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성당이 위치한 북촌일대는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최인길(마티아)의 집에서 조선 땅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이다
본당 관할구역은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펼쳤던 지역으로서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회동성당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면서 명동본당의 공소였던 가회동구역에 새로운 본당 설립 계획이 세워진다
가회동성당
당시 이 구역을 맡고 있던 임병팔 회장을 중심으로 우선 방 하나를 얻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체 모임을 갖다가
현재의 본당 터에 살고 있던 전길현(마리아)이 1949년 4월 자신이 살고 있던 터 292.3평을 증여함으로 해서 첫 본당 부지를 확보했다
이어 동년 6월에 명동 본당의 장금구(요한) 주임신부를 모시고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교구의 결정에 따라 동년 9월 하순에 본당 설립을 보게 되었다
당시 신자 수는 40여 명 30세대 정도에 불과했다
머릿돌
주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첫미사: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
설립: 1949년 9월 17일
기공: 2011년 12월 23일
준공: 2013년 11월 21일
봉헌: 2014년 4월 20일 부활대축일
가회(嘉會)
"즐겁고 아름다운 모임'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곳이 과거 중요한 행정구역이었음은 물론
우리 천주교 역사의 발원지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 북경교구청에서는 전세계에 유래없이 자생한 한국교회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성사는 사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므로 중국인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다 ..."
천주실의
'하느님의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을 지닌 가톨릭 교리서
16세기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한문으로 저술한 이 책은
1603년 북경에서 출간되어 외교관계에 있는 유교 지식인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다
당시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고 진리로 받아들인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의 실학자들에 의해
조선 천주교회 설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천주실의는 가톨릭 교리 및 중세 철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비교 고찰하며 동서 사상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주요요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자 정약종(1760~1801)이 지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교리서다
'천주실의'의 내용을 기반으로 서술한 본 교리서는
당시 소외받던 부녀자와 서민층을 위해 순한글로 쓰였으며 박해시기에 교회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 되었다
황사영 백서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1775~1801)이 제천 배론의 토굴에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국내 사정을 알리고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기입한 밀서다
그 속에는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죽음에 대한 증언도 담겨 있었다
원본은 의금부에서 압수하였는데 1894년 이후 우연히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입수해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교황에게 전달했다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실제 크기로 복사한 것이다
주문모 신부
척사윤음(斥邪綸音)
'척사(斥邪)'는 사악한 종교를 배척하라는 뜻이고 '윤음(綸音)'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문서를 말한다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정하상 등 70여 명을 처형하고 난 뒤 1839년 헌종이 내린 어명으로 옥쇄가 찍혀있다
앞에는 한문, 뒤에는 한글 번역이 붙어 전 백성 모두에게 고루 읽히도록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활자체가 돋보인다
그러나 이 책이 품은 내용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고 순교했다
기해일기(己亥日記)
기해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당시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총회장이었던 현석문(가롤로)에게 의뢰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기초했으며 한글로 쓰였다
3년의 탈고 끝에 교우들에게 배포했으나 고종 때 소실되었고 이후 교구장 뮈텔 주교가 어느 신자의 집에서 발견해 개정판을 냈다
한문이 상용어였던 당시에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문헌들은 대부분 한글로 되어 있어 한글 보급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김대건 신부 성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2~1846) 안드레아 신부는 순교자 집안에서 태여났다
조선교구 설정 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유학길에 올라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했다
1844년 부제품을 받고 1845년 페레올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아 신부가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영세를 주고 외국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그의 나이 25세 때 새남터에 피를 뿌렸다
본 십자가는 김대건 신부의 성해를 품고 있다
제 12도 최인길 마티아
화제 주문모 신부로 가장 순교자, 역관 출신으로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집회에서 잡혔으나 며칠 후 방면되었다
동 5월 12일 지황 사바, 윤유일 바오로와 함께 옥중에서 참하여 시체는 강에 버렸다
강완숙 골롬바
순교자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이다
1801년 사학을 금고저 오호작통법을 영포하고 신부의 행방을 찾고저 그녀를 형벌로 가하니 함구 불응하였다
신부는 신자들의 형고를 보다못해 자수하여 그해 참수되도 강완숙도 그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프랑스 잡지
1925년 프랑스에서 발행한 'Le Pelerin',
이 잡지에는 1839년 9월 21일 서울 근교에서 일어난 모방 주교와 샤스탕 주교, 앵베르 주교의 순교 장면을 그림으로 소개하고 있다
참수형으로 잘린 목을 긴 창에 꽂아 만방에 알리는 군문효수의 처참했던 장면을 표현했다
첫 미사를 집전했던 주문모 신부와 김대건 신부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순교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만 하더라도 전세계의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봉헌되었다
그래서 라틴어를 모르는 서민들을 위해 성경 내용을 유리창에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스테인드글라스의 기원이다
지금은 성당을 꾸미는 장식물로써 부각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교리교육의 도구로서 중요한 역활을 했던 것이다
작가 및 시기 미상인 옛 성전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해체하여 성전 건립 당시 공헌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그중 하나다
"우리 역사속에서 천주교는 단지 서구의 종교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정신이었다
종교적 복음인 동시에 사회적 복음으로 사랑과 헌신, 평등한 사회를 실현케 했고 신분제도와 억압에 저항 할 수 있는 힘을 키웠다"
본당 건립과 부지 기증
전 마리아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한옥집을 미사장소로 제공하다가 수양딸 배 수산나와 함께 집터 전체를 가회동 성전 부지로 기증했다
노기남 대주교 축성
축성은 새로운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예식을 말한다
당시 본당 건립 후 한국의 첫 주교로 취임한 노기남(1902~1984) 대주교가
1954년 12월 3일 본당의 주보성인이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대축일에 축성미사를 봉헌했다
"운현궁 별궁에서 79세 일기로 승하한 의친왕이 임종전 가회동 성당 박우철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진리가 박해를 이겼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의친왕(1877~1955)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로 1894년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하며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에 귀국해 육군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를 배척하고 황족대표로서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임시정부를 도와 만주로 망명하다가 실패했다
훗날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왕비와 함께 영세를 받았다
현재 고종황제 능인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에 묻혀있다
의친왕비 김마리아
의친왕과 왕비 세례증명서
본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영세문서 제1권에는 의친왕과 왕비가 세례 받은 기록이 있다
본명인 이강과 김숙, 세례명인 비오와 마리아로 각각 기록되어있다
세례 당시에 왕비와 함께 있던 두 명의 조카는 본당 신자였으며 눈이 멀어가면서도 천주학 서적을 놓지 않던 왕비를 보필했다
준주성범(천주학 서적)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라는 원제를 가진 '준주성범'은 독일의 수도자 토마스 아 켐피스가 저술한 책이다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일반 신자와 수도자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범을 제시하며
1, 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뤄져 있고 3, 4편은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15세기 라틴어로 써진 이 책은 1938년 차일라이스 신부의 번역본으로 국내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의친왕 서거
의친왕의 딸인 이해경의 진술에 의하면 의친왕 서거 당시 왕비와 해경옹주 그리고 3명의 후궁이 임종을 지켜봤다고 한다
장례는 왕래하던 수녀들의 도움으로 이뤄졌으며 왕실을 배척하던 이승만 전 대통령 정권에서는 조문을 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본 사료는 1955년 8월 당시 경향신문 기사로 의친왕 서거와 의친왕비의 세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세례받을 당시 조카분들(의친왕비 오른쪽 두 여학생)의 현재 모습
1962년부터 3년에 걸쳐 열린 '바티칸공의회'에서
특히 가톨릭의 미사와 성사 집전은 라틴어로 진행했고, 성경과 성가 역시 라틴어로 씌여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각 민족의 전통과 문화에 따라 변경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도미누스 보비스꿈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엣꿈 스삐리 뚜 뚜오 "또한 사제와 함께"
동영상
2011년 12월 28일 가회동 성당 재건축 시작
내부 공사
이순옥 로마나
1998년 본당 확장을 위해 삼청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터 전체를 기부했다
이후 본당 교우였던 송종섭(요한), 임성희(율리안나) 부부가 그곳을 매입하면서 신축기금이 마련되었다
그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당시 모습을 새겼다
주일미사
공의회 이후 1968년에 발행된 주일미사로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다
1964년 미사통상문
공의회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므로 라틴어와 우리말이 병기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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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공의회가 끝난 이후의 미사통상문으로 오직 한글로만 쓰여졌다
미사 때 필요한 구체적인 동작까지 함께 제시되어 있어 당시 미사 전례를 정확히 추측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은 오늘날의 표기와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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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미사통상문에 성가를 합본한 것이 특징이다
앞 페이지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기도문을 중간부터는 가톨릭 성가집이 수록되어 있다
천주성교공과
신자들이 즐겨 보던 책으로 매일미사와는 다른 성격의 기도문으로
당시 가장 많이 쓰이던 기도문이며 미사 전례 시 필요한 기도문 외에 연도경이 있었다
주일미사전례
당시 참회예절 기도문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으로
지금은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털어놓는 이 '고백의 기도'가 과거에 비해 고백하는 대상이 점점 축약되고 있다
당시에는 천주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목록이 고백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1964년 발행본으로 과도기적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미사경본
1963년 공의회 과도기 중에 발행된 미사경본으로 표지에 새긴 십자가 상징이나 색을 넣어 인쇄한 내부 삽화가 돋보이는 책이다
합송미사
공의회 진행 중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라틴어와 우리말이 혼용된 상태이다
서언 부분에는 능동적인 미사 전례를 위해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야 한다는 선언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성가와 미사 강본을 같이 합본하였기 때문에 '합송미사'라 이름지었다
미사공과
미사 전례 때 주로 사용되는 기도문을 모아놓은 서적으로 1962년도 판이다
본 책에는 '성로선공' 즉 십자가의 길을 뜻하는 '14처'가 우리말로 제 1처부터 14처까지 기록돼 있다
나의 주일미사
가회동 성당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헌가'의 악보가 나온 미사본이다
공의회가 시작하던 1962년 발행되었으며 미사에 사용되는 라틴어 구절을 쉽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한글로 쓰여있다
주요첨례 성가집
1961년에 만든 그레고리안 성가집으로 공의회 이전에 발행되었으나 성가 제목에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우리말 설명이 붙어있다
당시 통상기도문을 '어느 미사에나 변치 않는 부분'이라고 불렀는데 그 때의 표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공과
'매일기도'란 뜻으로 주일과 축일의 기도를 비롯해 여러상황에서 필요한 기도문을 수록한 기도서다
원본은 중국 공과로 앵베르 주교와 번역가들이 우리말로 옮겨 보완했다
필사본으로 신자들 사이에 보급되었다가 1859년 이후 서울에 목판인쇄소가 시설되면서 4권 4책으로 간행됐다
공의회 전까지 140여 년간 한국교회의 공식기도서로 쓰인 이 책은 현재 3권을 제외한 세 권만 남아있다
매일미사경본
미사 때 바칠 기도문과 전례 순서를 수록한 책
1955년 발행본은 정교한 삽화와 구성이 뛰어나며 1963년 공의회 과도기 중에 발행된 책은
표지의 십자가 상징과 컬러 삽화 등 디자인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공의회 이전 십자가
공의회 이전에는 미사를 드릴 때 주례사제가 신자들을 바라보지 않고 등을 돌린 채 미사를 봉헌했다
이때 벽에 라틴어 미사 경본을 붙여놓고 읽도록 했다
당시 미사 때 쓰이던 십자가는 가회동성당묘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최근에 복원 작업을 거쳤다
가회동성당 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