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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소래역사관

2012년 6월 29일 개관한 소래역사관은 급속한 신도시 개발과 도시화로 사라져 가는

소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운 옛 모습을 보존하고자 건립된 인천광역시 남동구 최초의 공립박물관이다

 

 

소래역사관

소래포구역에서 소래포구로 가는 길에 있다

 

 

 

 

협궤열차

1927년 6월 14일 수원기관차 사무소에서 조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협궤용 증기기관차다

1937년 8월 6일 수원역에서 남인천역에 이르는 52km의 수인선이 개통되어 소금 및 미곡 수송과 더불어 인천시민의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1978년 여름까지 운행되었다

그후 수인선은 디젤동차로 바뀌어 1995년 12월 31일까지 운행되었다

*

소래역사관 앞에 있다

 

 

 

 

소래역사관 로비

소래포구의 옛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영상관

입장료 5백원이다

 

 

 

 

소래역

수인선 협궤열차가 개통되던 1937년 신설되어 1994년 폐역되었다

이후에도 역사는 남아 있었으나 2008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소규모 공원이 들어섰다

2층 영상관 맞은편이다

 

 

 

 

예전 소래역 사진들

모형 소래역 앞 전시함에 있다

 

 

 

 

소래역 매표 창구

수원까지 50원, 하루 5회 왕복했었다

 

 

 

 

소래역사(蘇萊驛舍)

수인선 협궤열차가 개통되던 1937년 신설되어 60여 년간 인천시민의 삶과 애환을 함께해오다 1994년 폐역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에도 역사는 남아 있었으나 2008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소규모의 공원이 들어서며 지금은 추억 속에만 남게되었다

 

 

 

 

인천 역사의 사작 · 소래의 유래

 

 

 

 

인천 남동구의 역사

 

 

 

 

남동구 인물 이승훈 묘소(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3호)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는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서 태여났다

정조 4년(1780)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이벽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했고

1783년 동지사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 청나라에 가서 교리를 공부하고, 예수회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천주교 탄압으로 몇 번에 걸쳐 체포와 배교를 되풀이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아들인 이신규와 손자인 이재의가 그를 따라 순교했고, 1871년엔 증손자 이연구, 이균구가 각각 순교해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선대까지 세거지였던 반주골(남동구 장수동)에 묻혔는데 그의 묘는 2011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김재로 묘(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호)

 

 

 

 

협률사(協律社)

부산 출신 정치국이라는 인물로 지금은 애관극장 근처인 용동에 벽돌집을 지어 문을 열었다

당시 무대에 올렸던 작품들은 박첨지, 흥부놀부 같은 인형극이나 창극, 판소리가 주류였으며 가끔 줄타기와 땅재주, 승무 같은 공연도 있었다 

 

 

 

 

수인선 협궤열차 동영상

마지막 운행 때의 동영상인데 운행 개시일이 잘못 써있다

 

 

 

 

옛 소래포구의 모습을 재현한 벽화

 

 

 

 

수인선 건설과정

 

 

 

 

소래철교를 건너는 협궤열차 모형

 

 

 

 

762mm 협궤열차 · 1435mm 표준열차 크기 비교

모형 열차가 다니는 유리관 벽에 표준궤열차와 협궤열차의 크기 비교가 인쇄되어 있다

 

 

 

 

소래 염전 소금창고

소래염전은 1930년경 공사를 시작해 1934년 첫 소금을 생산한 이후 1970년대에는 전국 최대 천일염 생산지였으나

1993년 폐염전이 되어 폐허로 남아있다가, 2009년에 소래습지생태공원이 조성되었다

 

 

 

 

소금과 전매국

전매제도는 고려시대 1288년에 처음으로 염전에서 세금을 거두었고, 1309년에 도염원을 설치하여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전매제도란 국가가 재정 수익을 얻기 위하여 특정의 물품에 대한 판매 및 생산의 권리를 독점하는 제도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각 지방관의 감독하에 자유로이 소금을 만들었으나 이후 염업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전매국에서 소금을 주관하여 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우리나라 염전을 개발하고 소금을 착취했다

*

조선총독부 전매국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설치된 조선총독부 소속의 관청으로 담배, 소금, 인삼, 아편, 마약(모르핀)류의 전매 사무를 관장하였다

 

 

 

 

근대 제염업과 천일제염

우리나라는 조선 말기까지 제염업을 부업으로 여겨 바닷물을 직접 가마솥에 넣고 끓이는 전오제염법을 주로 행하였다

당시 소금 생산량은 약 15만톤 정도라고 전해지며 그렇기에 소금의 절대량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해왔다

그러던 중 1907년 대한제국은 최초로 인천의 주안지역에 천일제염 염전을 조성하였고 이로 인해 우리나라 소금 생산 방법이 근대화하게 되었다

이후 인천지역에 많은 천일염전들이 생겨났고 국내의 소금 생산량의 30%를 차지했다

* 천일제염은 소금제조법의 하나로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 들여서 태양열로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법으로 강우량이 적고 공기가 건조한 지역에 적합하다

 

 

 

 

소래염전의 역사

1930년경 공사를 시작해 1934년 첫 소금을 생산한 이후 1993년에 폐염전이 되었다

일찍이 주안, 소래, 남동 등 염전지대에서 천일염이 성행하여 한국 최초로 천일제염을 개척한 선구지이면서 한때 한국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다

소래염전은 일제시대 때부터 염전으로 개발되어 소래 갯벌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하였고

이 소금은 소래포구를 통하여 수인선 협궤열차나 배로 인천항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보내졌다

소래염전의 소금은 생필품뿐만 아니라 일제의 전쟁을 위한 화약 제조용 군수품으로도 쓰여졌다

1970년대에는 전국 최대의 천일염 생산지였으나 현재는 과거의 명성을 잃어 폐허로 남아 있다가 2009년에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소금밀대(대파) 밀어보기

 

 

 

 

소금창고

전시된 소금을 보고 있는 빅터

 

 

 

 

소래염전 천일염 · 프랑스 겔랑드소금 · 꽃소금 · 맛소금 · 죽염

우린 갯벌 바닥이 소금 생산에 불편해 옹기편과 타일 등으로 변화해 왔지만 프랑스는 갯벌 바닥에서 만든 소금을 보호하고 관광 상품화하고 있다

가격도 소래 천일염의 10배 가격이다

 

 

 

 

천일염 ·암염 · 정제염 · 재제염 · 가공염

확대경으로 소금을 관찰할 수 있다

 

 

 

 

소래어시장 미니어처

 

 

 

 

협궤열차 객실

폭은 원형대로 만들었지만 길이는 실내에 들여 놓기 위해 70% 크기로 만들었다

소래역사관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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