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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 중구 북성동

예로부터 어선이 드나들어 북성포로 불리던 지역을 1946년 동명 개정 때 북성동으로 명명하였다

일제 때는 화방정으로 호칭되었는데, 이는 인천 개항의 주동 역할을 한 초대 주한일본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선린동은 청국의 지계로 일명 청관지역을 끼고 있는 법정동 중 가장 작은 동에 속하였으며

일인들은 지나정(支那町)이라고 하였는데 해방 후 친선적인 의미로 선린동이라 명명되었다

1977년 5월 인천시 조례 제1075호에 의거 법정동의 북성동과 선린동 지역을 북성동 행정구역으로 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인천역

시점이다

 

 

 

 

중화가 패루(中華街 牌樓)

인천역 앞에 있는 제1패루로 중국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세 개의 패루 중 하나다

「패루」는 마을 입구나 대로를 가로질러 세운 탑 모양의 중국식 전통 대문을 일컫는다

 

 

 

 

우회고가사거리

예전 이곳 사거리 오른쪽이 바다였다

 

 

 

 

선구점(船具店)

인천역 뒤쪽 우회고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아직 어구를 파는 선구점들이 여럿 있다

그 중 그물 간판 집은 6 · 25전쟁 이후 지금의 아트플랫폼 근처 폭격 맞은 창고 벽돌을 얻어다 지은 건물이다

 

 

 

 

객주집(지금 기념탑교회)

일제 대정시대(1911년~1924)에 지은 건물로 원래는 객주 집이었다

겉은 콘크리트 건물 같으나 실은 목조건물이다

 

 

 

 

인천항 선거 준공 기념비

인천항은 구한말 풍운이 감도는 1883년 1월 1일 개항하였다

1918년 10월 27일 소규모 독(dock)이 준공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 앞까지 들어왔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줄기가 내처 달리다 바다와 맞닿은 곳으로 우리가 말하는 제물포(濟物浦)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진리의 큰 빛,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들어온 곳이다

 

 

 

 

유엔참전국 9 · 28수복 국제마라톤대회 출발점 빗돌

1959년 9월 28일 제1회 9 · 28수복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6 · 25전쟁 참전국 중 미국, 호주 등 7명의 외국인 선수가 참가해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대회라 할 수 있다

해안동로터리를 출발해 서울 중앙청 앞 결승점을 통과하는 경주였다

 

 

 

 

인천 도로원표

 

 

 

 

첫 선교 수녀 도착지 기념비

살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한국 창립 120주년을 맞아 첫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장소에 2007년 7월 22일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에 의하면 4명의 수녀가 1888년 7월 22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한국가톨릭수녀원 첫자리(정동수녀원) 기념비

1887년 7월 26일 조선교구장 '블랑주교'는 버림받은 고아들과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1888년 7월 22일 조선교회의 부르심에 응답한 네명의 수녀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7월 23일 서울에 온 수녀들이 러시아공사관과 담을 맞대고 있던 정동 한옥에 머묾으로서 조선에 가톨릭공동체가 시작되었다

7월 29일 순교자의 딸들인 다섯 명의 지원자들이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9월 7일 종현(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른다

*

서울 정동공원에 있다

 

 

 

 

한중문화관 · 화교역사관

 

 

 

 

해망대산(海望臺山 · 파라다이스호텔 터)

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언덕이지만 바다에 접했기 때문에 봉화대가 있었고 바다를 향한 대완구(대포)가 있었다

개화기에는 한때 영국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로 폐허가 되기도 했다

*

오림프스관광호텔은 1965년 12월 객실 43개로 개업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이 호텔은 중국식 광동요리의 나이트클럽 · 24시간 지하 바

한국 명기(名技)가 특대하는 한국요리집과 기생관 등이 있었다

1967년 8월 1일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들어섰고, 2003년 카지노의 대부 전낙원이 호텔을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파라다이스호텔로 바꿨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 빗돌

1882년 5월 22일 조선의 친권대신 신헌과 미국의 친권공사 슈펠트 간에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장소다

이 조약은 한국이 구미열강과 맺은 최초의 쌍무적 협약으로 국제외교의 다변화를 유발하는 계기가 됐다

예전 체결장소로 알려진 화도진보다 이곳이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탑

예전 독(dock)이 생기기 전에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있는 곳까지가 바다였다

기념탑 너머가 인천항이다

 

 

 

 

월미도

인천항 너머에 있다

이렇게 보니 그야말로 섬이구나 싶다

 

 

 

 

러시아영사관 · 해무청사 터

러시아는 경성 한국 주재 영사관 내에 부영사관을 병설하고 인천 · 평양 · 진남포 등을 관할케 하고 있었는데

1902년 부영사관을 갑자기 인천에 이전 설치했다

제물포항을 일본이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자국의 병참기지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철거되었다

*

그 옆에 김중업에 의해 1957년에 세워진 해무청사는 1903년경에 설립된 러시아 영사관 건물과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1992년경에 사라졌다

 

 

 

 

월미은하레일 건물 · 인천역

 

 

 

 

응봉산

인천화교중산소학교가 아래로 있다

 

 

 

 

한국 최초의 연초공장(해밀턴 제물포연초회사) 표지석

인천의 담배 즉 오늘날 권련의 역사는 1901년 그리스인 밴들러스가 중구 사동에 동양연초회사를 설립했다는 기록이 바로 최초의 연초공장이 되는 셈이다

이 회사는 1903년 수입 담배에 밀려 문을 닫는데 지배인이었던 미국인 해밀턴이 맥을 이어 다시 연초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홍도패 · 산호 · 뽀삐 등의 이름이 붙은 담배를 하루 30만 갑씩 생산했다

1910년대 담배 생산액은 정미업 다음으로 인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하지만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시행하면서 인천산 담배는 자취를 감췄다

광복 후 중산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인천화교소학부속유아원

예전 중국인 사당 자리인 것 같다

 

 

 

 

밴댕이 거리

인천역사거리에서 짜장면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로 예전 인천역 뒤가 바다였기에 아직 밴댕이 식당이 많이 남아 있다

 

 

 

 

 공화춘(共和春 등록문화제 제246호)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짜장면박물관 후문

 

 

 

 

풍미(豊美)

짜장면의 원조는 공화춘이지만 문을 닫었다 근래에 다시 열었고 영업을 계속한 집으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다

 

 

 

 

현대크리닝

짜짱면집에 포위된 세탁소로 건물은 120여 년 쯤 되었고 세탁업을 한지는 50여 년이 되었다

그 옆으로 「응답하라1988」에 나온 대창반점도 있다

 

 

 

 

인천근대박물관

 

 

 

 

인천화교중산소학교

1901년 개교하였는데, 이것이 한국화교 학교 교육의 효시다

화교가 이땅에 발을 들여 놓은 때는 1882년(고종 19)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란 직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군인 3천 명과 상인 40여 명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 화교의 시초가 되었다

 

 

 

 

인천화교 중산중학교

1884년 인천 북성동에 청국조계지가 설치되면서 1천여 명의 화교가 거주하게 되자 중국 영사부 주도로 학교가 설립되었다

인천화교중산소학교 오른쪽에 있다

 

 

 

 

복래춘(復來春)

192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4대째 꽁신삥(공갈빵)과 웰빙(월병)을 굽고 있는 중국 전통과자점이다

중국인에게 꽁신삥과 웰빙은 간식거리가 아닌 제삿상에 올리는 귀한 음식이다

대만에서 만드는 남방식과는 다른 중국 산둥성 북방족의 맥을 잇는 과자점이다

 

 

 

 

인천화교협회

 

 

 

 

청 · 일조계지

사진 중간 계단을 경계로 청과 일본조계지가 나뉜다

 

 

 

 

공자 상(孔子像)

청 · 일조계지가 나뉘는 계단 위에 있다

왼쪽 일본 ·  오른쪽 청국 조계지다

 

 

 

 

월드커뮤니티센터

작은 휴게실과 화장실 그리고 차 · 다기류 · 미니어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존스턴별장

월드커뮤니티센터 안에 있는 미니어처 중 하나로 자유공원 한미수교 100주년기념탑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오만과 편견 자유공원 촬영지

전망대가 있는 월미도가 뒤로 보인다

 

 

 

 

제물포구락부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 · 영국 · 독일 · 프랑스 · 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들과

소수의 중국 · 일본인들이 친목을 돕는 사교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01년 인천 개항장이 내려다 보이는 응봉산 언덕에 세워졌다

내부에는 사교실 · 도서실 · 당구대 등을 마련하였고 따로 테니스코트도 가지고 있었다

 

 

 

 

제물포구락부 실내

1901년 6월 22일 제물포와 서울에 거주하는 여러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4시 30분 주한 미국공사 알렌의 부인이 은제 열쇠로 출입문을 열므로써 개관되었다

원래 명칭은 제물포클럽이었으나 조계제도가 폐지된 후 클럽(club)이 일본식 가차음인 구락부로 불리고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현재 중앙에는 각국에서 보내온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UN군 함포사격으로 파괴된 시가지(지금의 답동 일대)

맥아더 장군휘하의 국군과 UN군은 북한군 제266독립해병연대, 제918포병연대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950년 9월 15일 오후 늦게야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다

아군은 시내의 북한군 군사시설에 대대적인 포격을 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꿈에 그리던 광복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 왕은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그로써 그간 국내외에서 투쟁해온 동포들의 꿈인 광복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미조리 함상에서 항복 조인식 광경이다

 

 

 

 

소월미도(小月尾島)

월미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개항기 제국주의 열강들은 저마다 이 섬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그에 따라 석탄과 석유 창고 등이 세워졌다

정상에는 1903년 6월 인천 소재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이 완공한 등대가 서있다

팔미도에 세워진 것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였으나, 수 년 전 해양항만청의 부속 건물이 들어서면서 멸실되었다

1904년 「제물포해전」 때는 이 섬 앞에서 러시아 함정들이 자폭했었다

 

 

 

 

수복과 월미도 휴전감시위원단 축출

북한은 휴전협정에 조인하였다. 그러나 소위 '휴전협정감시위원 대표단'은 명분도 없이 월미도에 계속 주둔하였다

인천 시내 남녀 학생들은 이들의 퇴거를 요구하는 데모를 연일 벌였고, 그들은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월미도(月尾島) 둑길

축항 건설 후 갑문 앞으로 밀려드는 한강 하류의 물살을 막는 한편 교통 편의를 위해

1922년 북성동(대한제분 정문 앞)에서 월미도까지 약 1km, 2차선의 둑길을 만들었다

둑길을 개통하기 전에는 옛 세관 앞 잔교에서 나룻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둑길이 개통되면서 월미도는 비로소 임해 유원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구식 자동차 한 대가 월미도를 향하고 있고, 한국인과 일본인 행인들이 오가고 있다

 

 

 

 

월미도에 상륙한 UN군 LST

1950년 9월 15일 오후, 세 곳의 상륙 지점 가운데 하나인 레드비치에 LST가 정박해 분주하게 군수물자를 풀어내고 있다

아군의 서울 탈환을 위한 전투 지원을 위해 트럭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월미도 뒤쪽 해안가이다

 

 

 

 

각국지계(各國地界) 빗돌

「조계」란 영토의 일정한 범위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가한 지역으로 거류지라고도 부른다

인천에는 1883년 일본전관조계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청국전관조계, 1884년 10월에 각국 전관조계가 설치되었다

조계석은 조계의 경계를 나타내 주는 표지석으로 각 조계의 경계 지점에 세웠던 것이다

이 각국 조계석에는 「각국지계(各國地界)」와 「조선지계(朝鮮地界)」 라는 명문이 있어

인천의 각국조계와 조선인 마을이 맞닿는 개항장의 외곽 지점 어딘가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 보수공사 중에 발견되어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시장공관(지금 역사자료관)

인천의 역사 자료를 발굴 · 수집 · 정리 · 발간하는 기관으로 2001년 10월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시장공관은 역사자료관으로 새롭게 태여났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 사업가의 저택이었다가 광복 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으로

또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사용된 일이 있었으나 이후 인천시에서 매입하여 1966년 한옥 건물로 개축, 시장공관으로 변화하였다

 

 

 

 

세창양행 사택(지금 맥아더장군 동상 자리)

독일의 무역상사 세창양행이 1884년에 지은 국내 최초의 양관인 사택이 있었다

빨간색 서양식 기와, 아치형의 네모기둥으로 장식한 테라스 등으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했다

1899년 6월 19일 독일 황제의 동생인 하인리히가 인천에 왔을 때 이 집에서 왕자를 위한 파티가 열렸다

이후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청광각」이라 불리며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하다가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해 부립도서관을 설립했다

1946년에는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이 개관했으나 인천상륙작전 중 소실되었다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그 자리에 맥아더장군 동상을 세우고

이를 계기로 같은 해 개천절을 기해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개칭하였다

 

 

 

 

자유공원 화단

모든 꽃들이 활짝 피어 보기 좋았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1982년 5월 22일 착공하여 그 해 12월 14일 준공하였다

예전 존스턴별장이 있던 자리다

 

 

 

 

연오정(然吾亭)

 

 

 

 

석정루(石汀樓)

목재업과 조선소로 큰 돈을 벌었던 이후선 사장이 지어 인천시에 기증한 2층 누각이다

 

 

 

 

패루 선린문(善隣門)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있다

 

 

 

 

공화춘(共和春)

공화춘은 1908년 무렵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 중국식 건물로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으나 중화요리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는

음식점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음식점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그후 짜장면박물관 터에서 이곳으로 이전해 재개업했다

짜장면을 처음으로 만든 곳이다

*

청관(淸館)

선창가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주점과 색시집이다

섬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 때문에 주변 숙박업소는 늘 성업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집은 차이나타운의 황해여관이다. 지금의 청관자리다

 

 

 

 

뱀골목

예전 동일아파트 옆 골목에선 뱀장사들이 야한 얘기를 곁들이면서 뱀과 약을 팔았다

 

 

 

 

동일아파트

새우젓골목 옆에는 인근 섬과 주안염전에서 들어온 소금이 있었다

소금은 가마니나 포대에 포장돼 전국 각지로 실려 나갔다. 소금을 부리던 그 앞에 부두를 사람들은 한염부두라고 불렀다

소금공장이 떠나고 그 자리에 동일아파트가 들어섰다

 

 

 

 

새우젓골목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새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창고와 가게들이 있었던 곳이다

골목에는 건어물가게도 있었으나 부두가 사라지면서 새우젓도 함께 떠나버리고 빈 창고와 가게는 인근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이 들어와 쪽방촌이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적색해안)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3곳(적색 · 청색 · 녹색) 해안 중 한 곳이다

 

 

 

 

북성부두

한때 꽤 규모가 큰 포구로 명성을 누렸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수산물공판장과 어시장이 들어선 뒤 1980년대까지 그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어시장이 이전하고 부둣가가 공장용지로 바뀌면서 사람이 찾지 않는 부두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물길 안쪽 부두에 물때를 맞춰 나오면 갓 잡아온 싱싱한 꽃게와 새우 등을 살 수 있다

 

 

 

 

인천역 최초의 기관차 모갈1호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착공하여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역 간(33.8km) 개통된 경인철도 철도다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을 1시간 30분으로 줄이면서 서울과 인천이 1일 생활권으로 변하는 계기가 됐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8.4km, 소요시간 4시간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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