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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울 종로구 혜화동

혜화동의 동명은

성북구 삼선동과 경계지점이 되는 고개에

한양도성 4소문 중 하나인 혜화문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

혜화동역 3번출구가 시점이다

 

 

 

 

함춘문(含春門)

궁궐 밖 동산인 함춘원 터에 세운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던 곳이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함춘원으로 옮겨와 경모궁이라 높여 불렀다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증하고 신위를 종묘로 옮기면서 경모궁은 사실상의 기능은 다한다

후에 태조 · 세조 · 성종 · 숙종 · 영조 · 순조 6성조의 어진을 모시던 영희전을 옮겨 세웠다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서면서 건물의 원형은 대부분 사라지고 남은 건물마저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 지금은 함춘문과 정당 터만 남아있다

 

 

 

 

서울 경모궁지(사적 제237호)

창덕궁과 경희궁 밖에도 함춘원이 있었지만, 창경궁에 딸린 이곳 함춘원만 세 개의 신문 중 한 문과 정당 터만 남아있다

안내판을 보니 9월 말까지 복원공사를 마친다고 되어 있는데 공사 진행을 보니 못 마칠 것 같다

 

 

 

 

배수로(조선시대 18세기)

서울대 의대 신축부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구(遺構)이다

정조 1년(1777)과 정조 8년(1784)에 각각 편찬된 「경모궁개건도감의궤」와 「경모궁의궤」에 비춰보면

외삼문과 중삼문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때 경모궁지와 관련된 배수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창경궁

경모궁지에서 대한의원으로 가며 봤다

 

 

 

 

대한의원(大韓醫院 · 사적 제248호)

190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설립된 근대식 국립병원이다

2층은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중원(濟衆院 ·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병원 본관과 시계탑 사이 공사중인 구간, 작은 터널 안에 붙어 있다

 

 

 

 

대한의원(大韓醫院)

1907년(융희 1) 3월, 당시 국립 의료기관에 해당하었던 광제원(廣濟院)

국립 의학교육기관이었던 의학교(醫學校)와 그 부속병원 · 대한국적십자병원이 통합되어 설립되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개설되자 1928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재편되었다

이 건물은 대한의원 본관으로 1908년 10월 완공되었다

 

 

 

 

제중원 설립자 고종(1884년 모습)

 

 

 

 

의학교 교관 김익남(왼쪽) · 의학교(서울의대의 모태) 1회 졸업생 김교준

김익남(1870~1937)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로서 일본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후 의학교 교관 · 대한제국 군의관 등의 활동을 하였다

김교준은 김익남의 제자로 국내에서 배출된 최초의 의사 19명 중 한 명이다

이후 두 사람은 간도 용정에서 함께 병원을 운영하였다

 

 

 

 

송촌 지석영(松村 池錫永 1855~1935)선생 상

조선왕조 말에 처음으로 종두법을 도입 보급한 근대의학의 개척자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근대 의학교육기관인 관립 의학교 초대 교장으로 이 땅에 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의 문법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이기도 하다

 

 

 

 

실험동물봉양탑(實驗動物供養塔)

실험실에서 죽은 동물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뒷면에는 '大正 十一年 七月 五日 建之(대정 십오년 칠월 5일 건지)'라 새겨져 있다

1922년 7월 5일이다. 대한의원 뒷편에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근대 서양의학 도입 부분이다

 

 

 

 

저헌 이석형(1415~1477) 생가 터

조선 초 세종~성종 때 뛰어난 관리이며 큰 학자인 이석형의 생가 터다

그의 집에는 계일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계일(戒溢)이란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는 의미로 부귀영화를 넘치게 하지 말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정자 앞에 연못을 파서 항상 물 높이가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관리했다고 한다

연건동이란 동네 이름은 이 연못 연꽃에서 비롯한 연화방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마로니에 공원 아르코예술극장

서울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의 터전으로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 법대 자리에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 길 건너에 있다

 

 

 

 

김상옥(金相玉) 열사 상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젖살도 안빠진 여학생을 칼로 내려치는 왜경을 본 후 가진 것을 처분하고 의열단이 있는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목표 하나를 가지고 서울로 잠입했다

그의 목표는 총독 사이토 암살, 하지만 밀고에 의해 총독 폭살에 실패한 그는

독립투사들의 한이 서린 왜경의 본거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폭파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20여 명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 당시 유도사범이자 악명 높은 형사부장, 독립투사의 숙적인 다무라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이후 계속해서 서울에 머물며 거사를 계획하던 그는 모진 고문에 자백한 동료에 의해

효제동 은신처가 밝혀지고 안타깝게도 그를 잡기 위해 출동한 400여 명의 왜경에게 포위된다

400대 1의 상황에서 그는 총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약 3시간 반을 홀로 싸우며 구리다 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해했으나 중과부족이었다

탄환마져 다하여 마지막 총알 한 방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자신에게 쏘았다

온몸에 열한 발의 총상을 입은 그의 주검은 생전에 직접 그린 태극기를 품고 있었다

이는 일본군 보고서에 기록된 일이지만 불과 수십 년전 이곳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실화다

 

 

 

 

예전 서울대학교 본관(사적 제278호)

1931년 10월에 완공한 벽돌조 3층 건물로 경성제국대학 본관으로 지어졌다

광복 후부터 1972년까지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청사로 사용되다 현재는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인 박길룡(1899~1943)이 설계했다

 

 

 

 

옛 서울대학교 본관 뒷면이다

 

 

 

 

예전 공업전습소 본관(사적 제279호)

대한제국 때 설치한 국립 공업연구소 격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1909년 완공하였으며 설계와 시공은 당시 탁지부 건축소에서 맡았다

원래 이 자리는 화폐를 인쇄하던 전환국 기계시험소 터였는데 1906년 공업전습소가 발족하면서 이곳에 본관 · 교사 · 식당을 지었다

목조 2층 건물로 대한제국 때 지은 목조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1907년(고종 44년) 3월 공업전습소 본관 준공 기념 빗돌 · 기념식수

향나무 앞 빗돌에 써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1895년 4월 한성사범대학부속소학교로 설립되었다

해방 후 을지로에 있었으나 197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었던 곳으로 이전하였다

교문 4개 기둥은 본래 탑골공원에 세워졌던 대문 기둥이었다

1969년 3 · 1절 5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가 독립선언기념탑을 세우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여주기 위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문 기둥으로 기증하였다

 

 

 

 

이화장(梨花莊 사적 제497호)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로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이 조직된 곳이기도 하다

1947년 10월 18일부터 이집에 살았는데 이 집에는 지금도 고인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지금 이화장에는 조각당 · 전시관으로 쓰고 있는 안채 ·  별채 그리고 새로 지은 살림채가 있다

이승만박사의 사적관이 폭우로 피해가 있어 복구 완료시까지 전시관은 휴관이다

 

 

 

 

예술공간 낙산

이화동 벽화마을에 있다

 

 

 

 

敬天愛人(경천애인)

하늘을 공경(恭敬)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전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글이다

 

 

 

 

신사 · 강아지

 

 

 

 

서울 종로구

북한산 · 북악산 · 인왕산 품안이다

 

 

 

 

낙산전시관

조선은 건국과 함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건설하고 이어 내사산을 연결하는 도성을 쌓았다

내사산 중 동쪽에 해당하는 낙산(청룡)의 전시관이다

 

 

 

 

조선시대의 낙산

창덕궁과 창경궁이 가까워 조정 관원들이 낙산계곡을 중심으로 터를 잡아 살기도 하고

근처에 정원을 꾸미거나 여가를 이용해 산책을 즐기던 곳이었다

 

 

 

 

서울 종로구

내사산 중 백악산(북 · 현무) · 인왕산(서 · 백호) 안이다

 

 

 

 

북한산

 

 

 

 

한양도성

한양성곽은 한 마리의 용을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낙산은 그 용의 머리부분이다

 

 

 

 

성북구 방향

성곽을 따라 내려가며 봤다

 

 

 

 

대학로에서 점심을 했다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大韓祖國主權守護一念碑)

일제가 2차대전 말기 우리 4,300여 명의 전문 대학생들에게 소위 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터무니 없는 허울을 씨워서 일군에 강제로 입대시켰다

입대 전 한때 합숙 훈련장이었던 동성고교 앞에 온갖 희생을 몸으로 겪으면서 싸웠던 생사 불문의 2,700명의 이름을 새겨서

이 겨레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치욕의 과거사가 되풀이 되지 않겠다는 준엄한 경고의 상징으로 세웠다

 

 

 

 

혜화동주민센터

국내 최초의 여의사이자 한국 걸스카우트를 창설한 한소제가 살던 집이다

토요일이라 아쉽게도 문이 닫 혀있다

 

 

 

 

장면 가옥(등록문화재 제357호)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통령 ·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 국무총리 역임한

운석 장면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건립하여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하였던 곳으로 근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전시실 1(안채)

 

 

 

 

성균관대학교

서울문묘와 성균관으로 가기 위해 찾았다

탕평비각과 하마비가 왼쪽에 있다

 

 

 

 

탕평비각 · 하마비

비각 안의 탕평비는 1742년(영조 18) 3월 26일,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할 즈음에 영조의 어명으로 성균관 반수교 위에 세워진 비석이다

영조는 지나친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을 펼쳤고 이 비를 세워 그 의미를 널리 알렸다

이 비에 새겨져 있는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비이불주 식소인지사)」라는 비문은

논어의 위정(爲政) 편 14장을 활용하여 영조가 지은 것으로

「남과 두루 친하되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못한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라는 뜻이다

 

 

 

 

명륜당(明倫堂)

동재와 서재가 있는 성균관의 교육공간이다

1398년(태조 7)에 설립되어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 시험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혜화역

시점 ·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5.59km, 소요시간 5시간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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