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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서산시 · 예산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가기 위한 여행으로

국립용현자연휴양림을 예약했다

첫 날은 국립용현자연휴양림으로 가며 즐겼고 다음 날은 오며 즐겼다

 

 

풍전뚝집

어죽 전문집이다

매운탕 · 미꾸라지튀김도 있다

*

풍전저수지 앞에 있다

 

 

 

 

풍전뚝집 어죽

지인이 먹어본 어죽 중 제일 맛나다며 소개해 주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

소면과 밥이 들어 있다

 

 

 

 

풍전뚝집 반찬

고추 · 양파 반찬은 셀프다

 

 

 

 

남은들 상여 보호각

 

 

 

 

남은들 상여 보호각

 

 

 

 

남은들 상여 / 국가민속유산 제31호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긴 후 덕산면 광천 마을에 주었다고 전하는 상여다

장강(長杠) 위에 구름 차일(遮日)을 친 용봉(龍鳳) 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부 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 노랑 · 흰색 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다

대원군은 종실 중흥이라는 큰 뜻을 품고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덕산 가야산(伽倻山)으로 옮겼다

시신(屍身)을 넣은 관(棺)을 운반하는데에는 500리 길을 따라 한 지방을 통과할 때마다

그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 구간을 연결하여 모셔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남은 구간을 매우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이 마을에 주었고

이후로 마을 이름이 「남은들」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본래는 창고 안에 있었으나 군(郡)에서 새 상여를 만들어 주고

남은들 상여는 보호각을 지어 마을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다

*

현재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보관중에 있다

안내판 사진이다

 

 

 

 

남은들 상여 / 국가민속유산 제31호

보호각 창문을 통해 봤다

 

 

 

 

충의사(忠義祠) 주차장

비가 오며 무지개가 떴다

 

 

 

 

덕숭산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앞에 있다

 

 

 

 

충의문(忠義門)

윤봉길 의사(1908~1932)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23세 때까지 살던 곳에 조성된 사적지로 영정을 봉안한 본전 · 기념관 등이 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유물 56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윤봉길의 짧은 삶을 매직비전 · 각종 영상 · 디오라마 등으로 연출하여 보여 준다

해마다 4월 27~29일에는 윤봉길의 애국과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매헌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

예산 제2경이다

 

 

 

 

윤봉길 의사 상

4. 29 상해의거 90주년 상징 기념 포토존이다

무한대 기호를 상징하는 조형물은 윤 의사의 청년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바램이다

 

 

 

 

충의문(忠義門) 현판

전 국회의장 곽상훈의 글씨다

 

 

 

 

충의사(忠義祠)

영정을 봉안한 본전이다

 

 

 

 

충의사(忠義祠) 현판

전 대통령 박정희의 글씨다

 

 

 

 

윤봉길 의사 영정

 

 

 

 

남연군 비(南延君 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

남연군 묘에서 약 700m 떨어진 낮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된 후

이 비를 세웠으며 영의정 조두순이 비문을 지었다

화강암으로 된 두 개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높은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오석(烏石)으로 비신을 놓았다

대좌 높이 134Cm · 비신 길이 186Cm를 합쳐서 전체 높이는 320cm가 된다

비신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지붕 모양의 이수가 올려져 있다

비신에는 큰 글씨로 남연군충정( 南延君忠正)이라고 쓰여져 있고

비문은 작은 글씨로 4면을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

남연군 묘 들머리에 있다

 

 

 

 

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무덤이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것을 184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구(李球 · ? ~1822)는 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되어 남연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은신군이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서 죽자 왕족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보냈다

이하응이 아버지의 묫자리를 찾던 중

가야산에는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자리」가 있고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야산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가야사(伽倻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어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훗날 대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高宗)이다

 

 

 

 

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과 부인 여흥민씨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은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봉분 아래쪽은 원형 호석을 둘렀다

*

역사적으로 이곳은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독일 출신으로 인류학자를 자칭하던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1868년 이 무덤에 잠입하여 보물을 도굴하려고 하였다가

근처 백성들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대원군에게 척양(斥洋) 의식과 쇄국정책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묘비

1864년(고종 1) 7월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가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린 다음

1865년(고종 2) 5월 세운 것이다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올렸으며, 비신은 오석이고 방형 대석을 갖추고 있다

*

유명 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有明 朝鮮國 顯祿大夫 南延君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증시 충정 완산이공 휘구지묘(贈諡 忠正 完山李公 諱球之墓)

군부인 여흥민씨 부좌(郡夫人 驪興閔氏 祔左)

 

 

 

 

음기(陰記 · 뒷면)

성상 원년 7월 영의정 조두순 계언(聖上 元年 七月 領議政 趙斗淳啟言)

옆면에는 남 흥선대원군 하응 근서(男 興宣大院君 昰應 謹書)라 새겨져 있다

 

 

 

 

남연군 묘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길 때

가야사(伽倻寺)를 불사르고 묘를 썼다고 전해진다

옛 가야사의 흔적들이 묘 뒷쪽에 남아 있다

 

 

 

 

가야산도립공원 포토존

백제의 미소길에 있는 《상가리미륵불》로 가며 봤다

 

 

 

 

상가리미륵불 /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남연군 묘에서 동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있는 골짜기에 북향하고 있는 불상이다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묘를 쓰자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는 설도 있고

북쪽 계곡으로부터 쳐들어오는 병마를 물리치기 위해 북향하고 있다는 설도 전해진다

 

 

 

 

상가리미륵불 /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보관의 중앙에 화불(化佛)이 장식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임을 알 수 있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고 눈은 반쯤 뜨고 있다

코는 보수한 흔적이 있는데

미륵불의 코를 떼어가면 아기를 못 갖는 아낙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어

코를 떼어갔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법의(法衣)는 왼쪽만 걸친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선(線)으로 새겼다

미륵불은 투박하고 거칠게 조성된 듯하나 나름대로 볼륨이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양팔을 몸에 붙인 채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배에 붙이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을 고려시대에 충청지방에서 널리 유행한 것이다

 

 

 

 

옥계리마을

헌종대왕 태실이 있다

 

 

 

 

헌종대왕 태실 안내판

 

 

 

 

헌종대왕 태실

조선 제24대 헌종(1827~1849)의 태(胎)를 안장한 태봉(胎封)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가의 자손이 태어나면 태를 백자항아리에 보관하였다가

좋은 날을 택하여 풍수적 의미를 배려한 길지를 찾아 봉안했다

이는 아기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기복 번창을 의미한다

 

 

 

 

헌종대왕 태실

그러나 일제가 강제병합 후 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이왕직(李王職) ·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던 직제》이란 기관을 설치하고

1928년 전국에 안치된 조선 왕의 태 53기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을 때 이곳 태실도 훼손당했다

태실의 무늬와 모양은 조선시대 풍수와 미술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덕산향교 홍살문

덕산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기 위해 국가가 설립한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시나 문장을 짓는 법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는 곳이자 여러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으나

봄 · 가을엔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을 피워 지금도 옛 성현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하마비 · 영세불망비 · 안내판 등이 옆에 있다

 

 

 

 

느티나무

명륜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덕산향교 / 충남 기념물

덕산향교가 처음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조선 초 각 지방 군현에 향교를 세웠던 1413년(태종 13)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산향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건물이 화재로 불에 타 인조 때(1623~1649) 수리한 기록이 있고

1662년(헌종 3)에는 향교를 수리하던 중 근처에 전염병이 돌아 잠시 제례를 멈추었던 적도 있었다

*

석수 한 쌍이 앞에 있다

 

 

 

 

덕산향교 내삼문(內三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대성전(大成殿)

유학자 5성(공자 · 안자 · 증자 · 자사 · 맹자)과 송현 2현(송나라 유학자 2명)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유학자 18현(신라 ~ 조선까지의 최고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덕산성당

덕산은 내포지역 회장 정산필 베드로의 고향이다

주문모 신부에게 직접 세례를 받은 정산필 베드로는

박취득 라우렌시오 · 원시보 야고보 · 방 프란치스코 등 절친한 친구들과

1797년 정사박해 때에 체포되어 모두 순교했다

 

 

 

 

한국야쿠르트 · 친구네식당

덕산5일장이 열리는 곳을 돌아봤다

덕산 5일장은 4일과 9일 열린다

 

 

 

 

덕산시장 아케이트 무대

별다방이 옆에 있다

 

 

 

 

미래환경 에어컨 · 어서와유

 

 

 

 

하나로마트

휴양림에서 필요한 물건을 샀다

덕산5일장 옆에 있다

 

 

 

 

국립용현자연휴양림

마침점이다

*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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