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박물관 2존, 청계천, 청계로
청계천 물길이 복개되어 도로가 되는 과정의 역사를 다루었다
일제강점기 도시계획 속에서 차츰 물길이 사라지는 역사적 배경을 시작으로
8 · 15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청계천변에 빈민들의 삶의 터전 판자촌이 형성되었던 당시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청계천 복개공사와 그 위로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된 모습과
더불어 새롭게 탄생한 청계로를 따라 늘어선 천변 상가의 발전상도 살펴볼 수 있다
2존, 청계천, 청계로
일제강점기 청계천의 별명은 도시의 암종(癌腫), 제방도로의 별명은 '살인도로'였다
도시 인구 증가와 산업화, 생활양식의 변화로 인해 청계천의 수질은 급속히 나빠졌고 명절이면 풍성하던 천변의 민속놀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청계천을 복개하라는 시민의 요구가 빗발쳤으나 일제 당국은 이를 묵살했다
청계천을 복개함으로써 '도시의 암종'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겠다는 구상은 1936년 경성부역이 확장된 이후에야 나왔다
그러나 침략전쟁에 모든 재원을 쏟아부어야 했던 상황에서 이런 구상은 한갓 허황한 꿈에 불과했다
서울 시민의 염원이었던 청계천 본류 복개공사가 시작된 것은 1958년이었고, 청계천 전 구간이 복개된 것은 1977년이었다
이 장기간의 공사를 통해 청계천은 청계로가 되었고, 도로변에는 상가와 공장들이 들어서 한국의 산업화를 선도했다
청계로 위에 놓인 청계고가도로는 도로변에 건립된 3 · 1빌딩과 함께 오랫동안 서울 발전의 상징이자 한국 근대화의 상징적 역활을 했다
동(洞)과 마찌(町)의 경계 청계천
일제강점기에도 청계천은 서울 공간을 나누고 서울 시민을 사회적으로 구분하는 경계였다
1885년 일본인 거류지가 현재의 충무로 일대로 정해진 이후 서울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주로 청계천 이남에 살았다
일제는 1914년 서울의 행정구역을 전면 개편하면서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의 기초 행정 구역 명칭은 마찌(町)로 일본인 수가 적은 동네의 명칭은 동(洞)으로 통일했다
이에 따라 청계천은 마찌와 동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서 민족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일제의 도시 행정이 남촌 위주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부(富)를 일본인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남촌은 문명화한 공간, 북촌은 낙후된 공간이 되었다
소화(昭和) 2년 경성 및 부근 호구 누년 증가율(1925년)
종로 거리
북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종로거리
북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경성 동대문통
북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경성 조선인 마을
북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삼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남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태평로
남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본정 일정목 입구
남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본정거리
남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경성 본정 이정목
남촌 사진엽서(일제강점기 1910~1945년) 중 하나다
일제 식민도시계획과 청계천
1914년 경에 실시한 하천조사로 개천은 청계천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맑은 계곡물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청계천은 날이 갈수록 더러워졌다
인구와 산업시설의 증가가 주원인이었다
일제의 수탈적 농업정책으로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향하는 이농인구가 늘어났으며 신식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들어오는 젊은이들도 많아졌다
또 방직공장 · 고무공장 · 유기공장 · 염색공장 등 근대적 산업시설들도 도성 내외에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청계천에는 생활하수 외에 산업폐수까지 흘러들었고 그 양도 이전 시기보다 많아졌다
이로 인해 청계천의 오염이 도시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었다
청계천변 주민들의 전염병 발생률은 서울 평균보다 훨씬 높았고 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은 제방도로에서 추락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청계천의 역사 연표(1910~1945)
천변풍경, 전통과 근대의 공존
1930년대에 들어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다양한 문물들이 관광 · 상업 · 교통 · 유흥문화 전반을 크게 바꿨고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청계천변에 살았던 박태원은 1936년 잡지 '조광'에 소설 「천변풍경」을 연재했다
그가 이 소설을 연재하던 무렵, 청계천변에는 빨래터 · 한약국 · 포목전 등 조선시대 이래의 전통적 시설들과
이발소 · 하숙집 · 카페 · 식당 등 근대적 시설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통과 근대는 이들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안에도 공존했다
1930년대의 청계천변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면서 교차하는 공간이었고
천변 사람들은 이 변화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점차 근대적 생활양식에 익숙해져 갔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년 발표된「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미혼의 소설가 구보가
어느 날 집을 나서서 경성의 거리를 배회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일명 도시소설로 불리는 이 소설은 구보가 1930년대 경성거리의 근대시설과 문물을 접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내연의 감정을 잘 표현했다
종로거리 · 화신백화점 · 경성역 등 경성 명소 사진들과
경성 명승유람안내 · 경성 유람버스 영업안내 · 잡지 신여성 · 사진엽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경성우편국
황금정거리
경성 명승 유람안내(1930년대)
남대문 · 기생(1910~1945년) 사진엽서
경성 유람 자동자 승차 기념권(1939년) · 경성 명소 유람버스 영업안내(1930년)
잡지 '신여성'(新女性 · 1932년 12월)
마코 담배 · 담배 포갑지(1910~1945년)
미나카이오복점 경성안내도(1929년)
천변풍경
백태원의 1936년 작「천변풍경」은 이곳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마치 기록영화를 찍듯이 묘사한 세태소설이다
이 소설은 남자들이 주로 모이는 이발소와 여자들이 주로 모이는 빨래터를 무대로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50여 개의 삽화로 표현했다
한약방 주인 · 카페 여급 · 시골 색시 등 다양한 인물이 들장해 1930년대 중반 급격한 근대화의 물결과
전통적인 인습 사이에서 방황하는 도시 서민의 삶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대경성계획 속 청계천 복개 계획
경성의 환경과 위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천을 복개하자는 주장은 192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복개 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1934년, 일제의 침략전쟁 준비의 일환인 '대경성계획' 수립과 이에 따른 1936년 경성부역이 확대되면서부터이다
1935년 경성부는 청계천을 전면 복개하여 도로로 만들고 그 위에 고가철도를 놓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에 이르는 구간에 복개공사가 진행되었다
1939년에는 청계천을 복개하여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든다는 계획이 마련되었고
1940년에는 복개 구간 위에 전차를, 아래로는 지하철을 놓는다는 계획이 각각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들 구상은 재정문제로 인해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청계천개수계획 종단도 · 청계천개수계획 평면 및 종단도 · 경성교통계획도(1936년경)
8 · 15광복과 해외동포의 귀환
1945년 8월 15일, 한국인들은 식민통치의 억압에서 벗어났다
해방을 맞은 서울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고 식민도시 '경성'으로 격하되었던 서울은 원래의 이름과 위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새 나라를 건설하는 길은 무척 험란했다. 냉전 체제는 한국인을 분열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었고
결국 1948년 8월 15일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구 이동의 거센 물결이 여러차례 서울을 휩쓸고 지나갔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갔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외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전재동포(戰災同胞)가 되어 서울로 밀려들었고 이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 또한 서울로 모여들어 정착했다
1945년 8 · 15광복 후 3년간 귀국한 해외동포와 월남한 사람의 수는 250만 명에 달했다
만원 서울
한국전쟁 중 서울의 주택과 도시기반시설, 생산시설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서울 시민들은 빈손으로 자신의 삶터를 다시 일구고 나라를 재건해야 했다
서울에서 전후 복구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지방민과 월남민이 서울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 인구는 폭증했다
전쟁 직후 124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965년에는 347만 명, 1970년에는 543만 명으로 늘어났다
1966년에 이미「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이 나왔으나, 인구 급증 현상은 그 뒤로도 20년 이상 지속되었다
폭증하는 인구에 비해 도시기반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새로 서울 시민이 된 사람들 대다수는 도시 외곽의 구릉지나 하천변에 판잣집을 지어 정착했다
도시 곳곳에 무허가 불량주택 단지가 생겼고, 이런 곳들은 도시 행정의 모든 면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를 제기했다
피난민증(1950년)
피난민 가정 실태표 및 구호양곡 배급카드(1950년)
서울특별시민증(1962년)
한국전쟁과 피난민 월남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진했던 국군과 UN군은 그 해 가을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했다. 이때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함께 월남했다
이들은 처음 부산 · 대구 등지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일자리를 얻거나 원조물자에 접근하는 데에는 서울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새 월남민들은 한국전쟁 이전의 월남민들이 모여사는 곳 주변에 정착했다
이에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지였던 남산 주변이 월남민들의 중심 거주지가 되었다
경제성장, 이촌향도의 물결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외자도입이 본격화한 196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은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전차가 철거되고 지하철이 새로 개통되었다
불량주택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고층빌딩이나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강남이 개발되고 수출산업공단이 건설되었다. 서울은 언제나 '공사중'이었다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1970년에 서울 인구는 500만을 돌파하였고, 1978년에는 800만을 넘어섰다
늘어가는 무허가 불량주택
한국전쟁 중 서울 주택의 1/3정도가 파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 들어왔다
사람들은 빈터만 있으면 나무 상자에서 떼어낸 판자조각으로 움막 같은 집을 지었다
서울 전역의 고지대와 한강변, 개천가가 판자촌이 되었다
이 무렵 청계천변은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판자촌 밀집 지역을 이루었다
개천가에 위태롭게 지어진 천변 판잣집들은 홍수와 화재, 전염병에 무척 취약했다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
조선 후기 청계천 다리 밑과 오간수문 양쪽의 가산은 거지들의 공간이었고, 아랫대는 군병(軍兵) 등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지였다
근대화 과정에서도 서울에 인구가 급증할 때마다 청계천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쉴 자리를 내 주었다
가산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으나 청계천 다리 밑에서는 해방 후까지도 거지들이 모여 살았고
일제강점기에는 청계천 하류 제방 위 곳곳에 토막(土幕)들이 들어섰다
청계천변 판잣집
해방 직후에는 전재민(戰災民)들이, 한국전쟁 이후에는 월남민들과 상경민들이 청계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변 판자촌은 주거지일 뿐만 아니라 시장이자 산업지대이기도 했다
천변 사람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사고팔았고 폐품을 재활용하여 새 상품을 만들어 냈다
해방과 전쟁을 겪은 뒤의 산업화 과정에서 청계천은 시골사람이 서울사람으로 바뀌고 농민이 노동자로 개조되는 전이(轉移)지대였다
삶의 터전, 천변 판자촌
모든 판잣집이 불량주택이었지만, 천변 판잣집은 특히 심했다
하천 바닥에 세운 기둥에 위태롭게 의지한 집들은 홍수에 쉽게 떠내려가곤 했다
집안에 화장실을 만들기 어려웠고, 아궁이를 설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안 되는 공동변소 앞은 아침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난로가 가열되거나 화로가 엎어져 화재가 나는 일도 잦았다
하루 사이에 판잣집 몇 채가 사라지면, 다음 날 또 몇 채가 들어서곤 했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지만 판자촌 사람들에겐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삶을 꾸려가는 보금자리였다
천변 도깨비시장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감에 따라 수많은 생산시설이 가동 중단 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태에서 청계천변에는 생계를 위해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파는 노점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청계천변 노점시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확대되어 합법적인 상품이든 불법적인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시장이 되었다
이 시장의 상점 주인과 종업원들 다수는 천변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청계천변 노점시장은 평화시장 · 공구기계상가 · 황학동 벼룩시장 등의 기원이 되었다
도시개발의 걸림돌, 청계천
청계천 판자촌은 1950~60년대 서울을 대표하는 슬럼이었다. 주민 중에는 병든 사람들, 죄 짓고 숨어 사는 사람들, 성매매 여성들도 많았다
천변에 소규모 산업시설들이 늘어남에 따라 물도 계속 더러워졌다. 청계천과 천변은 서울에서 가장 부끄러운 장소가 되었다
서울을 현대도시로 가꾸기 위해서나 천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나 청계천 복개와 천변 판자촌 철거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청계천 복개공사는 서울 도심부의 재개발을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청계천 사진들
한영수 · 홍순태 · 노무라 모토유키 · 김한용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뒤돌아 본 2존
복개도로가 된 청계천
1950년대 말의 청계천과 천변은 위생 · 교통 · 범죄 등 현대 도시생활의 온갖 부정적 현상을 다 끌어안은 문제적 공간이었다
이 문제적 공간을 도심에서 제거하는 것이 서울의 당면 현안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일은 일제강점기 이래 숙원이기도 했다
1958년 5월, 영조 때 준천 이후 처음으로 청계천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는 광통교에서부터 하류 쪽을 향해 진행되었다
청계천 본류 전체가 땅 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은 공사 시작 20여 년 후인 1977년이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사라지고 대신 청계로가 생겼다
복개공사는 물길을 덮는 공사일 뿐만 아니라 천변의 판잣집들을 허무는 공사이기도 했다
판잣집들이 늘어서 있던 청계천 양안에는 현대적인 상가 건물이 동서로 길게 뻗어 1960~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는 중심지 역활을 했다
판자촌에서 달동네로 철거민 이주정책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는 도시 미관과 위생 상태를 개선하여 현대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기 위해 무허가 불량주택들을 본격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했다
종묘 앞에서 남산에 이르는 이른바 종삼(鍾三) · 청계천변 판자촌 · 낙산 · 남산 · 인왕산 등 산자락의 판잣집들이 1차 철거 대상이었다
철거와 함께 새 주거단지 건설계획도 마련되었다
서울 외곽에 대단지를 조성해서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키고, 무허가 불량주택 일부는 개량하여 양성화하는 한편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시민아파트를 대량 건설한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었다
이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청계천 양안에 늘어서 있던 판잣집들도 속속 철거되었다
서울의 수치로 여겨졌던 천변 판잣집들은 사라졌으나 그 대신 봉천동 · 신림동 · 난곡동 등 서울 변두리 산비탈 여러 곳에 '달동네'들이 생겨났다
청계천 판잣집 철거(1962 · 1969)
경기도 광주로 이사개발지구 복덕방(1971년)
새서울 도시계획정보약도, 1971
1971년 3월 20일 인창서관에서 발행한 '새서울 도시계획정보약도'이다
지도 아래에는 도시계획과 관련된 기사들을 스크랩해 놓았는데 정부종합청사 준공식 및 서울시 새〈마스터플랜〉
개봉동 각 블록 약도 · 광주대단지 약도상공부 산하 12업체 삼성동 이전(영동지구 개발계획)에 관련된 내용이 있어 주목할 만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년)
강제 철거로 인해 자살로 내몰린 난장이의 상황을 통해 19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대변하고자 했다
청계천을 덮어라
1958년 5월, 서울시는 3개년 계획으로 청계천 전면 복개에 착수했다
책정된 공사비는 ICA(국제협조처) 자금 20만 달러와 국비 6억 원이었다
1955년 광통교 상류의 135.8m 복개공사를 시작으로, 1961년 11월 오간수교까지 1단계 복개공사가 마무리되었고
그 해 12월 5일 복개도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1965년부터 2년에 걸쳐 동대문 옆 오간수교에서 제2청계교에 이르는 구간이 복개되었으며
1967년에는 나머지 구간을 복개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1977년에 완료되었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년)
이 소설의 등장인물 권씨는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무리해서 입주권을 산 소시민을 대표한다
1971년 8월 발생했던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복역했던 저자 윤흥길이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의 문제점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수진리 농성 · 1971년 8월 10일)
1967년 서울시는 23만여 동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127만 명의 주민을
서울시 밖으로 이주시키겠다는 구상 아래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철거민 이주단지를 조성했다
1969년 용두동과 마장동 · 청계천 주변에 거주하던 주민 2만여 세대가 이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상 · 하수도 등 생활기반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진행된 이주정책으로 각종 환경문제가 발생했다
광주대단지 시위(1971년 8월 10일)
일자리 또한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주민들의 생활고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일자리를 달라", "토지불하 가격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렸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도시빈민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
청계천 복개 도로(1962년)
1958년 착공한 청계천 복개 1단계 공사가 1961년 12월 4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23억 3천 2백 52만환, 연 인원 24만 2천 87명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1961년 완공된 청계천 복개도로 길이는 2,358m에 이르렀다. 1961년 12월 5일 1단계 공사 완공에 대한 개통식이 열렸다
묻어지는 청계천, 명암 이중주 울리며
하나는 개천 주변에 제대로(도시계획대로) 자리잡은 주택이나 상점을 가진 사람은
앞으로 적어도 50~60%까지는 값이 오르리라는 은근한 즐거움이고... 또 하나는 강제철거를 앞둔 7백여 「빠락」 점포주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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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립공사가 진행중인 청계천 사진
청계천 복개 과정
1980년대 철거민
불량주택 철거와 재개발은 1980년대에도 서울 곳곳에서 활발히 진행되엇다
특히 1983년 합동재개발 방식의 도입은 철거 재개발 문제를 도시민들 사이의 핵심 갈등 요소로 만들었다
합동 재개발 방식이란 토지 소유자들이 재개발 조합을 결성하면 그 조합에 시행권을 주는 방식인데
이에 따라 토지 소유주들과 무허가 건물주, 세입자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목동 · 사당동 · 상계동 등지에서 폭력적인 철거와 저항이 반복되면서 '철거민 운동'이 도시사회운동의 한 영역으로 자리잡았다
철거민 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상계동으로, 이곳 주민들은 '재개발사업의 전면 철폐'까지 주장했다
도시노동운동,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청계로는 한국 산업화의 빛과 그늘을 모두 간직한 장소였다
특히 동대문 주변은 1960년대부터 의류 · 가발 등 소비재산업의 중심지로서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전초기지 역활을 했다
동대문 주변이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과정의 이면에는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린 저임금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그들 대다수는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10대의 어린 노동자들로
하루 12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임금은 매우 적었고 작업환경도 매우 열악했다
1970년 겨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자들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외치며 청계로에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은 한국 현대 노동운동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근대화의 상징, 청계고가도로
1960년대부터 고가도로, 입체교차로 등의 도로시설물이 등장했다. 청계천 고가도로의 구상도 이때 현실화되었다
1967년 5월 서울시에 제출된「청계천 은거 및 고속고가도로 건설 사업 계획서」에 따르면
공사구간은 이대입구에서 마장동까지였고 예상 건설비는 90여억 원이었다
이 계획은 여러 차례의 변경을 거쳐 1969년 3월 22일 연장 4km의 삼일고가도로로 1차 실현되었다
이후 고가도로를 마장동까지 연장하는 공사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1984년에는 청계고가도로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러한 도로시설물은 산업화, 근대화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청계로 스카이웨이
「청계천 은거 및 고속고가도로 건설 사업계획서」에 수록되어 있는 청계로 스카이웨이 조감도이다
이 계획서에는 서울시의 용역에 따라 건설의 타당성을 조사한 미림기술공단의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는데
보고서에는 건설 노선과 다섯 가지 고가도로 설계안, 예상 건설 예산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고가도로 교량의 구조
청계고가도로는 콘크리트 거더(girder) 대신 거더와 상판 모두 철강을 주재료로 사용했다
이는 한국에서 최초로 건설되는 형태의 다리였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고 일본에서 수입한 철강으로 상판을 만들었다
삼일고가도로 완성, 개통식(1969년)
불이 꺼지지 않는 청계천 상가
청계천 물길은 서울 시민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대신 청계로가 생겼다
청계로 양쪽에는 현대식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고, 복개 구간이 늘어남에 따라 그 길이도 길어졌다
1905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광장시장을 거점으로 하여 동대문 상권은 계속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청계천 상가의 발달
1962년에는 평화시장이 문을 열었고, 1967년부터는 신평화시장 · 동평화시장 · 청평화시장이 계속 생겨나
1960~70년대 소비재 상품을 중심으로 한 수출 주도형 산업화를 선도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거평프레야 · 밀리오레 · 두산타워 등 고층 의류전문상가가 차례로 생겨나면서 동대문 주변은 세계 굴지의 패션의류 시장으로 성장했다
또 한국 전자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세운상가와 그 주변의 수많은 공구기계상가 · 조명상가들은
'못 만드는 것이 없고 못 구하는 것이 없는' 청계천의 신화를 낳았다
청계로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의 산업지도였다
평화시장
1950~60년대 서울 시민이 된 사람들 대부분이 변변한 기술이 없었고 그나마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 장사일과 재봉일이었다
청계천변 판자촌 주민 중에는 재봉틀을 구해 옷을 만들거나 군복을 염색해 판매하던 사람이 많았는데 이들이 평화시장의 초석을 놓았다
청계천 판자촌 주변에 무질서하게 늘어섰던 상점들은
1958년과 1959년의 대화재와 청계천 복개공사를 계기로 정리되어 1962년 신식 건물인 '평화시장'으로 재탄생했다
평화시장의 등장과 성공은 동대문 일대가 대표적인 의류도매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헌책방
성균관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청계천 본류와 합류하는 지천의 원래 이름은 흥덕동천이었다
1926년 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자리잡은 뒤로는 '대학천'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대학천과 청계천 본류가 합류하는 지점에는 해방 직후부터 헌 책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들어섰다
1960년대 청계로가 생긴 뒤 대학천 책방 일부는 청계로변으로 이동하여 주로 헌책을 취급했고 남은 책방들은 새책을 싸게 파는 도매상으로 변신했다
세운상가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 일제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종묘 앞에서 남산 기슭에 이르는 구간의 집들을 철거하고 공터로 만들었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이 빈터에 무수한 판잣집이 들어서서 속칭 종삼(鍾三)이라 불렸던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을 이루었다
1968년, 서울시는 이 일대의 판잣집을 전면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건축가 김수근의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고급 주상복합건물단지를 지었다. 이것이 지금의 세운상가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다'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세운상가는 청계고가도로, 삼일빌딩과 함께 1960년대 도시 현대화와 경제발전의 상징이었다
공구기계상가
세운상가 주변 장사동 · 입정동 · 신림동 일대에는 공구기계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작업도구와 공구를 취급하는 상점들은 주로 대로변에 있고 안쪽 좁은 골목에는 부품과 시제품을 제작하는 공장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에 소규모 공구 상점과 기계 제작 공장들이 밀집한 것은 가까운 을지로 6가에 미군공병단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공구와 부품을 수리, 재생하는 일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를 떠받친 업종 중 하나였다
청계로의 역사(1948~1984)
삼일아파트
1969년 청계로 양편 종로구 창신동과 중구 흥인동에 삼일아파트가 완공되었다
총 1,243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대규모 주상복합아파트 단지였다
1967년 정부는 '제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안에 주택 건설 계획을 포함시켰는데
그 내용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대도시 불량지구를 개발하여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건립한다는 것이었다
삼일아파트는 청계천 판자촌에 거주하던 철거민을 수용하는 한편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전진기지로 부상한 평화시장의 생산 유통권역을 확장하는 역활을 수행했다
세운상가 육교 위의 노점상
청계천 판자촌은 가난한 사람의 주거지였고, 청계천변 노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일터였다
한국전쟁 이후 월남민 다수가 장사꾼 대열에 합류하면서 청계천변 노점시장은 급팽창했다
청계천이 복개되고 평화시장이 생긴 뒤 노점상 일부는 어엿한 점포주인이 되었으나 그래도 청계로 주변은 전국 최대의 노점 밀집지대로 남았다
황학동 일대에는 중고품과 골동품을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고 세운상가 주변 육교상가에는 불법음반 · 성인잡지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다
청계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