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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청계천박물관 백운동천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자연 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초 도성 건립과 배수 물길을 위해 개천 정비 작업을 했다

태종 때는 자연천 정비를 하면서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 혜정교 등을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때 개천 공사를 계기로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태종 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때는 지천과 세천에 대한 추가 정비였으며 청계천을 처음으로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

오늘날의 청계천의 모습은 영조 때 이르러 완성되었다

 

 

백운동천(白雲洞川)

백운동은 전통적인 절경지로 백운동천의 서북쪽 일대의 상층부를 일컫는다

백운동천은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 도성 내 청계천 지류 중 가장 길어 청계천의 원류로 간주된다

준천사실에는 백운동래자(白雲洞來者)로, 한경지략에는 백운동천수(白雲洞川水)로 되어 있다

현재는 계곡수가 유입되는 상류의 일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복개되어 자하문로로 쓰이고 있다

복개 이전의 하천은 현재의 청계광장 위치에서 삼청동천과 합류하였다

 

 

 

 

기획전시실

백운동천이 열리고 있다

 

 

 

 

청계천의 시작은 어디인가?

현재 청계천은 서울의 종로구와 중구를 가로질러 왕십리 방향으로 흐른다

조선시대까지 청계천은 자연 하천으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형세였다

이번 전시는 바로 청계천의 시작, 첫 물길인 백운동천을 따라간다

 

 

 

 

한양도(漢陽圖 · 1760년대)

〈한양도〉는 서울의 도성 내 · 외부 지역을 나타낸 지도이다

경복궁 서쪽의 창의문에서 시작한 물길이 송기교까지 나타나 있다

백운동 · 청풍계 · 옥류동 지명과 순화방이 표시되어 있다

 

 

 

 

한양도(漢陽圖 · 1760년대)

창의문 밑 순화방에서 시작한 물길이 자수궁교(慈壽宮橋)와 송기교(松杞橋)를 지나 삼청동천과 만난다

 

 

 

 

백운동, 백운동천

백운동은 조선 5대 명승지의 하나로 백운동천의 서북쪽 일대의 상층부를 일컫는다

여기서 동(洞)은 행정구역 동이 아니라 골짜기, 계곡이라는 의미이다

암벽이 험준한 인왕산 중 골짜기 백운동의 산등성이 넘어 필운동의 필운대가 있고 인왕동 · 옥류동 · 수성동 등의 마을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주변부로 송석원 · 청풍계 등 명소가 이어진다

 

 

 

 

강희맹 인왕산 백운동 계곡

 

 

 

 

겸재 정선 창의문도(彰義門圖 · 1751)

한경지략(漢京識略) · 준천사실(濬川事實)

 

 

 

 

겸재 정선의 창의문도(彰義門圖 · 1751)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창의문과 그 옆으로 흐르는 백운동천 물길이 표현되어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 준천사실(濬川事實)

한경지략은 한성부의 역사와 지명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백운동 물길이 백운동천수(白雲洞川水)로 표기되어 있다

*

준천사실은 1760년(영조 36)에 한성판윤 홍계희가 준천사(濬川司)의 사업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물길의 시작을 백운동천이라 기록하였다

 

 

 

 

경복궁 서쪽마을 사람들

경복궁 서쪽은 조선시대 행정구역 상 한성부의 북부와 필운대를 경계로 아래지역인 서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궁궐을 비롯한 기능은 주로 북쪽에 편중되어 있었고

백운동천과 옥류동천이 시작되는 상류지역은 부로 왕족들과 사대부들이 자리 잡았으며

후에는 웃대라고 불리며 중인들의 행락지역으로 사랑 받았다

 

 

 

 

왕기가 서린 백운동천

백운동천에는 왕들이 왕이 되기 전에 생활했던 잠저들과 여러 왕자들의 생활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

1. 태종과 세종의 잠저가 있던 준수방(俊秀坊)

2.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彰義宮)은 순화방(順化坊)에 있었다

3.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첫째 아들인 무안대군의 거주지가 주수궁교 인근에 있었고

4.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수성궁(壽聖宮) 추정지다

 

 

 

 

건구고궁(乾九古宮) 편액 · 청음집(淸陰集) ·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 · 청풍계도(淸風溪圖) · 청풍계(淸風溪) ·  창의궁 배치도(彰義宮 配置圖)

운영전(雲英傳) · 양정재시화첩(養正齋詩畵帖) · 고봉집(高峯集) · 귀은당집(歸恩堂集) · 송석원십팔영(松石園十八詠)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건구고궁(乾九古宮 · 1730) 편액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 정당에 걸었던 편액으로 「재위 이전의 옛집」이란 뜻의 영조 어필 편액이다

 

 

 

 

청풍계도(淸風溪圖 · 1676)

겸재 정선의 청풍계이다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 현재의 청운동에 해당하는 곳으로 조선 후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장동 김씨 세거지였다

정선은 장동 김씨의 후원을 받았으며, 청풍계는 정선이 즐겨 그린 곳 중의 하나이다

 

 

 

 

청풍계(淸風溪 · 1633)

선조의 어필로 탁본한 것이다

 

 

 

 

운영전(雲英傳 · 조선시대)

안평대군의 집이었던 수성궁을 배경으로 궁녀 운영과 소년 선비 김진사와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고대소설에서 보기 드문 비극적 성격의 작품이다

 

 

 

 

청음집(淸陰集 · 1627)

조선후기 문신인 장동김씨 김상헌의 시문집이다

 

 

 

 

백사선생집(白沙先生集)

백사 이항복의 시문집이다

1629년(인조 7)에 이현영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강원부사 이명준과 백사집을 간행하였다

백사 이항복의 집터 필운대가 백운동천 유역에 남아 있다

 

 

 

 

창의궁 배치도(彰義宮 配置圖)

 

 

 

 

양정재시화첩(養正齋詩畵帖 · 1922)

7점의 그림이 실려 있는 서화집이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그의 문인과 후학들이 조선의 흐름과 17세기 당시 선비들의 교우 관계를 살펴 볼 수 있으며, 송시열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고봉집(高峯集 · 1700년대)

조선중기 문신인 기대승의 시문집이다

성수침의 묘지명(墓誌銘)이 실려있다

 

 

 

 

귀은당집(歸恩堂集 · 1834)

조선 후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남공칠의 시문집이다

 

 

 

 

송석원십팔영(松石園十八詠 · 일제강점기)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곳에

정조 때 평민 시인 천수경이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이라 하였고

1914년에는 경술팔국적(庚戌八國賊)의 한 사람인인 윤덕영도 프랑스풍 저택을 짓고 역시 송석원이라 하였다

 

 

 

 

경복궁 서측에 자리한 학교들

서쪽 마을에 꽃핀 교육의 꿈은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엄순황 귀비(嚴淳皇貴妃)의 지원을 받아 자리 잡은 근대사립학교, 진명여학교와 양정의숙이 장성동과 도렴동에 위치했었다

일제강점기 공립학교로 설립된 경기도 최초의 도립학교 경기도립갑종상업학교와 조선인만 재학하였던 중등교육기관인 공립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도

각각 경기상업고등학교와 경복고등학교가 되어 아직까지 청운동에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 서측에 자리한 학교들의 기록

경복고등학교 교복과 교모 · 교지 · 졸업앨범(일제강점기~현대) · 제15회 경기도립갑종상업학교 졸업앨범(현 경기상업고등학교 · 1941년)

양정중학교 51회 졸업앨범(1965년) · 진명여자고등학교 제44회 졸업앨범(1955년) 등이 있다

 

 

 

 

진명여고 졸업앨범

 

 

 

 

경복공립중학교 자료 3종(일제강점기)

경복공립중학교 교우회지 제5호(1939) · 경복공립중학교 교우회지 제6호(1940), 동창회원명부(1944)

 

 

 

 

변화하는 백운동 1907~1912

백운동은 조선후기 들어 남벌과 개간의 확대로 인해 계곡이 훼손되었다

백운동만의 현상은 아니었으며 전국적으로 산림의 황폐화가 심했다

인구의 증가와 온돌의 확대와 같은 직접적인 요인과 조선의 산림육성에 대한 이렇다 할 정책이 없었던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고종실록 고종 15년(1878) 3월 29일

도성의 사산에서 나무를 장구하게 기르는 것은 법의가 있으니 각 영에서는 소나무를 못 베도록 엄금하는 것입니다

 

 

 

 

백운동 일대 1915년 · 백운동 1907년

백운동은 어떻게 변했나 1907 · 1912년 사진 두 장과

조선의 비망록 · 최근조선사정요람 · 조선산림회보 · 산림법령 · 조선실용 림업독본이 전시되어 있다

 

 

 

 

 

 

1907년의 백운동 일대 사방공사 전

일제는 통감부 시기 최초의 인공조림지로 백운동을 선정하고 시범적 사방공사를 시행하였다

1907년에서 1912년 약 5년여만에 숲이 무성해지는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졌다

 

 

 

 

1915년의 백운동 일대 사방공사 후

특별히 백운동이 조림된 것은 경성부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 수원으로서

이곳에 나무를 심어 수원지의 환경을 개선하고 경성시내에 정수를 공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비망록(W. F. 샌즈 · 19세기)

1900년부터 1904년까지 한국에서 고종황제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윌리엄 샌즈가 조선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왜 이 나라가 이렇게 황폐한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설명은 참으로 한국적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가능한한 외국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연안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며

내륙에서는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 불을 살랐고 언덕은 정상으로부터 토양이 씻겨 내려올 만큼 벗겨졌다는 것이다"

 

 

 

 

최신조선사정요람(最近朝鮮事情要覽 · 1911)

조선의 최근 사정을 기록한 책으로, 대정 원년(1911)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였다. 국한문 혼용으로 표기되어 있다

책의 앞 부분에는 백운동의 사방공사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산림회보(朝鮮山林會報 · 1933)

조선총독부에 대한 산림정책 건의 및 산림에 관한 조사연구 · 강연 · 강습 · 품평회 등을 개최하였던 조선산림학회의 회보이다

조선산림학회에는 조선에서의 조림과 사방공사의 내용이 실려있다

 

 

 

 

임야법령(林野法令 · 1908)

 

 

 

 

백운동천 · 사라지는 물길

청계천은 만성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하천에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오물과 배설물로 인한 위생 문제는, 20세기 초 유행한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또 천변 양측의 노폭이 좁아 낙상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 교통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개천의 문제를 해결하고 명랑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하수도의 개수가 절실했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경내로 옮겨지고, 청계천 북쪽으로 식민지배기관들이 뒤따라 자리하면서 백운동천까지 정비가 시작되었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경내로 옮겨지고, 청계천 북쪽으로 식민지배기관들이 뒤따라 자리하면서 백운동천까지의 정비가 시작되었다

1800년대 후반 경희궁 내수와 청계천 본류가 만나는 일부가 복개되어 전차 개통을 용이하게 한 뒤

1925~1932년 신교동에서 도렴동 간 1,395m 구간이 암거(暗渠)되고 옥류동천 일부 구간이 1932년까지 복개된다

 

 

 

 

청계천의 오염과 위생문제

19세기말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전염병은 조선의 위생문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콜레라의 대유행의 원인 중 하나로 청계천의 오염이 지목되어, 복개는 시급한 과제로 급부상하였다

경우궁터의 순화병원은 조선인 전염병 환자를 통제하고 격리하기 위한 피병원(1911)으로 출발하여 경성부립순화병원(1933)

그리고 1959년 서울특별시립중부병원으로 다시 한 번 개칭된 후 1977년 폐원한다

대한적십자병원은 1905년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해 환자에게 병원비와 입원비를 받지 않았다

영추문 맞은편 민가에 자리하였으나 이듬해까지 의료를 펼치다 1년여 만에 대한의원에 편입되었다

 

 

 

 

조선의료령철(朝鮮醫療令綴 · 1926) · 장티푸스예방주사제증(1926)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조선의료령과 관련된 서류 및 문서를 철해 놓은 것이다

본령이 1926~1927년경부터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경성부에서 발급한 장티푸스 예방주사 제증(濟證)이다

 

 

 

 

전차의 운행

도로의 무질서와 불결을 바로잡은 것은 곧 도로정비사업의 시작이었다. 도로정비는 도로망의 구축을 말하는 것이다

백운동천의 경우, 복개와 도로 구축 같은 물리적인 변화는 총독부 신청사의 경복궁 이전이 동기가 되었다

광화문 앞에서 영추문 · 통의동에서 효자동까지의 전차길 확장으로 그 일대의 도로가 정비되고

거주민들, 특히 식민통치기구에 근무하는 직원과 동양척식회사 사택에 살았던 일본사람들의 이동이 편리하게 되었다

 

 

 

 

경성전차 및 버스 안내도(1930)

1930년대에 그려진 전차 및 버스 종합 안내도이다. 전차가 효자동까지 연장된 것을 볼 수 있다

버스는 청량리~마포 · 왕십리~한강교 등의 구간을 운행하며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다

 

 

 

 

조선총독부청사신영지(朝鮮總督府廳舍新營誌 · 1926)

조선총독부가 청사를 신영하면서 출판한 준공보고서이다

 

 

 

 

백운동천의 역사 및 경관변화

 

 

 

 

영추문 옆 철길

 

 

 

 

영추문 궁장의 훼손과 전차

전찻길은 광화문에서 조선 부업품공진회 출구가 되는 곳까지 열결하려는데... 궁장을 헐고 서십자각을 철거할 수 밖에 없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2일)

 

 

 

 

하수개수공사와 백운동천 복개구간

은거, 백운동천 도로 아래로 개천의 개수(改修)는 명랑도시 경성을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대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개수공사는 곧 위생과 보행의 안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1907년 지류들의 복개가 이루어졌고, 백운동천은 제2기 하수도 개수공사(1925~1932)를 통해 땅 아래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경성시가 배수철관 부설 평면도(1926) · 최신대경성전도(1940) · 경성부부세일반(1924)

경성부 부내에 설치되어 있는 배수철관의 현황을 그린 지도이다

일제의 상수도 확장사업은 1기(1919~1922) · 2기(1929~1933) · 3기(1936~1945)로 나뉘었다

*

1940년 서울의 경계선이 빨간색 실선 두 줄로 표시되어 있고, 구분계는 검고 굵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를 보면 당시 총독부 인근에 도로와 가옥들이 밀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경성부에서 간행한 경성부 관내도 및 통계자료이다

 

 

 

 

경성부도시계획요람(일제강점기)

경성부도시계획요람으로 시가지 계획의 조사 및 계획 · 건축 관리 · 가로사업 · 하수사업 · 토지구획 정리사업과 재원 · 각종 세세한 통계가 수록되어 있다

*

시가지계획 도로공사비 산출참고표(1936)

각 구간 별로 용지비 · 이전비 · 공사비 등과 사무비의 합계를 산출한 것으로 청운동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근대시설로의 탈바꿈

조선시대 궁묘(宮廟)와 궁실(宮室)들은 병원 · 사택지 · 고아원과 같은 근대시설로 탈바꿈되었다

영빈이씨를 제사지내기 위한 왕실사묘인 의열묘(義烈墓)는 선희궁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870년 신주를 육상궁으로 이전한 선희궁은 모두 철거된다

선희궁터에는 서대문에 있던 고아원이 이전하여 1911년 재생원이라 개칭한 뒤 자리 잡았다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은 의소묘 · 문희묘의 신위를 매장함으로써1908년 폐궁되었다

이후 주택지로 변한 이곳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지가 되었다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사당이었다

1908년 육상궁에 합사되며 폐궁이 되었고, 전염병 환자 격리병원인 피병원(순화병원)이 되었다

 

 

 

 

① 재생원 맹아부 · ② 피병원(순화병원) · ③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

 

 

 

 

영빈이씨묘지명(暎嬪李氏墓誌銘 · 조선후기 · 서울유형문화재 제311호)

선희궁에서 신위를 모셨던 영빈이씨의 묘지(墓誌)이다

묘지문에는 영빈이씨의 가계와  그가 영조와의 사이에 낳은 1남 6녀에 관한 내용 · 성품 · 영조가 애도의 마음을 표한 글 등이 적혀 있다

 

 

 

 

천변사진(川邊寫眞 · 일제강점기)

 

 

 

 

동양척식회사 조선내의 사업(일제강점기)

동양척식회사가 조선에서 추진하였던 사업과 관련 내용이 담긴 팸플릿이다

 

 

 

 

경성부 토지대장 소유주 1917 · 1927 / 경복궁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북점(동아일보 · 1923년 10월 26일 기사)

 

 

 

 

서쪽에 핀 천재 문인들

교통과 학교라는 도시 인프라의 구축은 서측마을에 많은 인재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이상의 집에서 몇 발자국 지나지 않은 곳에 모윤숙이 거주하기도 했으며 소설가 김송의 집에는 윤동주가 하숙을 했다

나혜석은 진명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생 최우등의 영예를 안은 바 있다

이름만으로도 내노라하는 우리 역사의 큰 족적을 남긴 천재문인들이 그 시절 그곳에 있었다

 

 

 

 

조광 9월호(1936) · 이상선집(1949) · 이상전집1, 2권(시집, 1956, 1958)

이상(김해경 · 1910년 8월20일~1937년 4월 17일)은 1921년 누상동 신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상의 집(자하문로 7길 18)은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첫 보전재산으로 매입하였다

시, 소설, 수필에 걸쳐 두루 작품 활동을 한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다

이상의 시와 소설은 황량한 내면풍경, 불안과 공포, 파편화되고 물화된 현대인의 소외 등 1930년대 모더니즘의 특성을 보여준다

 

 

 

 

나혜석(1896년 4월 28일~1948년 12월 10일)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태여나 도쿄 유학 중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했다

호는 정월(晶月)이고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3 · 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였다

 

 

 

 

학지광 12호(1917) · 잡지 신여성 4-6호(1926) · 잡지 조선문단 12호(1925)

조선에서 '신여성'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1920년대이다

이때 등장한 신여성 제1세대로 김명순 · 윤심덕 · 김일엽 · 나혜석이 있다

그들은 모두 1910년경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세대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김송(1909년 7월 10일~1988년 4월 25일)

초기에는 희곡을 저술하였으나 1940년대 중반 이후 소설에 주력하였다

지방색이 짙고 소시민의 생활 묘사가 특징적이다

광복 후에는 극심한 이념적 갈등 상황 속에서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현진건(1900년 8월 9일~1943년 4월 25일)

현진건은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서촌(창의문로 5가길 5 부근)에 살았다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식민지시대의 현실 대응 문제를 단편적인 기교로 양식화하여 문학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이상범이 장정한 책이다

이상범 가옥은 필운대로 31-7에 위치한다

박노수의 스승이며, 전통적 수묵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더불어 대한민국 자연의 독특한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풍의 화법으로 구현하였다

 

 

 

 

박노수가 장정한 책이다

박노수 가옥(서울시문화재자료 제1호, 종로구 옥인1길 34)은 박노수가 구입해 소장 · 관리하다가 2011년 11월 종로구에 기중했다

가옥은 물론 500여 점의 작품 및 490여 점의 고가구 등을 포함하였다

이후 오랜 보수공사를 거쳐 종로구 최초 구립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청계천의 첫 물길 백운동천 모니터와 관람객 설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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