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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창덕궁 후원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성종 대에 건립한 창경궁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 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창경궁과 함께 광해 2년(1610)에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인조 · 숙종 · 정조 ·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後苑) 입구 · 창경궁 입구
집희와 낙선재 사이다

 

 

 

 

후원으로 가는 길이다

 

 

 

 

언덕에서 잠시 설명을 듣고 부용지로 가다 돌아 봤다

 

 

 

 

부용지로 가며 돌아 보니 해는 언덕 너머로 기울고 있다

 

 

 

 

부용지(芙蓉池) · 주합루(宙合樓)
후원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 창건한 2층 누각으로 아래 층에는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규장각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고 주합루란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란 뜻이다

 

 

 

 

부용지(芙蓉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천원지방 天圓地方) 전통적 우주관을 반영하여 만든 연못으로
숙종 때 만들어졌지만 부용지라는 이름은 정조가 지었다
*
부용정(芙蓉亭) ·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좌우로 있다

 

 

 

 

어수문(魚水門)
주합루로 오르는 정문으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어수문은 왕의 문이고, 좌우의 문 두 개는 신하의 문으로 겸손함을 잃지 말라고 작고 낮게 지었다

 

 

 

 

영화당(暎花堂)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 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로
왕의 활쏘기뿐 아니라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뤘으며 소설이긴 하지만 이몽룡이 과거시험을 치룬 곳이다

 

 

 

 

등현문(登賢門)
주합루 동문이 언덕 위에 있다

 

 

 

 

금마문(金馬門)
금마(金馬)는 「쇠붙이로 만든 말」이라는 뜻이다
원래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 때 대궐 문의 이름으로 문 옆에 동(銅)으로 만든 말이 있었으므로 금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금마는 한나라 때 국가에서 책을 갈무리하던 곳의 이름이기도 했다
기오헌이 책을 비치하던 곳이므로 한나라의 전통을 따라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불로문(不老門)
큰 돌을 가운데를 파서 만든 통 돌문이다
 금마문 옆 담장의 중간, 기오헌 아래턱에 위치한 돌문이다
쇠못을 박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문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지에 의하면 이 문 앞에 불로지(不老池)가 있었고 문 안에 어수당이 있었다고 한다
불로(不老)는 「늙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 문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늙지않고 오래도록 살라는 축원을 담았다
또한 임금의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염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애련지(愛連池) · 애련정(愛連亭)
숙종 18년(1692)에 연못을 만들고 가운데 섬을 쌓아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장락문(長樂門)
연경당의 정문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순조 28년(1828)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남자 · 여자 출입문
솟을 대문이 남자의 출입문이다

 

 

 

 

행랑채

 

 

 

 

연경당(演慶堂)
세 개의 방 사이에 마루가 있다
이  방이 부인 방이고 끝 방이 남편 방 · 가운데 방이 시어머니 방이다
부부가 시어머니를 공경하라고 이렇게 지었다

 

 

 

 

연경당 안채에서 봤다

 

 

 

 

오른쪽이 아이들 방이다

 

 

 

 

농수정(濃繡亭)
연경당 선향재 뒤쪽 화계 깊숙히 들어앉은 후원 별정으로 정 ·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이다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선향재(善香齋)
서재인 선향재는 청나라의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도르레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 느낌이 든다

 

 

 

 

연경당 마당

 

 

 

 

폄우사(砭愚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다
왕세자가 독서하던 건물이다

 

 

 

 

승재정(勝在亭)
숲 속에 자리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존덕정(尊德亭)
인조 22년(1644)에 지어진 이 건물은 처음에는 육면정이라고 부르다가 존덕정으로 바뀌었다
이 건물과 이어진 다리 남쪽에 시간을 재는 일영대(日影臺)가 있었다고 한다
존덕정은 본 건물을 짓고 그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붕이 두 개이다
바깥 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를 세울 자리에 가는 기둥 세 개를 세워 이채롭다
이 일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박석은 세자의 팔자걸음을 연습하기 위해 박아놓은 것이다

 

 

 

 

존덕정 천장
중앙에 그려진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은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다

 

 

 

 

어제 만천명월주인옹자서(御製 萬川明月主人翁自序)
존덕정 안 북쪽 지붕 아래에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라 쓰인 나무판이 걸려 있다
정조가 재위 22년(1798)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號)를 스스로 지어 부르고 그 서문을 새겨 존덕정에 걸어 놓은 것이다
그 요지는 「뭇 개울들이 달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는 개울이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 음양 · 오행의 이치에 합당하다」라는 것으로
신하들에게 강력하게 충성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관람정(觀纜亭)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 편액은 나뭇잎 모양이다

 

 

 

 

관람정(觀纜亭) 편액

나뭇잎 모양 편액이다

 

 

 

 

취규정(聚奎亭)
취규(聚奎)는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든다는 뜻으로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길에 있다
이 정자는 인조 18년(1640) 때 세워졌다

 

 

 

 

취한정(翠寒亭)
옥류천 주변에 있으며 임금이 옥류천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소박한 정자이다
취한(翠寒)이란 이름은 창취능한(蒼翠凌寒)에서 따서 지었다

 

 

 

 

소요정(逍遙亭)
인조 14년(1636)에 세웠으며 탄서정(歎逝亭)이라 부르다가 후에 소요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취한정 위쪽 옥류천 바로 옆에 정면 1칸 · 측면 1칸의 익공계 사모지붕 형식 정자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소요암(逍遙巖)
인조 14년(1636)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옥류천(玉流川) 어필(御筆)
飛流三百尺(비류삼백척) / 삼백 척 높이에서 날아 흐르니
遙落九天來(요락구천래) /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오누나
看是白虹起(간시백홍기) / 바라볼 땐 흰 무지개 일어나고
飜成萬壑雷(번성만학뢰) / 갑자기 온 골짜기에 우뢰 소리 가득하다
*
바위에 새겨진 옥류천(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353년 중국 동진 소흥지방에 난정(蘭亭)에 당대 명필 왕희지를 비롯한 명사 41명이 모였다
난정 밑에 굽이치는 물길을 만들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자기 앞에 온 술잔을 받아 들고 시를 지어 발표했다
다음 잔이 올 때까지 발표하지 못하면 벌주로 술 석 잔을 마셔야 했다
여기서 나온 시를 모은 것이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 하여 그 때부터 상류층의 유희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청의정(淸漪亭)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이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이곳 논에서 나는 쌀로는 신하에게 주는 상이나 제사 때 쓰였다

 

 

 

 

태극정(太極亭)
인조 14년(1636)에 세운 옥류천 주변에 있는 정자로 원래 운영정(雲影亭)이라 불렀다가 태극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농산정(籠山亭)
정사에 몰두하면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는 정조도 가끔은 후원에 와서 정취를 즐겼다
특히 농산정을 좋아하여 재숙을 하기도 했으며 화성 행차 준비를 이곳에서 하기도 하였다

 

 

 

 

관람을 마치고 산길로 서문으로 간다

 

 

 

 

둘 셋이 모여 이야기하며 걷는 모습이 보기 좋다

 

 

 

 

태정문(兌正門)
연경당 안채에 있는 서행각(西行閣)의 가운데 문이다
태정(兌正)은 곧고 바르다는 뜻이다

 

 

 

 

언덕에 계단도 있다

 

 

 

 

고목이 있는 언덕길

 

 

 

 

돌다리

 

 

 

 

창덕궁 향나무 / 천연기념물 제194호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창덕궁 그림(동궐도 東闕圖)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 볼 수 있다
2010년 태풍의 피해로 인해 완전 옆으로 누웠다
*
나무 높이 5.6m · 뿌리부분 둘레 5.6m · 나무 나이 약 750년

 

 

 

 

은행나무 보호수
서문 앞에 있다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4.5km · 소요시간 2시간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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