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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

개운산

개운산(開運山 134m)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산으로 안암동에 있어 안암산 · 진(陳) 씨 성을 가진 사람의 채석장이 있어  진석산(陳石山)이라고도 한다
삼각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끝자락은 보현봉에서 형제봉과 북악터널의 위쪽을 거쳐

328m 봉우리에서 다시 서남방의 북악지맥과 동남방의 미아리고개 지맥으로 갈린다
이 동남방 지맥은 정릉(貞陵)을 끼고 돌아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로 이어지며, 다시 표고 134m의 개운산 봉우리를 형성한다
개운산은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의 개운사 (開運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길음역 10번출구

시점이다

 

 

 

 

미성년자 출입금지

예전 미아리 텍사스라 불린 곳이다

 

 

 

 

미아리 텍사스

 

 

 

 

정릉로48길

 

 

 

 

돈암1동주민센터

 

 

 

 

개운초등학교

화강암 수직절벽이 뒤로 보인다

 

 

 

 

종암로27길 터널

 

 

 

 

죽림정사

개운산 들머리 계단이 옆에 있다

 

 

 

 

종암로27길 터널

개운산 들머리 계단을 오르며 봤다

 

 

 

 

개운산 계단

이 계단을 오르면 좌우 두 개의 계단 중 오른쪽 계단으로 올랐다

 

 

 

 

마로니에마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사각정자

운동기구가 앞에 있다

 

 

 

 

청량리역롯데캐슬SKY-L65오피스텔

운동기구가 있는 쉼터에서 봤다

 

 

 

 

화목정(和睦亭)

마로니에마당에 있다

 

 

 

 

마로니에마당

새해 해맞이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헬기장이 가운데 있다

 

 

 

 

개운산 안내도

마로니에마당에 있다

 

 

 

 

개운산 마로니에마당 빗돌

 

 

 

 

이육사(李陸史 1904 ~ 1944) 시비 · 약력 빗돌
시인 · 독립운동가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원록(源綠) · 육사라는 이름은 형무소 수인 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다
1933년 「황혼」으로 등단하여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잠시 활약했다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시풍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의 비극과 저항 의지를 노래하였다
대표작으로 절정 · 광야 ·· 청포도 등이 있으며, 유고 시집으로 《육사 시집》(1946)이 있다

*

1939년 부모님 가족과 함께 종암동으로 이사했다

*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발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개운산 공원길 안내판

개운산 공원은 1940년 3월 12일 지정된 마을동산 성격의 산지형 공원으로

바위 암(岩)자가 들어간 돈암동(敦岩洞) · 안암동(安岩洞) · 종암동(鍾岩洞) 등으로 둘러 쌓여 있다

 

 

 

 

개운산 자연학습장

 

 

 

 

시비가 있는 쉼터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자연(自然) / 박재삼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정자 쉼터

 

 

 

 

개운산 둘레길 안내판

개운산 둘레길은 산림욕장입니다

 

 

 

 

담소정(淡素亭)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산마루 북카페

 

 

 

 

공원이용지원센터

개운산 자연생태공원이 2층에 있다

 

 

 

 

개운산 운동장과 공원이용지원센터를 잇는 다리 공사를 한다

 

 

 

 

성북구의회

 

 

 

 

종암동 북바위 둘레길 안내판

종암동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 ·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긴 공간이다

 

 

 

 

북한산

개운산 정상 운동장에서 봤다

 

 

 

 

개운산 운동장

 

 

 

 

성북구의회

 

 

 

 

테니스장

이곳에서 이동식을 했다

 

 

 

 

개운산 안내도

테니스장에서 헬스장을 거쳐 개운산 둘레길 명상의 길로 들었다

 

 

 

 

개운산 둘레길 연인의 길

쓰러진 나무들이 많다

 

 

 

 

개운산 둘레길 연인의 길

 

 

 

 

화정(化汀)체육관

 

 

 

 

바위

개운산 해맞이명소를 찾으러 올라가다 만났다

 

 

 

 

보타사

 

 

 

 

회화나무

고려대학교 전신 보성전문학교는 창립 약 1년 후인 1906년 박동(礡洞 현 종로 조계사 터) 소재 대가택(大家宅)을 매입하여 독립적인 교지 · 교사를 마련한다

그 터에는 16세기부터 자라온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자유롭고 호방한 가지 · 나무 중에서 잎이 가장 늦게 돋고 가장 늦게 지는 모습이 군자의 성품을 닮았다 하여

예로부터 학자나무(學者樹)로 불리며 선비와 학문을 상징했다

중국 국자감과 공묘(孔廟) · 우리나라 궁궐과 서원 등에 회화나무가 물결치는 이유이다

학문의 전당 고려대학교의 발원지에는 그 수려한 회화나무가 지금도 그대로이다(서울시 지정보호수 제78호)

2017년 12월 그 나무에서 채취한 씨앗에서 2018년 봄 싹이 트고 2019년 5월 3일 심은 나무이다

 

 

 

 

9층석탑

보타사 옆에 있다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 인촌기념관

 

 

 

 

문인석 / 고려대학교 박물관

문인석은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공복 차림의 문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문인석은 크고 두꺼워진 홀을 얼굴에 붙이고 있는 것과 공복의 소매가 2중을 하고 있는 점에서 15세기의 것과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전반기의 문인석의 특징은 복두공복의 문인석이 계속 조성되고 있지만

조각적 기법과 장식적 표현에 있어 이전 시기보다 세련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문인석이 많이 등장한다

16세기의 문인석은 양감이 풍부하며 코가 매우 돌출되어 있는데 반해

얼굴이 다소 평면화 되어 있고 사실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16세기보다는 17세기 작품들과 관계가 있다

 

 

 

 

문인석 / 고려대학교 박물관

문인석은 왕릉이나 묘의 좌우에 능의 주인을 지키는 의미로 세운 석물이다

이 문인석은 15세기 후반 작품으로 추정되며, 이전 시기 문인석보다 어깨가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박과 하박이 직각을 이루고 양손이 수평으로 만나는 것 역시 15세기 후반 16세기 초의 양식적 특징이다

15세기 전반은 인물상으로 보기에는 과장된 조각기법을 보이는 반면

15세기 후반의 문인석은 인체의 비례가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안면의 눈매가 장승의 눈매가 아닌 사람의 눈매로 바뀌었다

옷자락 역시 홀을 잡고 있는 의복곡선의 흐름뿐 아니라 홀을 잡고 있는 양손의 위치 및 손가락까지 표현하고 있다

 

 

 

 

고인돌(支石墓) / 고려대학교 박물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팀은 1986년 12월 1일부터 1987년 1월 6일까지 고인돌 16기가 군집되어 있던 보성강 유역 퇴적지를 발굴조사했다

주암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 계획의 일환으로 전라남도 순천시(옛 승주군) 승광면 오봉리 지역을 조사한 과정에서

붉은간토기 · 간돌검 · 돌화살 · 삼각형 돌칼 · 대팻날 등 다양한 유물을 출토했다

고인돌의 형식은 전라남도 지방에 많이 분포하고 있는 남방식과 개석식으로 대변되며

기원 전 3세기 경에서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고인돌의 특이한 하부 구조는 학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 기당 현상윤 선생상(幾堂 玄相允 先生像)
1893년에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早稲田大学(조도전 와세다대학) 재학 중, 소설 등으로 新文學(신문학) 운동을 일으켰다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敎師(교사) 시절인 1919년, 선생은 김성수(金性洙) · 송진우(宋鎭禹)와 3 · 1 운동을 계획

48인의 하나로 손병희 · 이승훈 및 普專 校友(보전 교우) 주익(朱翼)과 강기덕(康基德) 등 수많은 인원을 동원,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일로 선생은 20개월 동안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광복 직후 선생은 普成專門學校專 校長(보성전문학교 교장)을 거쳐 高麗大 初代 總長(고려대 초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朝鮮儒學史(조선유학사) · 朝鮮思想史(조선사상사)를 저술 · 직접 강의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던 중
고려대는 1953년 선생의 「朝鮮儒學史(조선유학사)」를 학위 논문으로 인정
고려대 박사학위 제1호이자 대한민국 박사학위 제1호를 수여, 그 분야 학문에서 先導(선도)한 선생의 공을 기렸다

 

 

 

 

태항아리석함 / 고려대학교 박물관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 · 왕녀 등의 태(탯줄과 태반)를 항아리에 넣어 산 정상에 묻는 전통이 있었으며

내항(속항아리)에 태를 담고 잘 싸서 이것을 다시 큰 외항(겉항아리)에 넣어 이를 태지석과 함께 석함에 넣어 묻고 작은 태비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석함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77호 분청사기인화문태호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62cm로 원통 모양의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체에는 깊이 50cm의 홈을 판 후 밑바닥에 배수를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은 태의 주인공과 땅의 기원을 연결하려는 풍수적인 목적에서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고려대학교 상징 호랑이상(虎像) · 호상 비문(虎像 碑文) / 조지훈
民族(민족)의 힘으로 民族(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 民族(민족)의 보람찬 大學(대학)이 있어
너 恒常(항상) 여기에 自由(자유)의 불을 밝히고 正義(정의)의 길을 달리고 眞理(진리)의 샘을 지키느니
地軸(지축)을 박차고 咆哮(포효)하거라
너 불타는 野望(야망) 젊은 意慾(의욕)의 象徵(상징)아
宇宙(우주)를 향한 너의 부르짖음이 民族(민족)의 소리 되어 메아리치는 곳에
너의 氣槪(기개) 너의 志操(지조) 너의 叡智(예지)는 祖國(조국)의 영원한 鼓動(고동)이 되리라 
*
호상 비문은 당시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였던 조지훈 시인이 글을 썼다

 

 

 

 

중앙광장 머릿돌

자유 정의 진리의 광장 / 고려대학교 교훈이 새겨진 돌이다

 

 

 

 

고려대학교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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