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낙동강 하류지역인 변한에서 1세기경 12부족의 연맹체가 단합하여
금관가야(김해) · 대가야(고령) · 소가야(고성) · 아라가야(함안) · 성산가야(성주) · 고령가야(함창) 등 6가야로 통합된 가야(伽倻)는
신라와 백제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국의 정치적 위협을 받아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나
금관가야(본가야)를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일본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대륙문화 전달에 기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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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가 김해 지역 9간(九干)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자 왕릉의 주인은 홀연히 함창 지역으로 올라와 고령가야를 세웠다고 한다
고령가야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창 외에도 경남 진주도 거론되었으나 요즘은 함창으로 굳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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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려 11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며 태조왕(太祖王)이라 불린다
그 다음 2대 마종왕(摩宗王)은 156년에 즉위하여 65년간 나라를 통치했으며 3대 이현왕(利賢王)은 220년에 즉위하여 35년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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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12대 군주 첨해왕(沾解王 재위 47~261)은 경북 북부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상주(尙州)에 있던 사벌국(沙伐國)과 고령가야를 정벌했다
나라를 잃은 고령가야 사람들은 상당수 금관가야를 비롯한 다른 가야 연맹으로 넘어갔다고 하며
일부는 백제로 망명했다고 하며, 일부는 끝까지 남아 신라와 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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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설에는 신라 9대 벌휴왕(伐休王 재위184~196) 2년(185년)에 망했다고도 하는데
상주 지역에 있던 사벌국이 249년(11대 조분왕 17년)에 망했으므로 그 이후인 254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라가 고령가야로 가려면 반드시 사벌국을 거쳐야 되기 때문이다
고령가야 태조왕릉
조선 선조 25년(1592년)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수(1537년~1615년)와 함창 현감 이국필 등이
무덤 앞에 묻혀있던 묘비를 발견하여 고령가야 왕릉임을 확인했다고 되어있다
그후 조선 숙종 38년(1712년) 왕명으로 묘비와 석양 등의 석물을 마련 후 후손들의 의해 여러차례 묘역이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령가야 태조왕릉 안내도
고령가야국의 옛 도읍, 함창읍(咸昌邑)이 나온다
함창은 상주시(尙州市)에 속한 작은 읍으로 전 고령가야왕릉(傳 古寧伽倻王陵)이 있다
고령가야국 사적비
자금문(紫金門)
사당의 정문으로 삼문(三門) 형태로 되어있다
홍살문
왕릉 입구에 있다
기적비 · 공적비
고릉관(古陵館)
가야문(伽倻門)
전사청(典祀廳)
춘추대제에 쓰일 제사 음식을 만들거나 보관하던 곳이다
숭정각(崇幀閣) · 숭령전(崇寧殿)
고령가야국 시조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제향(祭享)은 매년 10월 1일과 3월 15일에 지낸다
태조왕릉(太祖王陵)
고령가야왕릉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고령 가야왕릉
서기 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 중 이 일대인 함창 · 문경 · 가은 지방을 영역으로 하여 나라를 세운 고령가야의 태조왕릉이다
기록에 따르면 42년 3월 15일, 김해 구지봉(龜旨峯)에서 김수로(金首露)와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즉 김수로와 한 형제가 된다
문인석
석양 · 석마
고령가야 태조왕릉
석축 위에 솟아난 커다란 봉분 앞에 상석과 묘비가 마련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장명등과 문인석 1쌍 · 석양 · 석마 한 쌍이 넓은 묘역을 지키고 있다
승무문(承武門)
함창 김씨 대종회 간판이 붙어 있다
고령가야 태조왕릉 바로 옆에 있는 만세각 대문이다
만세각(萬歲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