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현령(지금의 강서구청장)으로 있었으며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 기념비적인 불멸의 걸작을 남겼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2009년 4월, 강서구에서 정선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진경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조선시대 양천현아지 인근에 겸재정선미술관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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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제1 · 2기획전시실과 · 뮤지엄샵 / 2층 겸재정선기념실 · 원화전시실 · 진경문화체험실 · 영상실
3층 양천현아 모형도 · 카페테리아 · 독서여가 포토존이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금강내산
1층에 들어서면 있다
겸재 정선 선경을 닮은 진경의 세계
"겸재정선미술관에서는 개관10주년을 기념하여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원화를 중심으로 한
소장품 전시인 〈겸재 정선:선경을 닮은 진경의 세계〉를 마련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2008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유물수집사업을 통해 소장되어진
겸재 정선의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11년간의 정선 작품 수집 역사를 보여주고자 기획되었습니다
그동안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수집한 유물은 총 364점으로 그 가운데 정선의 작품은 9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수탁 관리 중인 정선 작품 4점으로 이는 꾸준히 노력해 온 유물수집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소장품 전시인 〈겸재 정선:선경을 닮은 진경의 세계〉는
겸재 정선의 진경 및 사의산수를 보다 깊게 감상해 볼 수 있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학계에서는 관심이 크게 증폭되고 연구자들에게는 다양한 방향으로 심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일반 대중들에게는 정선의 삶과 작품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조명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청하성읍(淸河城邑)
〈청하성읍도〉는 겸재 정선이 지금의 포항시에 속하는 청하의 현감을 지내면서
그 곳 성읍의 경관을 동쪽 봉선정(월포리 가는 쪽에 위치)에서 바라보고 그린 것이다
자신이 근무하는 관아를 화면의 중심에 두고 근경에는 갯벌과 솔밭을 그려 넣었으며
원경에는 호학산 · 천령산 · 내연산을 병풍처럼 펼쳐놓아 청하읍성을 한눈에 보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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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청하현아는 터만 남아 있으나 청하현아가 있었던 자리에는 청하초등학교와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고
현아 내 회화나무 중 한 그루만이 청하면사무소 마당에서 지금까지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총석정(叢石亭)
북한지역인 강원도 통천군에서 동해변을 따라 동북쪽으로 7km쯤 올라가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총석정이 나온다
이곳 총석정은 바다 주변에 촘촘히 자리잡고 있는데 오랜 풍화작용으로 6~8각형의 기이한 돌기둥의 모습을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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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시선을 따라 화폭을 살펴보면 일단 정자가 세워진 언덕 · 소나무 · 파도 · 바위 등의 주제부가 또렸하게 보이고
화폭 오른쪽이 바위산으로 채워진 것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비어 보이는 왼쪽 하단을 파도로 처리한 것
그리고 화면 왼쪽 상단에 「총석정((叢石亭)」과 「겸재(謙齋)」의 곤서 · 백문방인으로 균형을 맞춘 것이 인상적이다
이밖에도 치밀한 화면 구성과 겸재 특유의 수직준법 · 한쪽으로 치우쳐 찍은 점(편필) · 그리고 먹의 농담이 세련되고 생동감 있게 드러나 있으며
화면의 크고 작은 3개의 돌기둥에 감도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거친 파도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피금정(披襟亭)
조선시대 선비들의 최대 풍류는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시와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선비들이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면 의정부 · 포천 · 철원 · 금성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야 했고
이곳을 지나면 반드시 남대천변 큰 길가를 거쳐야 했는데 피금정은 바로 그곳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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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금정은 금성(지금의 금화군)에 있는 정자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기에 옷깃을 풀어 젖히는 정자」란 뜻이 담겨 있다
그만큼 피금정과 그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서 금강산을 유람하는 객들이 지나가던 중 어김없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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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피금정도〉는 하단 · 중앙 · 상단의 분명한 삼단구도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에는 남대천을 건너 피금정으로 들어가려는 일행이 보이고
중앙에는 줄지은 수양버들 · 소나무 · 활엽수 등 울창한 숲과 함께 그 사이로 피금정이 보인다
상단에는 넓게 펼쳐진 흰 안개구름과 그 위로 금성의 진산인 경파산이 주변 산들을 거느리면서 장엄함을 자랑하고 있다
표암 강세황이 정선의 그림을 감상하고 남긴 발문에서
"겸옹(정선)의 그림은 우리나라 제일이다. 권 가운데 그림도 모두 득의작이다
옹은 지금 늙어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더욱 보배로 삼을 만하다 감탄하며 감상한 나머지 한 마디 적는다"
조어(釣魚)
출처지리(出處之理)에 대한 이상을 「낚시하는 모습」에 비유하여 그린 그림이다
보기엔 그저 선비가 낚시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일 뿐이지만
「때를 만나면 세상에 펼쳐 보이겠다」는 강한 의지의 뜻과 함께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남몰래 준비하는 사람으로 비유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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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 쓴 한 선비가 천운과 때를 기다리며 작은 쪽배에 앉아 낚시대를 물에 드리운 채 자연의 모든 것들과 교유하고 있는 장면의 그림이다
화폭 왼쪽 위태로운 절벽에서 나무 한 그루가 아주 힘차게 뻗어 나와 있고
그 아래로 자주색 옷을 입은 선비가 쪽배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물끄러미 수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드리워져 오는 어둠에 갈대가 바람에 살랑대고 그 사이에 두 마리 기러기가 날아 오르고 있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는 "자주빛 옷을 입고 낚시를 드리우니 강의 기러기가 등 뒤에서 나르네"
(紫衣垂釣 江雁背飛 烟客評 · 자의수조 강안배비 연객평)라고 연객 허필의 품평이 적혀 있다
청풍계(淸風溪)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 현재의 청운동과 그 곳 주변을 말한다
광화문에서 부암동쪽으로 가다 자하문 터널 못 미쳐 나오는 청운동이 바로 조선시대의 청풍계이다
청풍계는 백악산과 인왕산을 양쪽으로 걸쳐 있으며, 경복궁 서쪽 일대를 일컫는 「서촌」을 비롯한
청운초등학교 · 경복고등학교 · 경기상업고등학교 등 세 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경관이 무척 아름다운 곳으로 조선시대 한양의 명승지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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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계는 「푸른 단풍나무가 있는 계곡」이란 뜻을 담고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으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청운동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 청풍계와 백운동이 합쳐져서 붙여졌다
이를 추적해보면, 청풍계는 깊숙하고 그윽한 계곡에 맑은 수석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백운동은 산은 높지 않으나 골짜기의 푸른 송림 사이로 흐르는 맑은 냇물이 아주 매력적이어서
옛날부터 많은 문인 ·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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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이 그린 〈청풍계도〉는 현재 국립중앙미술관 · 간송미술관 · 고려대학교박물관 · 겸재정선미술관 등에 다수 남아 있다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시리즈는 장소와 시야 그리고 세로로 긴 구도가 거의 동일하게 보여 진다
특히 측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뾰족한 바위와 나무가 짙은 먹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다른 그림들과 비교되어지는 큰 특징이며
어김없이 사당과 정자 그리고 초가지붕의 집 등이 등장하고 있는 것 또한 특징 중 하나이다
귀거래(歸去來)
〈귀거래도〉는 중국 육조시대의 시인 도연명이 41세(405년)에 13년간의 관리생활을 그만 두고
고향인 강서성 심양으로 돌아갈 때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귀거래도(고향으로 귀향하는 그림)는 조선시대 지식층의 문인들, 선비들, 화원들이 즐겨 그린 그림이다
겸재정선미술관에도 귀거래도와 관련 있는 겸재 정선의 문정부이전로도(問征夫以前路圖) · 운무심이출수도(雲無心而出岫圖)
무고송이반환도(撫孤松而盤桓圖) 세 폭의 시리즈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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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귀거래도〉에서 인물보다 배경인 자연을 크게 강조하거나 새롭게 표현하는 방법 등을 택하여 자연과 합일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귀거래도〉 가운데 제 1폭은 도연명이 소나무 아래 앉아서 멀리 산골짜기에서 솟아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경쾌한 필선으로 간단하게 그려진 주산과 송림 등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화면 상단에 「운무심이출수(雲無心而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른다)」란 화제가 적혀 있다
제 2폭인 「무고송이반환(撫孤松而盤桓 홀로 서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서성이다)」은
동산 위에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있는 도연명이 묘사되어 있으며 소나무는 화면의 대각선을 가르며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제 3폭인 「문정부이전로(撫孤松而盤桓 나그네에게 앞길을 묻는다)」는 나귀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연명을 그린 것이다
도연명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고향이 얼마나 먼가를 물어보고 있으며 행인은 그가 가야할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행인이 가리킨 곳은 산들이 중첩되어 있어 아득히 먼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겸재정선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겸재 정선의 〈귀거래도〉는 각 화면 상단에 謙齋(겸재)라 쓰여 있으며
작품이 〈운무심이출수도〉 · 〈무고송이반환도〉 · 〈문정부이전로도〉 순서로 표장되어 있는데
제 3폭의 〈문정부이전로도〉가 〈귀거래도〉의 첫 폭에 해당되어야 함으로 잘못 표장되었음을 밝힌다
산수(山水)
화폭 근경의 좌측 둔덕에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몇 그루의 나무와 그 아래 잠시 비바람을 피해 머물고 있는 쪽배와 그 안에 어부가 크게 부각되어 있다
화폭의 넓게 자리를 차지한 수면은 근경으로부터 원경까지 시원하게 펼쳐져 있으며 원경의 산은 실루엣처럼 아득하게 처리되어 있다
여기에 비바람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듯 먼 곳을 응시하는 어부의 시선을 통해 화면은 더욱 확장되어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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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기법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일필로 과감하게 처리한 근경의 나무들과 실루엣처럼 보이는 원경의 산
미점으로 처리한 나뭇잎과 바람에 몸을 맡긴 버들가지 · 간결한 필치로 처리된 출렁이는 물결과
그 물결을 응시하고 있는 쪽배 안의 어부 등에서 겸재 정선의 활달한 필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화첩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이며 화면 상단 오른쪽에 나중에 쓴 것으로 보이는 겸재(謙齋)의 관서와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바람이 부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하고 여유 있는 느낌과 서정적이고 사의적인 성격이 잘 전해지는
겸재 정선의 〈산수도〉는 인생관이나 자연관에 비교, 인생을 보다 넓고 깊게 확장시킬 수 있는 격조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수탁 관리 중인 정선 작품 4점이다
산수(山水) / 지본수묵 · 33.3×24.7cm · 개인소장
산수기려(山水騎驢) / 지본수묵 · 35.5×25.0cm · 개인소장
설경산수(雪景山水) / 견본수묵 · 24.5×19.5cm · 개인소장
산천재(山天齋) / 지본수묵 · 33.0×44.0cm · 개인소장
출생과 초년시절 / ~ 30대 중엽
정선은 서울 북악산 아래 유린동(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 났다
정선은 사족 출신으로 문인의 교양을 닦았으나 타고난 그림 재능과 이웃에 살던 진경시의 대가 김창흡 등의 영향으로 서화에 매진하게 되었다
정선이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살게 되는 북악산 · 인왕산 일대는 서울 문인문화의 중심지이면서도 풍광이 뛰어나
정선은 일찍부터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출생과 초년시절
겸재 정선은 1676년(숙종 2) 음력 1월 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에서 부친 정시익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여났다
정선은 전라도 광주가 본관으로 5대조 정응규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 · 고조부 정연은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내는 등 명문이었으나
증조부 이후 벼슬을 하지 못해 점차 집안이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1689년(숙종 15) 14세 때 부친이 52세로 세상을 떠나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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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출신인 정선이 그림에 뜻을 두게 된 것은 타고난 그림 재능과 어려운 집안 살림
그리고 숙종 15년의 기사환국으로 과거공부에 뜻을 두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정선은 청풍계 부근에 있는 외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년시절 학문과 예술의 성장
초년시절 정선의 학문적 · 예술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같은 동네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던 안동김씨 집안이었다
안동김씨 집안은 조선 후기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영의정 김수항의 여섯 아들들은 정치 · 학문 · 예술 면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남 김창집은 나중에 영의정이 되고 · 둘째 김창협과 셋째 김창흡은 학문과 문학으로 · 넷째 김창업은 문학과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이들 중 정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시인으로 조선 후기 문예에 큰 족적을 남긴 삼연(三淵) 김창흡으로 보인다
김창흡은 금강산 · 설악산을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시로 읊어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은 김창흡 문하생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 예술적으로 성장했으며
그중에서도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과는 평생에 걸친 지기가 되어 시화를 서로 교환하였다
출생과 초년시절 · 초년시절 학문과 예술의 성장 · 연보
화가로 이름을 떨치다 / 30대 중엽~40대 중엽
정선이 그림을 배울 무렵은 17~18세기 교체기로서 조선시대 회화사상 중기의 절파가 쇠퇴하고
새로이 명말청초의 남종문인화풍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또 윤두서와 조영석 등에 의해 한국적 풍속화가 점차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정선은 새로 들어오는 문인화풍을 공부하는 한편 문사로서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주역」에 능통하기도 했다
정선의 그림 실력은 37세 때인 1712년 금강산 여행에서 그린 《해악전신첩》이 문사들 사이에 유명해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세기 초 화단의 상황과 정선
정선의 성년기에 해당하는 18세기 초엽은 조선회화사에서 중기에서 후기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때는 명나라에서 도입된 절파(浙派)가 쇠퇴하고 명말 동기창 일파에 의해 정립된 남북종화론과 청 초기 문인화풍이 점차 세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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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도 본격적으로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하기 전에 이처럼 문인화풍을 기본으로 하였음은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사계산수도첩》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정선보다 약간 선배인 공재 윤두서와 후배이자 평생 이웃에서 친하게 지내던 관아재 조영석은
주로 인물풍속화를 통해 새로운 문인화풍을 선도하고 있었다
화명을 떨치다
정선은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진경시의 대가인 이병연과 절친하게 지내고 당시 학예계의 지도자인 김창흡의 문하생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 예술적 교양을 충실하게 쌓았다
정선은 동양 고전 중 어렵기로 손꼽히는 「주역」에도 능통하여 여기에 나오는 「겸괘(謙卦)」에서 자기의 호인 「겸재(謙齋)」를 따왔다고 한다
그의 호를 통해서 겸손하게 처세하는 대인군자다운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정선은 충실한 학문과 철학을 바탕으로 백악사단(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북한산 · 인왕산 중심의 문화계 인맥)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하양현감 시절 / 46~51세 · 1721~1726
정선은 41세 때인 1716년 관상감의 겸교수(종6품)로 벼슬길에 나간다
이후 46세 때인 1721년부터 1726년까지 만 5년 동안 경상도 대구 근처의 하양현감을 지내게 되는데
비로서 이 시기에 그의 회화발전과 관련된 본격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정선은 경상도 지역의 다양한 명승을 그린 화첩인 《영남첩》, 《구학첩》을 그렸다
하지만 현재 이 화첩들은 전해지지 않아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또한 성주 관아의 객사에 있던 정자를 그린〈쌍도정〉과 〈도산서원〉등의 경상도지역의 명승을 그린 여러 작품들도 하양현감 재직시절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인왕곡 시절 / 51~58세 · 1727~1733
만 5년의 하양현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한 정선은
이듬해인 1727년, 그동안 줄곧 살아온 북악산 아래 유린동에서 인왕곡(현재의 군인아파트 터 옥인동 20번지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정선은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며 남은 여생을 살았다
청하현감 시절 / 58~60세 · 1733~1735년
정선은 58세가 되던 1733년 다시 경상도 청하현감(지금의 포항시에 속함)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청하는 동해 바닷가에 있는 고을로, 인근 내연산에는 십이폭포와 유서 깊은 보경사가 있었고
위로는 관동팔경과 통하고 경주나 경상도 지역 여러 명승지는 물론 동해안까지 여행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정선이 답사한 흔적은 내연산 삼용추폭포 바위에 「갑인추 정선(甲寅秋 鄭敾)」이라고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청하에 부임한 이듬해 1734년 가을에 이곳에 들렸음을 알 수 있다
인왕곡 시절 2 / 60~65세 · 1735~1740년
60세 되던 1735년 5월, 모친 밀양 박씨가 92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선은 청하현감을 그만두고 인왕곡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선은 모친상을 치른 후 62세 때인 1737년, 한강을 거슬러 올라 절경이 있는 남한강 상류의 청풍 · 단양 · 영춘 · 영월 등
충청도 사군 지역을 여행하고 《사군첩》을 제작하여 이병연에게 증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같은 해 가을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관동명승첩》이다
이들 그림에는 골산을 묘사한 수직준 · 토산을 묘사한 미점준 · 그리고 일렁이는 파도, 번잡하지 않고 정돈된 구도 등
겸재 특유의 진경산수화법을 거침없고 장쾌하게 그려내어 정선 진경산수화의 전형적인 면모들이 완성되어 나아간다
서울 인왕산 주변을 소재로한 〈청풍계〉(1739년 · 간송미술관) · 〈한양전경〉(1740년) 등에서도 완숙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양천현령 시절 / 65~70세 · 1740~1745년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더욱 원숙한 경지로 올려놓은 중요한 계기는
그의 나이 65세부터 70세까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부근의 읍치가 있었던 양천의 현령을 지낸 것이다
정선은 만 5년간 양천현령으로 재직하며 이병연과 시화를 교환하고 《경교명승첩》과 같은 기념비적 역작을 남기게 된다
이들 그림에서는 겸재 특유의 힘차고 강한 필묵법이 아닌 한강변의 승경을 부드러운 선묘, 서정적 선염
그리고 청록색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채색법 등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맛을 보여 주었다
양천현령 시절은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폭과 깊이가 더욱 심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민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이야기
지폐 속 겸재 그림 /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 보물 585호)
조선시대 미술사를 전후기로 양분하는 중앙에 우뚝 선 우리나라 최고의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역대 고미술 경매 역사상 최고가인 34억에 낙찰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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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발행된 천원권 뒷면에 새겨진 〈계상정거도〉는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중 한 폭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물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그 주변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계상정거(溪上靜居)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고요히 지내다」는 뜻으로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으로 둘러진 가운데 자리한 암자가 보인다
자유자재의 경지
화가로서 드물게 84세까지 장수한 정선은 보통 화가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화풍의 완성과 완성을 너머선 대자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정선은 만 70세에 양천현감을 퇴임한 후, 십여 년 동안 인왕곡에서 여유로운 만년기를 보냈다
박연폭(朴淵瀑) / 개인 소장
실경을 재해석하여 조형적으로 변형시키는 진경산수의 시조이자 완성자인 겸재의 대표작 중 하나다
박연폭포
그림을 보면 진경(眞景)이라는 개념이 실경(實景)과 어떻게 다른지 알수 있다
인왕곡 시절 3
만 70세가 되어 양천현령에서 물러난 정선은 인왕곡 집으로 돌아가 84세까지 여유있는 만년을 보냈다
비록 이 시기 동안 1747년에 동생 정유(66세)를
1751년에는 평생을 교유한 이병연(81세)을 먼저 보내는 슬픔도 있었지만 정선 자신은 명예로운 말년을 맞았다
즉 1747년(72세)에는 인원대비(숙종계비 김씨) 회갑 수경으로 종4품으로
1755년(80세)에는 인원대비 칠순 수경으로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2품 이상 3대 추증 법전에 따라 부친과 조부 · 증조부까지 각기 호조참판 · 좌승지 · 사복시정을 추증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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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겸괘(謙卦)에서 자기의 호 겸재(謙齋)를 따서 평생 겸손하고 온화하게 처신하며 예술에만 정진해온 대화가에게 적합한 말년의 명예였다
그러다가 정선은 1759년 3월 24일 8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지금의 도봉구 쌍문동)에 안장되었다
인왕제색(仁王霽色) / 1751년 · 76세 · 국보 제216호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계상정거(溪上靜居) / 퇴우이선생진척첩 · 1746년 · 71세 · 보물 585호 · 개인 소장
칠성암(七星庵) / 혜악전신첩 · 1747년 · 72세 ·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산
내금강 · 외금강 · 해금강을 그린 《금강전도》 등의 그림 들이 전시되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 내금강과 동쪽 외금강 · 그리고 해금강으로 나누어진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내금강을 전체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당시 한양에서 탐방할 때 먼저 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정선이 그림을 그린 장소
금강전도 / 국보 제217호
겸재 정선의 업적 / 정선 이전과 이후의 진경산수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실경산수화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정선은 이런 전통의 바탕 위에 18세기 전반에 진경산수화를 확립시켰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그 이전에 비해 대상 소재가 엄청나고 넓고 다양해졌으며 양식상 한국적 · 예술적 특징을 완비하였다
그래서 그 이전을 실경산수화, 이후를 진경산수화라 부르기도 한다
정선 이후에는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화가가 등장하여 진경산수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계승 발전시켰으나 19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정선 이후 실경산수화의 전통
고려시대 최고의 화원 이녕은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등 개성 부근의 실경을 그렸다고 한다
조선 초기 대표적 문인화가 강희안은 개성의 〈박연폭포도〉를 그렸고 중기의 김시 · 조속 등도 금강산도나 기타 실경을 그렸다
그러나 실제 작품이 전하는 것은 17세기 한시각 · 조세걸 등의 작품이다
또 초기부터 많이 그려진 각종 계회도에도 한강변의 경치를 중심으로 한 실경이 그려져 있다
정선 이후 진경산수화의 계승과 변천
정선의 화풍은 손자 정황 이외에 김희성 · 정충엽 · 장시흥 · 김석신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런데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새롭게 변모 · 발전시킨 사람은 단원 김홍도였다
김홍도는 원근법과 투시법 등 서양화법을 많이 도입하여 진경산수화를 좀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변화시켰다
또 정선이 굳세고 힘찬 화풍을 구사한 데 비해 김홍도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화풍으로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지평을 새롭게 개척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가면 김정희 일파에 의한 청조문인화풍의 유행과 함께 진경산수화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현장
서울과 한강은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금강산과 함께 가장 많이 그려진 곳이다
정선은 서울 중에서도 출생지인 북악산과 인왕산 부근을 가장 많이 그렸다
또 예부터 유명한 한강변의 풍광도 즐겨 그렸는데
특히 60대 후반인 1740년에서 1745년까지 양천현령을 지내며 한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의 굳세고 힘찬 진경산수화에 부드럽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가미되었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현장
정선이 평생에 걸쳐 탐방하고 그림으로 그린 지역들로서 조선시대 팔도를 거의 망라하지만
현재까지 전라도와 제주도지역을 그린 그림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선의 기타 회화
정선은 진경산수화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종래의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관념산수화도 잘 그렸다
이런 관념산수화는 특정한 실재 경치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 속에 형성된 경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관념산수화의 대표적인 예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있다
소상팔경도는 본래 중국의 특정 지역의 실경산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선은 진경산수화법으로 소화하여 우리화 해냈다
관념산수화 이외에도 정선은 각종 고사도(故事圖) · 화조도 · 동물화 · 초충화 등도 잘 그렸다
이런 다양한 회화 세계는 정선이 폭넓은 예술 세계와 함께 이면의 균형 잡힌 정서와 철학을 지닌 대가였음을 보여준다
겸재 진졍문화체험실
겸재 정선! 그를 소개합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미점준 · 수직준 · 피마준 · 쇄찰준
강서구와 겸재 정선의 깊은 인연
한국화 화가들은 작품에 무엇을 남겼을까?
한국화를 그릴 때는 무엇이 필요한가?
겸재 정선의 관서와 인장
겸재 정선의 호는 겸재(謙齋) · 난곡(蘭谷) 등이며 자는 원백(元伯)이다
이에 그의 작품에는 겸재(謙齋) 또는 난곡(蘭谷)이라는 관서(款書)와 그 아래 정선(鄭敾) 또는 원백(元伯)이라고 새겨진 인장(印章 낙관)이 찍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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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에서 작가의 서명이 있다면 동양화 그림 속에서는 그림을 그린 날짜와 이름 등을 쓴 관서와 함께 인장이 찍혀 있다
이와 같이 동양화에서의 인장은 서양화의 사인처럼 작품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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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관서와 인장은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기에
이를 확인해보는 것은 작품 감상 못지않게 매우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겸재 정선의 작품 영인본 124점
겸재 정선이 본 강서의 아름다운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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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재하는 풍경을 담은 진경산수화풍을 확립시켰다
그의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우리 산수를 다루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여행을 통해 가장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해낼 수 있는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65세 무렵 원숙한 경지에 올랐는데 이때가 바로 정선이 양천현의 현령으로 근무하던 때이다
독서여가 포토존
겸재와 함께한 빅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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