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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창덕궁

종묘에서 창덕궁을 가려면 본적지를 지나게 된다

그냥 지나치려다 궁궐이지만 남의 집도 찾아가는데 하며 들려 사진을 만들고 식사도 했다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 다른 아련함이 있다

 

 

돈화문(敦化門) / 보물 제383호

조선 왕조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궁궐로 이궁으로 지어졌다

조선의 왕들 중에는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한 왕이 많아 창덕궁은 자연스럽게 조선왕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금천교(錦川橋) / 보물 제1762호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활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태종 11년(14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라 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진선문(進善門)

이 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면 신문고를 두두리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렵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두리기 힘들었을 신문고를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 조정의 골치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인정전 외행각(仁政殿 外行閣) 마당

진선문 쪽이 넓고 숙정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이다

마당 오른쪽으로 호위청 · 상서원 등 여러 관청이 있던 외행각이 있다

 

 

 

 

인정문(仁政門) / 보물 제813호

태종 5년(1405) 창덕궁의 창건 때 지어진 정전(正殿)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효종 · 현종 · 숙종 ·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 문 안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전(仁政殿) /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 신하들의 하례 ·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겉으로 보기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이다

 

 

 

 

인정전 내부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 커튼 ·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품계석(品階石)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正殿) 앞 뜰에 품계를 새겨 나열한 돌이

 

 

 

 

숙장문(肅章門)

 

 

 

 

선정전(宣政殿) / 보물 제814호

선정문에서 복도각을 통하면 선정전에 이른다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 업무보고 ·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세조 7년(1461)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혼전(魂殿)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선정전(宣政殿) 내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렸는데 세조 7년(1461)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정전 뒷마당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인정전이 창덕궁의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인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대조전 앞마당

 

 

 

 

선평문(宣平門)

대조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대조전(大造殿) / 보물 제816호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었다

 

 

 

 

흥복헌(興福軒)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교태전 오른쪽에 있다

 

 

 

 

대조전 · 경훈각 연결채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景薰閣)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청향각(淸香閣) 마당

대조전 뒤뜰이다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이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인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 복구하면서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 유리창문 ·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성정각(誠正閣)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樓)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보춘정의 편액이 걸려 있는 방향이다

 

 

 

 

희우루(喜雨樓)

희우루의 편액이 걸려 있는 방향이다

 

 

 

 

집희(緝熙)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현재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은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이었다

 

 

 

 

창덕웅 후원(後苑) 입구 · 창경궁 입구

집희에서 나오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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