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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허준박물관~궁산 역사 · 문화 둘레길

허준박물관과 궁산터널을 연결하는 걷기다

허준박물관은 국토종주 때 등 걷기 때 지나쳤고, 궁산터널은 지난 주 관람시간에 늦여 못보았기에

두 곳을 궁산 역사 · 문화 둘레길로 연결해 걸었다

 

 

가양역 3번출구

서울둘레길 봉산 · 앵봉산 코스 바닥안내판이 있다

시점이다

 

 

 

 

가양대교를 건너는 길이다

허준박물관은 스탬프보관함이 있는 왼쪽 길이다

 

 

 

 

허준근린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한강공원으로 나가는 육교다

이곳 왼쪽에 허준근린공원이 있다

 

 

 

 

의성 허준 동상

허준의 자는 청원(淸源) · 아호는 구암(龜岩) · 본관은 양천이며,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의 20세손으로 태여났다

그는 내의원의 의관으로 궁중에서 벼슬을 시작해 국왕의 병을 고치는 어의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한국의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외에도 전염병 관련 서적을 비롯하여 여러 의서들을 언해본으로 출간하는 등 백성들의 질병 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양천허씨의 시조 허선문은 고려 때의 인물로 양천 지역을 다스린 공암 촌주였다

「양촌허씨세고」에는 양천허씨는 가락(가야)에서 나왔으며, 시조 허선문은 김수로왕의 30세손이란 기록이 있다

허준의 할아버지 허곤은 무과 출신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허론도 무과 출신으로 부안 · 용촌 등지의 군수를 지냈다

허준은 허론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고, 허준의 부인은 안동김씨이며 아들 겸을 두었다

 

 

 

 

허준근린공원 광주암

이곳은 올림픽대로가 건설되기 전에는 탑산 절벽 아래까지 강물이 흐르고, 강 중에 2개의 바위가 기둥처럼 솟아난 아름다운 강변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는 광주에서 떠내려 왔다하여 「광주암」이라 불리웠고

이로 인하여 광주군에서 이 바위의 소산으로 싸리비 몇 자루씩 양천으로부터 받아갔는데

양천에서 이 바위는 필요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

택지개발로 매몰위기에 처한 광주암을 원형대로 보존하기 위해 새로운 호안을 구축하여 호수공원을 조성하였다

오른쪽 제일 큰 바위가 광주암이다

 

 

 

 

허준박물관

허준 선생의 출생 · 〈동의보감〉 집필 · 돌아가신 곳으로 알려진 가양동에 세워진 공립박물관이다

 

 

 

 

허가바위(서울시기념물 제11호)에서 집필 중인 허준 모형

허준은 물이 뚝뚝 떨어져 흐르는 동굴암자(허가바위)에 거주하면서 책(동의보감)을 저술하였으며, 동굴 암자에서 돌아가셨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 2009년 · 복제본

동의보감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는 문화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동의보감 초간본 / 조선 17세기

훈련도감 목활자본으로, 잡병편의 일부이다

 

 

 

 

다기 건강을 담다 / 제19회 허준축제기념특별전 · 한국의 다기 · 삼국~통일신라시대 차 문화

삼국은 4~5세기에 걸쳐 불교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찰에서는 불교의 유입과 함께 자체적으로 차 문화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에서는 한국차문화의 시작을 삼국유사의 허황후 인도전래설을 바탕으로 48년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는 아직 여러 근거가 더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의 신라 흥덕왕 3년(828),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 남쪽에 심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 차 문화는 7세기 초반에 시작되어 9세기 초에 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삼국사기」의 다른 내용에서도 왕실 · 승려 · 화랑도가 차 문화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왕은 승려와 귀족에게 차를 하사하였으며 승려와 화랑들은 부처에게 차를 공양하거나 자신들의 수양을 위해 차를 마셨다

 

 

 

 

초의선사 영정

조선시대 초의선사 영정 재현품이다

 

 

 

 

해주반 / 조선 · 소연지 및 청화백자 다기 일관 / 현대

 찻상 겸용으로 쓰던 해주 소반과 작은 연지 차를 우려 마실 때 물받침으로 사용하는 2인 다기 세트

 

 

 

 

떡차 재현 / 현대

고려시대 떡차 재현 후발효차

 

 

 

 

명선 서각 / 현대

「차와 선은 통한다」는 의미로 초의선사의 글을 서각한 것이다

 

 

 

 

중국의 다기 · 중국의 차 문화사

중국의 다예(茶藝)란 차와 관련된 예술적 기교와 공예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중국에서는 약 3,000~3,500년 전부터 차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차는 신농(神農)이 처음 차를 발견했을 때 생(生)으로 씹어먹었다고 하며 진한시대부터는 차가 약용에서 기호식품으로 인정되어 음용하기 시작했다

음다법은 생잎을 쪄서 빻아 동그란 모양으로 만든 떡차를 가루내어 솥에서 풀어 마시기 시작한 자차법

말차처럼 직접 풀어 마신 점다법 · 잎차를 우려마시는 포다법으로 변천되었다

또한 중국의 차 문화가 형성되었던 당나라(618~907) 때 육우는 최초의 다서인 「다경」을 저술하였으며

불교가 성행하면서 외국으로 전파됨에 따라 중국의 차 문화는 세계로 퍼져 나갔다

 

 

 

 

풍로 부는 동자 조각 / 중국 현대

어린 동자가 풍로를 부는 모습을 한 조각상이다

 

 

 

 

일본의 다기 · 일본의 차 문화사

일본의 다도(茶道)란 차를 마시는데 있어서 심신을 수련하여 인간의 도리를 추구하며

차를 마심에 있어 꾸밈없고 소박한 와비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일본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일본에 차가 전해진 것은 나라시대인 8~9세기 초로 당나라에 견당사로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서였다

당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오던 견당사는 불교와 함께 당나라의 떡차 음다법을 가져 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일본의 차 문화는 에이아시(1141~1215)선사가 차씨를 일본에 가져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차를 내는 주인과 손님에게 있어서 그 순간이 단 한 번뿐인 다회(茶會)라고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라는 일기일회 미학을 추구한다

일본의 차 문화 정신은 센노리큐가 주장한 선종이 시규인 〈화경천적(和敬淸寂)〉과 〈리큐칠칙(利休七則)〉이 대표된다

 

 

 

 

부채 / 일본 현대

차회 때 쓰는 전시용 부채이다

 

 

 

 

허준박물관 옥상정원

북한산이 대덕산과 난지도 사이로 보인다

 

 

 

 

약초원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에 실린 100여 종의 약초들이 심어져 있다

 

 

 

 

허준테마거리 허가바위 가는 길이다

 

 

 

 

동양의학의 집대성 「동의보감」

하늘이 내린 명의 허준은 이곳 허가바위에서 당시의 의학을 집대성하여「동의보감」을 저술했다

몸 안팎의 의학적 기능과 질병의 종류 및 치료법을 정리한 동의보감은 세계 최초로 예방의학을 강조하였으며

동아시아 의학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허가바위(孔巖바위) 빗돌

 

 

 

 

허가바위(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1호)

이 바위는 양천허씨 시조인 허선문이 출생한 곳이라는 설화가 전하는 바위동굴이다

이 바위에 동굴이 뚫려 있어 공암(孔巖)이라고도 불린다

동굴의 크기는 가로 6m · 세로 2m · 길이 5m 정도로 어른 1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경기읍지》에는 이 바위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가 건국될 무렵 이곳에는 허선문이라는 이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90세가 지났는데도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겼다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그가 군사를 격려한 공이 커 공암의 촌주(村主)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의 자손들이 공암허씨(孔巖許氏)가 되었는데 신라시대에는 이곳을 공암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양천이라고 불렀으므로 공암허씨는 양천허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 ·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 여류시인 허난설헌 · 조 때 북병사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허종 등이 모두 양천허씨이다

 

 

 

 

동양의학의 보고를 탄생시킨 허가바위

석기시대 사람들이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으리라 추측되는 자연 바위동굴로, 커다란 구멍이 있어 공암이라고도 한다

 

 

 

 

한강공원 구암나들목

 

 

 

 

구암나들목 쉼터

궁산 역사 · 문화 둘레길 궁산 방향으로 걷는다

 

 

 

 

멀리 권율장군 대첩비가 있는 덕양산 · 가까운 전신주에는 궁산 역사 · 문화 둘레길 안내판이 붙어 있다

 

 

 

 

한강

대덕산과 난지도 사이로 북한산이 보인다

 

 

 

 

한강공원 가양나들목

겸재 정선의 그림 타일이 붙어 있다

 

 

 

 

궁산공원둘레길

궁산공원둘레길은 1.63km로 파산 · 성산 · 관산 · 진산 등 다양한 명칭이 있으며

소악루 · 양천고성지 · 양천향교 등의 주요시설이 있고 자연생태가 다양한 탐방코스를 즐길 수 있다

 

 

 

 

양천향교 · 소악루 방향안내판

먼저 향교와 궁산터널을 들렸다가 양천고성지와 소악루로 가기로 했다

 

 

 

 

양천향교(서울시문화재기념물 제8호) 명륜당

태종 11년(1411)에 건립되어 구한말 갑오개혁(1894)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 인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문묘 기능만 남았다

*

양천향교는 서울특별시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이다

 

 

 

 

유예당(遊藝堂)

계단식 관람석이 있는 유예당 놀이마당에서는 문화행사와 각종 민속놀이를 공연한다

2007년 강서구청이 신축하였다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 빗돌

「양천」이라는 고을의 명칭은 1310년(고려 충선왕 2년)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양동 239번지에 있었던 「양천현아」는 중앙에 현청(동헌)인 종해헌 · 그 동쪽에는 객사(파릉관) ·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다

이를 일컬어 《읍치》라고 한다

 

 

 

 

양천현아지(陽川縣衙址) 빗돌

 

 

 

 

상산유묵비

가양동 쌈지공원에 2·8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사귀정직(事貴正直)을 새긴 상산유묵비를 세웠다

사귀정직이란 김도연(金度演) 선생이 우리나라 초대 재무부 장관시절 선비정신으로 남긴 것인데 「일에는 정직함이 귀중하다」라는 뜻이다

*

1894년 6월 16일, 경기도 양천군(陽川郡) 남산면 염창리(지금의 서울 강서구 염창동)출생

본관은 영천(永川) · 호는 상산(常山) · 독립운동가 · 초대 재무부장관으로 활동했다

 

 

 

 

겸재 정선 공덕비 상

겸재정선박물관 앞에 있다

 

 

 

 

궁산땅굴역사전시관 내부

궁산땅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강점기에 굴착된 곳으로 무기나 탄약 등 군수물자를 저장하거나

김포비행장을 감시하고 공습 때에는 부대 본부로 사용하기 위한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을 건설하기 위해 인근 지역 주민을 보국대로 강제 동원하였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으면서 굴착공사 또한 중지됐지만 이후 이곳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궁산땅굴(규모 높이 2.7m · 폭 2.2m · 길이 68m)

2008년 인근 주민 다수의 제보로 지하 땅굴을 발견하여 체험 전시관을 조성하기 위해 진행하던 중

일부 구간에서 대형 낙석이 발생하여 진입 방지장치를 마련하고 땅굴을 폐쇄한 채로 관리하다가

2018년 출입구에서 땅굴 내부를 조감할 수 있는 전시관을 조성하였다

 

 

 

 

겸재정선미술관 · 소악루 방향안내판

궁산땅굴에서 양천고성지로 오르는 길이다

 

 

 

 

양천고성지

이 성은 양천현의 주산이었던 궁산에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해발 74m의 정상부에 있는 둘레 200m 가량의 평지를 둘러 만든 것으로 보인다

몇 차례의 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다량으로 채집되었고

강 건너에 있는 행주산성이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볼 때 「양천고성」도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행주산성 · 파주의 오두산성 등과 함께 한강 어귀를 지키던 중요한 성이였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은 이곳 양천산성에서 진을 치고 전쟁의 판세를 가늠했으며

행주산성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뒤 행주대첩이라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

덕양산이 소나무숲 사이로 보인다

 

 

 

 

궁산 역사 · 문화 둘레길 안내판

 

 

 

 

역사유적순례길 안내판

두 안내판 모두 양천고성지에 있다

 

 

 

 

관산성황사(關山城隍祠)

이 사당은 성황사 신(神)의 위패를 모신 묘당(廟堂)이다

성황사의 신은 여신(女神)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도당(都堂)할머니로 모시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 중종 25년(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성황사 재성산이라 하였다

성황사 신께서는 산 아래에 거주하는 민초들의 번영과 행복을 이루도록 도와주시고 여러 악귀를 몰아내시고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주시니

산 아래 사는 민초들은 이에 보답하고자 매년 음력 10월 초하룻날 제물을 차려 산신제를 올리고 굿을 한다

*

궁산은 파산 · 성산 · 관산 · 진산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成隍祠(성황사) 안내판

관산성황사(關山城隍祠)의 현판 〈성(城)〉 자와 안내판의 〈성(成)〉 자의 한자가 다르다

 

 

 

 

소악루(小岳樓)

조선 영조 때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지낸 이유가 양천현아(陽川縣衙) 뒷산 기슭 강변 악양루터에 재건한 것이었다

당시 이 누각에 오르면 안산 · 인왕산 · 남산 · 관악산 등이 한눈에 보이고

탑산 · 선유봉 및 드넓은 한강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등 진경이 펼쳐져 조관빈 · 윤봉구 · 이병연 등 당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며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이곳 현령으로 있을 때 그린 산수화 〈경교명승첩〉에서 당시의 경관을 볼 수 있다

*

소악루의 원위치는 〈여지도서〉 · 〈양천군읍지〉와 정선이 그린 소악루 · 소악후월 등의 그림으로 짐작해 볼 때

강서구 가양동 산 6-4(일명 세숫대야바위) 근처로 추정되나 주변의 변화가 극심하여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1994년 신축하였다

*

소악루 내 오른쪽에 겸재 정선의 그림 소악후월과 안현석봉이 있다

 

 

 

 

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소악루는 이유가 1737년 창건한 누각으로, 현재 가양동 궁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왼쪽 하단에 소악루가 있고, 그 너머로 이유의 본채로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있다

화면 오른쪽 변에는 탑산 · 두미암 · 선유봉을 차례로 배치시켰고

원경에는 목멱산을 위시한 금성산 · 와우산이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아래 육중한 바위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

이 그림을 본 이병연은 다음과 같은 제화시를 적었다

"파릉에 밝은 달 뜨면, 이 난간 머리 먼저 비친다. 두보 시에 제구 없는 것, 끝내 소악루 뿐이라 해야 하겠지"

 

 

 

 

안현석봉(鞍峴夕烽) 안현의 봉화불

해질녘 양천현아가 있는 궁산에서 강 건너편 안현의 봉화불을 바라본 정경을 그린 것이다

안현은 길마재 · 안산 · 모악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지금의 이화대학교 뒷산이다

원경에 정상부에 붉은 점으로 봉화를 표현한 안현이 와우산 · 정토산과 이어져 펼쳐지고 있고

근경의 좌우에는 궁산 자락의 울창한 수목 사이에 자리잡은 소악루와 탑산 · 공암이 있다

*

왼편에 합벽된 이병연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계절의 맛이 무르익을 때, 발을 걷어 올리니 산 빛이 저물었구나 웃음을 지으며 한 점 별같은 불꽃을 보고, 양천 밥을 배불리 먹는다"

 

 

 

 

한강

예전 올림픽대로가 생기기 전, 이곳 산자락은 한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고

난지도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이 생기기 전에는 안산 · 인왕산 · 남산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

한강에 발 못담그는 건 아쉽지만 두 공원이 생긴 건 다행일 수도 있다

두 공원이 없었다면 아파트 숲이 가렸을테니...

 

 

 

 

양천에서 오래 사신 98세의 어르신이다

예전 양주바위 · 성주우물 또 강변이라 흙바닥이 질척이던 양천 이야기를 하신다

*

노인 한 명이 없어지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다는 말이 떠오른다 

 

 

 

 

성주우물 · 은행나무 보호수

 

 

 

 

성주우물터

어떤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로

 이 고장을 다스리던 수령을 성주(城主)라고 불렀던 시절에 성주가 사용하면서 성주우물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의 이름으로도 쓰여 성줏물 · 성재정(城才井 · 成才井 · 城在井 · 星子井)으로 남아 있다

 

 

 

 

은행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18m · 둘레 220cm · 나이 410년 · 지정일자 1988. 4. 25

양천향교 · 양천현아와 함께 삼위일체로 양천읍치를 이루었던 양천현의 객사인 파릉관에 부속된 누대였던 악양루 옛터에

영조 13년(1740년)에 65세의 나이로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겸재 정선이 재임 중 남긴 경교명승첩의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명목이다

 

 

 

 

하마비(下馬碑)

태종 13년(1413)에 종묘나 대궐 앞에서는 「대소인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으로 만들었으며

그 이후 향교 앞에도 설치되었다

이곳의 옛 지명이 「하마비마을」이었음을 기념하여 이 비를 복원한다

1997. 7

*

양천향교역 1번출구 앞에 있다

 

 

 

 

양천향교역 1번출구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1.9km, 소요시간 6시간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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