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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박물관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읍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수도의 도성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도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낙산구간 탐방로 시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상설전시실 · 기획전시실 · 도심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으로

한양도성의 역사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미래 가치를 담고 있다

 

 

한양도성박물관

낙산성곽 시점인 흥인지문에서 성곽 안쪽에 있다

 

 

 

 

종묘 · 궁궐 · 성곽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한양도성박물관 입구에 붙어 있다

 

 

 

 

한양도성의 현재와 과거 등 성벽에 남겨진 수많은 기억들을 22m에 달하는 긴 화면 속에 7대의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소개한다

 안내부스 바로 옆에 있다

 

 

 

 

금일은 '순성'하세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계절의 변화와 도심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성놀이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3면 영상을 통해 한자리에서 한양도성을 둘러보고 순성할 때 유익한 정보도 제공 받을 수 있다

선택한 구간을 동영상으로 보여 주는데 지금 보여주는 구간이 낙산구간 탐방로다

 

 

 

 

한양도성의 구조

 

 

 

 

수도 한양의 시작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한양도성의 건설

1395년 백악 기슭 명당자리에 궁궐과 왼쪽에 왕실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 오른쪽에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을 두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396년 수도 방위를 위해 평지에는 토성, 산지는 석성인 도성 축조에 착수했다

전국에서 약 20만 명이 동원되어 98일의 대공사로 사대문과 사소문을 잇는 성벽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한양도성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수도 한양을 외부와 연결하기 위해 동서남북에 4개의 큰 문, 그 사이에 4개의 작은 문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통행로가 되었다

 

 

 

 

한양도성에 관한 그림 등을 모니터로 보여준다

 

 

 

 

한경지략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 · 풍습을 자세히 기록한 부지(府誌)다

 

 

 

 

무너진 도성의 재정비

조선 후기 계속된 전란으로 국방의식이 고조되고 한양으로 지방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안전한 도시를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마침내 숙종은 도성 수축을 결정한다

 

 

 

 

수도 방위 체제의 강화

한양의 모든 백성을 삼군문에 소속시켜 도성민을 주체로 하는 총 동원 제도를 통해 도성 중심의 수도방위체제가 확립되었다

 

 

 

 

도성도

한양도성 내외를 관통하는 도로망과 구획은 물론 주요 궁궐과 성문 · 창고 등이 선명하게 표시되었다

 

 

 

 

수난의 시작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한 직후 일본의 압력으로 설치된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면서 도성은 대한제국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에 의해, 해방 이후에는 도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 행위가 지속되었다

1970년대까지 전체 18.6km 가운데 6.7km, 도성의 약 36%가 완전히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의 수난

일제는 성벽을 대규모로 철거하고 식민지배의 상징물을 조성하였다

조선신궁(1925)은 남산 성벽을, 경성운동장(1925)은 도성 동쪽 성벽과 이간수문을 파괴하고 건설되었다

 

 

 

 

붉은 색이 도로나 건축으로 인해 철거된 성곽이다

 

 

 

 

해방 이후의 수난

서울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되었다

서울의 재건을 위해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도성은 무관심 속에 훼손되었다

 

 

 

 

도성대지도(18세기 후반 서울무형문화재 제297호, 복제)

18세기의 서울의 모습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최대의 도성도로 당시 주요 도로와 물길 · 궁궐과 관청 · 도성에 대한 주요한 사항을 망라하고 있다

 

 

 

 

흥인지문 장식기와

조선시대에는 주요 건물의 지붕 추녀마루 위에 용두와 여러가지 동물 모양을 한 잡상을 올려 놓았다

이는 화재를 막고 잡귀로부터 건물을 보호한다는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무 건물이나 쓸 수 없었으며 잡상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물의 등급이 높았다

흥인지문에는 상층 9개 · 하층 8개의 잡상이 있었다

상층의 경우에는 대당사부 · 손행자 · 저팔계 · 사화상 · 이귀박 · 이구룡 · 마화상 · 삼살보살 · 산갑 순으로 잡상을 세우고 그 다음 용두를 세웠다

 

 

 

 

1975년 한양도성 복원사업

파란색이 해체 · 보수 · 복원된 성곽이다

 

 

 

 

다시 시작된 순성

시대와 상황이 바뀌어 1993년에는 인왕산, 2007년에는 백악이 민간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한양도성이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복원이 시작된 한양도성

도성의 재생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서울 세검정 일대까지 잠입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정부는 국민의 안보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성의 복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는 한양도성

 

 

 

 

숭례문(남대문)

 

 

 

 

소의문(서소문 · 소덕문)

 

 

 

 

돈의문(서대문)

 

 

 

 

창의문(북소문 · 자하문 · 장의문)

 

 

 

 

숙정문(북대문 · 숙청문 · 북청문)

 

 

 

 

혜화문(동소문 · 흥화문)

 

 

 

 

흥인지문(동대문 · 흥인문)

 

 

 

 

광희문(수구문 · 시구문)

 

 

 

 

성곽에 쓰여진 명문석 탁본

숙종(재위 1674~1720) 때, 1704년 공사에 착수하여 1712년 여장을 포함한 성벽 전체를 마무리 하였는데

이때에는 전국에서 인력을 징발했던 태조 · 세종대와는 달리 도성수비군인 오군영을 동원하였는데

감독관 · 석공의 성명 및 날자를 성돌에 새겨 책임 소재를 밝혔다

돌의 크기와 쌓는 방법도 변화하였다

기존의 성돌이 작아서 잘 무너졌기 때문에 규격화시킨 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더욱 견고하게 쌓았다

 

 

 

 

한눈에 보는 세계성곽유산

유네스코가 지정한 799건의 세계문화유산 중 성곽과 관련된 유산에는 성채 ·  · 성벽 · 요새 · 요새도시 · 읍성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도시를 둘러싼 성곽은 여럿이지만 현재 온전히 남아 있는 사례는 많지 않다

서울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수도 성곽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오랜 기간 도성 역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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