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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 중구 송월동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고잔리에 속하였다

그 후 부내면 만석리로 명명되었던 지역으로 소나무가 많아 송골 또는 송산이라고 했다

경인철도 개통과 시가지 발전에 따라 191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만석리가 송판정 · 화방정 · 묘도정 · 만석정 등으로 분리되면서 송판정으로 개칭하였고

1946년 응봉산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이 밝다는 뜻에서 송월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인천역

시점이다

 

 

 

 

중화가 패루(中華街 牌樓)

인천역 앞에 있는 제1패루로 중국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세 개의 패루 중 하나다

「패루」는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전통 대문을 일컫는다

 

 

 

 

송월동 동화마을 입구 아치

송월동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된 후 독일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거주하던 부촌이었으나

젊은사람은 떠나고 노인분들만 거주하면서 건축물은 노후되고 빈집들이 늘어나 활기를 잃어버린 곳이 되었다

 

 

 

 

송월동 동화마을

 대표적인 원도심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13년부터 낡은 담과 옹벽에 세계명작동화를 테마로 그림과 조형물을 설치하면서 지금의 동화마을이 만들어졌다

 

 

 

 

송월동 동화마을

동화마을을 가운데 길로 오르다 봤다

 

 

 

 

오만과 편견 동화마을 촬영지

 

 

 

 

트릭아트스토리

'트릭아트'는 과학적인 화법과 특수도료를 사용하여

평면에 그림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그림을 그려서 관람객이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전시를 말한다

 

 

 

 

우물

인천역 근처에 부두가 있을 때 이 동네에 선주가 많이 살았고 이 우물물로 오징어 등을 씻었다 한다

아래 우물이 하나 더 있다

 

 

 

 

송림교회

한국 최초 선교를 기념하는 공원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흉상과 중앙에 성령의 불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인천기상대

1899년 인천 · 원산 · 진남포 등 해관에 기상관측소가 설치된 5년 후인

19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일기예보를 알리는 인천기상관측소가 설치되었다

중구청 뒷길에 있던 스이쯔여관에서 임시 기상사무실을 개설하고 기상관측을 시작했다

이어 1905년 1월 1일 대한제국 황실 재산이던 응봉산 정상 현 위치에 인천관측소를 신축해 이전한다

 

 

 

 

인천기상대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의 슬로건이 있다

 

 

 

 

인천관측소 그림

 그후 인천관측소는 1910년 8월 조선총독부관측소로 1939년 조선총독부기상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 전국의 관측소를 통할하고 일본기상대 · 런던 그리니치천문대 등과 기상정보를 교환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오포를 쏘는 그림

광복 전만해도 시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관측소에서 매일 정오에 공포를 쏘았다

정오에 대포를 쏜다고 해서 흔히 응봉산을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불렀다

 

 

 

 

돌계단

1928년에 만들어진 콘크리트계단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기상대 창고

기상 관측 장비 왼쪽에 있다

 

 

 

 

인천기상대 역사관

1923년 4월 본관 건물 옆에 건축된 예전 건축물이다

이 창고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인천기상대 건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서양식 건축물로

인천기상대 역사 · 기상 현상 · 예보 생산 과정 · 날씨 체험관으로 구성된 기상역사관으로 꾸밀 예정이다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

1905년 3월 24일 작은 방공호 안에 지진계가 설치된 한국지진관측 시발점이다

1995년 노후된 장비는 모두 최첨단 디지털 장비로 교체되었다

지난 천안함사건 때도 이 지진계에 백령도 앞 바다의 수중 음파가 전달되었다

 

 

 

 

조선목재공업(지금의 만석비치타운아파트)

1936년 설립된 조선목재공업은 라왕 합판 등 항공자재를 제조했던 군수공장이었다

광복 후 대성목재로 이름을 바꿔 합판 등 건축 목재를 생산했다

쌍용기초소재의 굴뚝이 옆에 있다

 

 

 

 

북성포구

남경포브아파트가 앞에 있다

 

 

 

 

파울 바우만 주택(지금의 자유유치원)

1906년경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던 곳이다

산 끝자락 가파른 곳에 있어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라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다

인천상륙작전 때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1955년 완전히 철거되었다

총독 「사이토」는 1919년 8월 13일 조선에 부임하러 온 날 당시 경성역에서 나운규 열사의 저격을 받았다

 

 

 

 

 인향초 · 중 · 고 야간학교

1962년 도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동장이 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출발했지만 쉽지 않았다

1966년 용현2동 재건회관으로 쫓기다시피 옮긴 후 2년 동안의 천막교실과 한 정비공장의 2층을 빌려 쓰기도 했다

이후 몇 번의 짐을 싼 끝에 몇 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1950년대 중반에 조성된 도시형 한옥촌이다

송월동에는 일본식 가옥 뿐만 아니라 오래된 한옥이 많이 남아있다

 

 

 

 

송월시장

1937년 2월 설립된 가축시장이다

질퍽한 부지에 말을 키우던 곳이라 하여 말깐(말간) 또는 돼지장터라 불렀다

광복 후 만석동 공장 근로자들이 많이 이용해 한때 꽤 번창했던 시장이었으나 철도길이 담으로 막히면서 만석동과 단절돼 상권이 급속히 위축되었다

 

 

 

 

송현시장

송월동 동화마을 주차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철거중이다

 

 

 

 

애경사 터

1912년 애경사가 설립되었다

1954년 제주도 사람 채몽인 씨가 이 공장을 인수해 애경유지공업(주)을 창립했다

미향비누만 한 달에 100만 개를 팔아 당시 경인국도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1883년 개항 직후 인천은 서양의 증기선이 싣고 온 박래품이 넘쳐났다

그 동안 양잿물을 사용했던 조선에서 신식 비누가 날개 돋힌 듯 팔리자 인천 거주 외국인 몇몇이 1895년 비누공장을 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인천전기 발전지 표지석

1905년 6월 각국 외국인 39명이 출자한 인천전기(주)의 표지석으로

1906년 4월 당국의 특허를 얻어 옛 한국전력 인천지점 창고 자리에 100kw 규모의 직류발전기 두 대로 시작했다

남경포브아파트 안에 있다

 

 

 

 

아사히양조장 청주공장 터

1919년 10월 도원동에 아사히양조 소주공장을 개업하기 전 아사히양조는 송월동에서 아사히양조장 청주공장을 운영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5km, 소요시간 5시간 21분

(송월동이 좁아 만석동까지 걸어서 두 곳을 합한 거리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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