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 5코스에 있는 고비고개는 강화를 동서로 연결하던 옛길로
고천리 나무꾼과 장사꾼들이 등짐을 지고 고비고개를 넘어 강화장터로 가던 길이다
내가저수지 · 국화저수지 풍경과 덕산산림욕장의 상쾌한 숲길 · 외포 어시장의 볼거리
또 운 좋으면 내가시장의 소박한 시골장을 만날 수 있다
강화성
강도남문으로 가는 길이다
강도남문(江都南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234년부터 본격적 공사에 들어갔다
고려 때 쌓은 성으로 내성(內城) · 중성(中城) · 외성(外城)의 형태를 취했는데, 이 중 내성이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 축조했으며 길이가 약 9㎞의 토성으로 모두 8개의 성문이 있다
외성은 1233년부터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공사를 실시하였다
강도남문(江都南門)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 · 암문(暗門) 4개 · 수문(水門) 2개가 있다
문루로는 남쪽 안파루(晏波樓) · 서쪽 첨화루(瞻華樓) · 북쪽 진송루(鎭松樓) · 동쪽 망한루(望漢樓)가 있다
강화유수 민진원 선정비(江華留守閔鎭遠善政碑)
민진원은 조선 후기의 척신으로 민유증의 아들 · 민진후의 남동생 · 인현왕후의 작은오빠이다
1691년 과거 급제 후, 인현왕후의 폐출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복귀하여, 사복시정 ·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고 노론에 참여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했다
강화나들길 리본 작업 중인 빅터
강화문화체육관
강화나들길 리본작업
서문으로 가는 길을 알리기 위해 꼭 필요한 곳인데 리본 매달 데가 없어 나무 위로 올라간 빅터
국화저수지로 올라가는 길이다
강화 남산
강화산성 서문쪽에서 봤다
첨화루(瞻華樓 서문)
강화고등학교
국화저수지 둑
애기똥풀과 붓꽃이 한창이다
애기똥풀 · 붓꽃
고려산
국화저수지 너머로 보인다
국화저수지 둑길이다
국화저수지 물가를 걷는다
국화저수지
국화저수지 데크길이다
고려산 등산로 안내판
강화나들길 방향안내판
청련사 가는 길이다
국화학생야영장
텐트와 식탁 등 시설이 잘 되어 있다
학생야영장 외줄타기
만녕재(萬寧齋)
고려 고종 홍릉 재실이다
만녕재(萬寧齋)
학생야영장에서 홍릉으로 오르며 봤다
고려 고종 홍릉( 高麗 高宗 洪陵) / 사적 제224호)
고려 제23대 고종(1192~1259)의 능이다
왕은 강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고 비는 제21대 희종의 딸인 안혜태후이다
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최충현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고종 6년(1219)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으매 왕은 제 구실을 못하다가
고종 45년(1258)에 유경 · 김준 등이 의(우의 손자)를 죽이자 왕에게 대권이 돌아왔다
고려 고종 홍릉( 高麗 高宗 洪陵) / 사적 제224호)
고종이 재임시에 북방의 민족들이 침입하여 그 어려움이 컸었는데
고종 3년(1216)에는 거란족이 쳐들어와 김취려 · 조충 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고종 18년(1231) 몽골족이 쳐들어오자 다음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이곳을 강도라 하고 몽골족에 대항하였다
몽골병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불타버리자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 사이에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니
이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팔만대장경이다
고종은 몽골군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 내면서 강화를 이룩하려고 고종 46년(1259) 태자 전(원종)을 몽골에 보낸 후
그 해에 승하하여 개경으로 옮기지 못하고 이곳에 안장하게 되었다
홍릉 석물
문인석
문인석
쓰러진 나무에서 잎이 돋는다
고비고개로 가는 길이다
리본 작업중인 꾸미까님
성황당
고비고개에서 잠시 휴식 중이다
길에 앉아 있어도 지나는 사람 없는 참 한가한 길이다
혈구산
꾸미까님이 만들었다
송아지 출산후 태반을 먹는 어미소
성광수도원
낙조대가 뒤로 보인다
도자박물관
오상리 고인돌군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
총 11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5개 고인돌군 중 하나이다
2000년 실시된 발굴조사에 의해 북방식 고인돌 형식으로 확인되었다
이 중 가장 크기가 크고 위쪽에 위치한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길이 3.7m · 너비 3.35m · 두께 50cm이다
오상리 고인돌군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
고인돌은 주검이 누워있는 널방(묘실) 위에 엄청나게 큰 바위를 뚜껑처럼 덮은 거석기념물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한국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것인데 대부분 무덤으로 사용하였으나 권력의 상징물이나 신앙의 대상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대형 고인돌의 덮개돌 무게는 보통 30∼50톤에 이르며 심지어 100톤이 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고인돌은 요즘의 중장비로도 이동하거나 받침돌 위에 올릴 수 없는 규모라고 한다
지난 2000년 442기가 있는 고창과 함께 화순 · 강화지역의 고인돌이 함께 세계문화유산 제977호로 올랐다
오상리 고인돌군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7호
구석기시대의 구형 석기(球形石器)와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조각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는 강화도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계속 살아왔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외에도 대롱옥 · 반달돌칼 · 돌화살촉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고인돌은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하여 따로 구분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프로젝트 워크캠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프로젝트 워크캠프
내가저수지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다
내가저수지
내가초등학교
내가면사무소
MBC · KBS · SBS도 못찾은 맛있는 밥집을 우리가 찾았다
특별 서비스 간장게장으로 식사했다
덕산산림욕장
우리나라는 비가 많이 내리는 편이긴 하지만 6~9월에 2/3가량이 집중되고
숲이 아직 어리고 숲의 토양이 건강하지 못해 일시에 내리는 빗물을 저장하지 못하고 흘러 보내는 형편이다
더구나 자연에 미치는 영향으로 댐을 건설하기도 쉽지않아 녹색댐이 그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덕산산림욕장
즉 숲은 스폰지처럼 부드럽고 깊은 흙을 만들어 그 속에 빗물을 흠벅 머금고 있다가 천천히 흘러 보내주기 때문이다
숲은 물을 머금는 힘과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
덕산산림욕장 지구 안내도
육각정자
덕산산림욕장 잣나무지구에 있는 정자다
곶창굿당 솟대
강화도 외포리 곶창굿전거리 정기공연 펼침막
곶창굿당
어업을 위주로 하는 정포마을과 농업을 위주로 하는 대정마을 주민들이
주신인 득제장군을 모시고 풍농 · 풍어와 함께 마을의 태평과 번영을 기원하는 도당굿의 하나다
곶창굿당
외포리 곶창굿은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매년 실시하여 왔으나 지금은 격년 또는 3년걸이로 음력 2월에 행해지고 있으며 사흘간 계속된다
다른 굿과는 달리 매일 오후 4시에 굿을 중단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밤을 지새우는 것이 특징인데
전통적인 향토축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어 소중한 지역 유산이다
강화 외포리 곶창굿은 전통적인 민속의식으로 1997년 7월 14일 인천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정정애씨가 기능보유자다
곶창굿당
외포리의 당집은 5 ~ 6평 정도의 규모다
곶창굿당 앞마당
당 앞에는 넓은 공지가 형성되어 있고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외포해변
외포항
외포항
석모도
석모도
외포리 마을
외포여객터미널로 내려가는 골목이다
골목길
축대 · 함석담 · 나무 등 모두 아름답다
외포여객터미널
5코스 마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