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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

소요산

진달래와 철쭉 · 녹음과 폭포 그리고 단풍이 멋져 옛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릴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소요산
주봉 의상대(587m) · 하백운대(440m) · 중백운대 (510m) · 상백운대(559m) · 나한대(571m) · 공주봉(526m)으로 이어지는

말발굽 모양의 능선 품에 원효대사가 도를 깨친 자재암이 천 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서화담 · 양봉래 · 매월당이 자주 거닐던 산이라 해서 소요산이라 한다

 

 

소요산역

시점이다

 

 

 

 

지사각(志士閣) / 경기도 향토유적 제3호

구 한말 지사로 일명 만세 대장으로 불리는 홍덕문(洪德文) 지사는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 해 음력 2월 25일 장날 정오 1천여 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형기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 왔으나 형독으로 인하여 타계하셨다

 

 

 

 

애국지사 홍덕문 묘(愛國志士 洪德文墓)

포천시 신북면 선영(先塋)에서 2009년 5월 이장 안치하였다

 

 

 

 

사적 이태조 행궁지(史蹟 李太祖 行宮址) 빗돌

 

 

 

 

요석공원(瑤石公園) 안내판

요석공원은 신라의 고승(高僧) 원효대사(617~686)의 부인이었던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인연이 깊은 데서 이름하였다

요석공주는 신라 29대 왕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딸로서 일찌기 홀로 된 몸으로 요석궁(瑤石宮)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 약 30대 나이의 원효라는 스님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니면서

" 그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당시 임금이었던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하면서

요석궁에 홀로 있던 요석공주와 짝을 이루게 하여 후에 대유학자가 된 설총을 낳았다

이렇게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원효는 파계승이 되어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큰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를 하던 중

이곳 소요산 원효대에 머물면서 다시 수행에 전념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 요석공주는 아들 설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조그만 별궁을 짓고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원효가 수도하던 원효대를 향하여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봉우리가 공주봉이며, 공주가 살던 별궁터는 요석궁터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요석궁지 포토존

요석공주 별궁지 빗돌에 옆에 있다

 

 

 

 

요석공주 별궁지( 瑤石公主 別宮址) 빗돌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게 되었다

원효는 30대에 소요산에 머무르며 원효대에서 수행에 전념하였고

이 때 요석공주도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에 들어와 별궁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때의 별궁터를 요석궁지라 불리고 있다

 

 

 

 

소요산 자재암 불교유산 안내소

예전 입장료를 받던 곳이다

 

 

 

 

소요산공원

 

 

 

 

소요산 자재암 일주문

 

 

 

 

소요산 자재암(消遙山 自在庵) · 경기소금강(京畿小金剛) 현판

 

 

 

 

원효폭포

 

 

 

 

원효 기도굴

 

 

 

 

원효 기도굴

 

 

 

 

동두천 소요산 등산코스

여섯 개의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의 능선과 산 봉우리가 기암 괴석으로 절묘하게 이루어져 있다

 

 

 

 

금강문(金剛門)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 이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

 

 

 

 

추담선사 사리탑 · 비문
자재암 밑에 있다

 

 

 

 

자재암(自在庵)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고려 광종 25년(974) 왕명으로 각규대사가 중창하였으며, 의종 7년(1153) 화재로 이듬해 각령선사가 중건했다
그 뒤 조선 고종 9년(1872)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44칸의 사찰로 복원하고 「영원사」로 개칭했다
순종 원년(1907)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에 일본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그 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스님이 복원하고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쳤다
그러나 6 · 25 때 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 1971년 요사 · 1974년 포교당과 원효대 ·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했다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자재암이라 했다 한다

*

자재암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었으나 왼쪽에 새로 지었다

 

 

 

 

자재암(自在庵) 현판

 

 

 

 

대웅전중건공덕비(大雄殿重建功德碑)

 

 

 

 

대웅전(大雄殿) 현판

 

 

 

 

석가모니불상

 

 

 

 

석가모니불상

 

 

 

 

보타전(寶陀殿)

관세움보살을 모시는 전각이다

 

 

 

 

자재암(自在庵)

지금의 보타전이다

*

(2010. 10. 24)

 

 

 

 

보타전(寶陀殿) 현판

 

 

 

 

청량폭포

 

 

 

 

나한전(羅漢殿)

소요산 자재암 빗돌 · 원효샘이 양 옆에 있다

 

 

 

 

나한전(羅漢殿)

나한상을 안치한 전각이다

 

 

 

 

삼성각(三聖閣)
한국불교의 사찰에서 삼신을 각각 안치하여 숭배하는 전각
독성각(獨聖閣) · 산신각(山神閣) · 칠성각(七星閣)이 있으며, 대개 삼성각에 삼신을 같이 모신다
독각은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자를 말하며
산신각은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산신을 모신 곳이며
칠성각은 북두칠성에 축원하는 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여 북두칠성을 불교의 여래로 조화하여 모신 곳이다

 

 

 

 

삼성각 내부

 

 

 

 

선녀탕 갈림길이다

 

 

 

 

하백운대 방향안내판

 

 

 

 

하백운대 오르는 계단이다

 

 

 

 

나한대 · 의상대
하백운대로 오르며 봤다

 

 

 

 

하백운대(440m)

소요산 백운대 능선의 제일 아래 봉우리로 이 위로 중백운대 · 상백운대를 거쳐 의상대 · 공주봉으로 이어진다

소요산은 일찍이 절묘한 산세와 수려한 계곡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단풍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양산헌 · 이율곡 · 성혼 · 허목 등 당대의 문인 · 학자 · 시인들이 이 산을 찾으며 그 절경을 노래하였다

이 산에 머물며 수행하던 매월당 김시습은 이렇게 도래하였다

*

길 따라 계곡에 드니 봉우리마다 노을이 곱다

험준한 산봉우리 둘러섰는데 한 줄기 계곡물이 맑고 시리다

 

 

 

 

나무 뿌리가 돌을 품고 있다

 

 

 

 

나한대 · 의상대 · 공주봉

 

 

 

 

나한대(571m) · 의상대(587m)

 

 

 

 

중백운대 안내도

소요산 백운대의 상백운대 · 중백운대 · 하백운대의 중간 봉우리로

푸른 산과 붉은 단풍 그리고 흰 구름이 어우러지는 명승이기에 이를 중백운대라 이른다

고려 말 고승이자 해동불교의 법조인 태고 보우선사는 「백운암의 노래」라는 시에서 이곳의 절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

소요산 위의 흰구름은 떠오른 달과 함께 노닌다

맑은 바람 불어오니 상쾌하여라

기묘한 경치 더욱 좋구나

 

 

 

 

중백운대(510m)

 

 

 

 

덕일봉 0.7km 방향안내목

 

 

 

 

중백운대 0.35km ·백운대 0.25km 방향안내판

선녀탕 갈림길이다

 

 

 

 

참호

 

 

 

 

상백운대(559m)

소요산 일주문에서 오르는 왼편 등산로를 백운대라 부르며 이를 다시 그 위치에 따라 하백운대 · 중백운대 · 상백운대로 나눈다

산세의 웅장함과 극치를 이루는 단풍과 청량한 하늘 전체에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이 어우러져

문자 그대로 작은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이곳을 상백운대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왕자의 난으로 싥가한 이후 이곳 소요산 아래 행궁을 짓고 머물며 불교 수행에 힘썼는데

그는 자주 이곳 백운대에 올라 경치를 즐기며 동시에 자신의 회한을 달랬다고 한다

그가 백운대에 올라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

넝굴을 휘어잡으며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흰 구름 가은데 암자 하나 놓였네

내 나라 산천이 눈 아래 펼쳐지고

중국 땅 강남조차 보일 듯 하이

 

 

 

 

버섯이 낀 나무

 

 

 

 

칼바위능선
상백운대에서 선녀탕입구 하산로까지 약 500m가량 칼날처럼 날카롭고 뾰쪽하게 생긴 바위 능선이다

 

 

 

 

칼바위능선

칼바위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뾰족하게 생기고, 크고 작은 편마암들의 바위라는 의미로

상백운대에서 시작하여 선녀탕입구 하산로까지 약 500m가량 연속으로 이어진 조금은 긴장되는 구간이다

수려한 소요산의 절경을 한층 더 뽐내주는 칼바위는 그 기세나 산세가 웅장하고 노송과 함께 절경을 이루며

뒷편으로는 소요산지맥과 국사봉왕방산해룡산칠봉산이 연결되어 마치 용의 등처럼 동두천의 동북쪽을 휘감고 있다

 

 

 

 

선녀탕 입구 하산로로 가는 길이다

 

 

 

 

선녀탕 입구 0.8km 방향안내판

 

 

 

 

돌탑

 

 

 

 

선녀탕 입구로 가는 길이다

 

 

 

 

선녀탕

 

 

 

 

선녀탕 날머리

 

 

 

 

자재암 날머리

 

 

 

 

원효샘

동양 삼국 불교계의 거인인 원효 스님은 차(茶)의 달인으로도 차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고승이다

스님은 전국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절을 창건하였는데

원효 스님이 자리를 잡은 절터엔 필연적으로 약수가 나오며 찻물로는 으뜸인 석간수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그 중 1,300여 년 전 수행하였던 소요산 자재암의 원효샘 석간수는 찻물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수(名水)로 이름나 있다

신라 고려 때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도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특히 고려시대 시인인 백운 이규보는 이 물맛을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하는 등

원효샘은 전국에서 유명한 차문화 유적지가 되었다

 

 

 

 

원효대

이곳은 원효 스님이 정진중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머물며 좌정하고 수도하던 장소다

 

 

 

 

독립유공자추모비

한말 · 일제강점시기 동두천 출신으로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항쟁에 몸 바친 독립유공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동두천 시민 대표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추모비 건립위원회에서 1996년 8월 15일 세웠다

 

 

 

 

김연성 의병 전투지 안내판

김연성 의병 전투지는 김연성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린 곳이다

자재암과 원효폭포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

1870년 5월 5일에 양주군 이담면에서 태어난 김연성은 1907년 9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1908년에는 양주군 주내 전투에서 총대장 이인영을 도와 선봉에 서서 전투를 수행하였고

소요산 원효대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기도 · 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 분견소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대하다가 1909년 4월에 체포되었다

1909년 11월 29일에 평양 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소요산막걸리 동두천양조장

 

 

 

 

흙집 돼지갈비

50년 전통의 함경도식 고추장 돼지갈비 음식점이라 방송에서 보았기에 찾았다

*

저녁을 한 음식점이다

 

 

 

 

1959 동광극장

흙집 돼지갈비 맞은편에 있다

 

 

 

 

걸은거리 9.0km · 소요시간 5시간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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