이와 커피로 이동식을 했다
이리오너라(예전 문화연필 터)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생긴 연필 공장으로 1946년에 대전 동아연필 · 1949년에 문화연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교동미술관(예전 백양메리야스 터)
1950년대 이후 내의류업체 BYC의 옛상표인 백양메리야스 공장 터다
1980년까지는 이곳 한옥마을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경기전 하마비
1614년 세운 사자(또는 거북)를 닮은 두 마리의 동물 석상이 받치고 있다
기단석 양쪽에 사각형 홈이 파여 있어 작은 보호각이 설치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전 외신문 앞이다
전주 전동성당 / 사적 제288호
전동성당 터는 정조 15년(1791)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처형된 한국 천주교의 첫 순교터다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 등도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이들 순교 정신을 기려 1891년 프랑스인 신부 보두네가 성당 터를 마련하고
1908년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 · 1914년 완공하고 · 1931년 축성식을 갖었다
성당은 회색과 붉은 색 벽돌로 지었으며 주춧돌은 순교자들이 처형되었던 풍남문 인근 성벽의 돌이다
창이 12개가 있는 종탑부와 8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의 돔은 성당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동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 대구 계산성당과 함께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3대 성당으로 뽑힌다
전주 전동성당 / 사적 제288호
애초 성당은 이태조 유허지인 오목대 자리에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라감사가 반대 상소를 올려 무산됐다
이 전라감사가 뒤에 일제 앞잡이가 된 이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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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탑과 첨탑 보수 · 훼손된 벽돌 교체 공사중이라 성당에 있는 사진을 찍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 권상연(야고보)
전주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워졌다
이 건물은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했던 전주시 전동 풍남문(豊南門) 밖에 지어진 성당이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히 순교지의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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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은 윤선도의 7대손으로 남인 명문가 출신이었고, 다산 정약용과는 고종사촌간이다
권상연과는 외사촌간이다
발목잡힌 사나이?
평화의 소녀상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238명의 피해자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혔다
끌려갈 당시 그들은 대개 10대 소녀들이었다
그날처럼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조선의 소녀가 반성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주먹을 꼭 쥔 채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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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 광장이다
전주 풍남문 / 보물 제308호
옛 전주부성(全州府城)의 남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明見樓)라 불렀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호남제일문
풍남문 좌우로 포루(砲樓)와 종각(鐘閣)이 있다
이곳도 보수공사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풍남문 안쪽에서 봤다
전라일보
전라감영은 왼쪽 · 한국집은 오른쪽에 있다
전주 한국집
1952년부터 대한민국 최초로 전주 비빕밥을 판매한 식당으로 이분례 여사를 필두로 3대째 전통의 전주비빕밥을 이어오고 있는 식당이다
한국집 최고의 자랑거리는 3대째 70여 년간 소중히 간직되오고 있는 장과 수년 간 저장해오며 간수를 뺀 곰소천일염으로 맛을 낸 고추장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필두로 삼성 이병철 회장 등 수많은 인사들이 방문하였으며
1979년 롯데백화점 본점 오픈과 동시에 입점하여 전주비빕밥을 세계로 알린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2011년에는 미슐랭가이드 한국편에 유일하게 소개되며 3대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육회빕빕밥
콩나물 · 표고버섯 · 미나리 · 묵 · 김가루 · 무나물 · 고사리 그리고 육회가 올라 있다
생계란 노른자의 비릿한 맛과 비빕밥 재료 본연의 맛이 섞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생계란은 넣지 않는다
한국집에서는 100% 국내산 재료로 직접 담근 고추장 · 된장 · 간장을 사용한다
전라감영 내삼문
전라감영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전라감영 정문 포정루로 들어와 중삼문을 거쳐 내삼문을 지나면 전라감사 집무처인 선화당이다
현재 전라감영 정문인 포정루와 중삼문은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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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軍儲皆皐湖南(국가군저개고호남) / 나라의 군수품은 다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 /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나라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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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이충무공전서 하권에 실려있다
후학 강암 송성용이 삼가 쓰다
선화당(宣化堂)
전라감사의 집무처이다
선화당이라는 당호는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나온 말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그 이듬해 1598년 전라감사 황신이 중건하였으며, 1771년 전라감사 윤동승이 개건하였다
이후 1792년(정조 16)에 화재로 소실되어 전라감사 정민시가 다시 중건하였다
선화당은 광복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1951년 경찰청 무기고로 쓰이던 도청 문서고에 로켓탄이 폭발하여 도청 본관과 함께 소실되었다
선화당은 정면 7칸 · 측면 4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큰 건물이며 전주부성내에서 객사 다음으로 컸다
연신당(燕申堂)
연신당은 1688(숙종 14)에 전라감사 이유(李濡)가 창건한 전라감사 처소다
연신당이라는 이름은 논어 술이편에 「공자께서 집에서 쉬고 계실 때는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즐거우신 듯 보였다」에서 나온 것이다
감사가 편히 쉬는 처소임을 의미한다
경상감영은 징청각(澄淸閣)이라고 하였다
돌다리 자리
전라도를 다스린 전라감영 앞길로 감영 앞 개울에 있었던 돌다리 자리를 화강석으로 위치를 표시하였다
멀리 풍남문이 보이고, 오른쪽엔 전주부성 정문인 포정루(布政樓)가 있었다
전주 경원동우체국
객사(풍패지관 豊沛之館)
풍패(豊沛)란 한나라 태조 유방의 고향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켰듯이, 이성계가 조선을 일으킨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현판을 쓴 이도 명나라 재상을 지낸 주지번(朱之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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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넘치는 도심 한복판에 있다
걷고 싶은 길
객사를 끼고 있는 객사길이다
달고나 뽑기
오징어게임으로 유명해진 뽑기다
전주 영화의 거리
전주 영화의 거리 동상
옛 시민극장 터(현 노래방 건물)
시민극장은 1956년 9월 25일 허가를 받았다
1957년 10월 16일 신축 개관 특집 「이교도의 기적」을 상영하며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2층 함석지붕 목조 건물로 좌석수는 947석이었다
1972년 4월 21일 영사실에서 화재가 발생해 극장은 전소되었다
100여 명이 한국영화 「흑백도」를 관람하고 있었으나 인명패해는 없었다
화재 이후 극장은 사라지고 우신호텔이 들어선다
신중앙시장
이렇게 넓고 한적한 시장은 처음 봤다
노송여울2길 천이다
예매한 버스 시간이 되어 이곳에서 걷기를 마쳤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9.64km, 소요시간 5시간 2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