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산(楚安山 115.4m)에는 내시들을 비롯해 양반과 시민 등 조선시대 분묘 1,000여 기가 있다
특히 이곳에는 조선시대 궁중의 여러 업무를 담당하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인 내시의 분묘가 모여 있다
따라서 이 초안산을 「내시네 산」이라고도 불렀다
기록에 따르면 내관을 지낸 김계한(金繼韓)과 그의 아들 김광택(金光澤)의 묘가 있었는데 오래전에 양주 효촌리로 옮겼다
이곳에 남아 있는 내시 묘 중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은 김계한의 손자 승극철의 묘인데, 묘표의 건립연대가 1634년(인조 12)이다
내관들은 양자(養子)로 대를 잇기 때문에 손자의 성이 다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내시들의 묘들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초안산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지만,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매년 가을 이곳에서 내시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이곳에는 다양한 계층의 분묘와 수많은 석물들이 시기별로 분포되어 있어 이곳은 조선시대 묘제와 석물의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녹천역 1번 출구
시점이다
초안산 들머리
예전에 없던 데크 계단이 생겼다
초안산 마루금
녹천역 1번출구에서 데크 계단을 오르면 마루금이다
비석
분묘는 흔적조차 없다
초안산 마루금
헬기장 · 뚝딱뚝딱놀이터 · 세대공감공원 방향안내판
군벙커
헬기장 갈림길
북한산 마루금이 보인다
삼각점
초안산(楚安山 115.4m) 정상이다
초안산 근린공원 안내판도 있다
삼각점
(2011. 05. 28)
초안산 근린공원 안내도
헬기장
묘비 · 비받침
문인석
쓰러진 나무
문인석
문인석
정자 쉼터
상석
절충장군 순흥정공 은익지묘(折衝將軍 順興鄭公益之墓) · 숙부인 문화유씨부좌(淑夫人 文化柳氏祔左)
문인석 · 상석
문인석 어깨와 목 부위가 부러져 실리콘으로 붙여 놓았다
초안산 정상 · 비석골 근린공원 방향안내판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안내판이 뒤에 있다
비석 · 상석
분묘는 없다
비석 · 상석
상석 · 향로석
문인석
비석군
예전 분묘와 비석들이 많이 있던 곳이다
예전 분묘와 비석들이 많이 있던 곳이다
위의 사진과 같은 곳이다
(2011. 05. 28)
비석군
문인석
위의 문인석과 형태가 비슷하다
비석 · 상석
분묘는 없어졌지만 상석과 비석은 온전하다
철펜스
비석골 근린공원 · 초안산 정상 방향안내판
통정대부 양공(通政大夫 梁公) 비석
문인석
통정대부 유공지묘(通政大夫 劉公之墓) 비석
통정대부란 국가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정3품 벼슬이다
통정대부 유공지묘(通政大夫 劉公之墓) 비석
숭정 9년 8월 일 입(崇禎九年 八月 日 立)
숭정이란 중국 명나라 마지막 임금인 의종의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되었다
숭정 9년은 1636년이다
머리가 짤린 석상이 있다
석상
계단 양 옆에 있다
동자석
상석
문인석
흙이 보통 가슴의 높이로 쌓여 있다
통훈대부 충주최씨 휘 숙동양위지묘(通訓大夫 忠州崔公 諱淑仝兩位之合墓)
비석 · 상석 · 문인석
비석골근린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담양전공해윤 처 단양최씨묘(潭陽田公海潤 妻 丹陽崔氏墓) 묘
상석과 머리가 짤린 석상이 있다
망주석(望柱石)
초안산의 조선시대 분묘군에서 발견되는 문인석과 같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6세기~조선 말기로 추정된다
횃불을 연상시키는 기둥 모양으로 140cm~160cm의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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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주석은 묘 앞 양 옆에 하나씩 세우는 대략 2m 정도 높이의 기둥으로
먼 곳에서 바라보아 묘를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이며 나아가 영혼이 자기의 유택(묘)을 찾아오도록 안내 역할을 한다
이는 중국에서 전하여 통일신라부터 발전되기 시작해 8세기 경에는 왕릉의 석물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묘제석물(墓制石物)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괘릉과 흥덕왕릉에 보이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능원(陵園)은 물론 일반사대부의 묘에도 예외없이 망주석이 세워졌다
망주석은 크게 대석(臺石)과 기둥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인 모습은 횃불을 연상시키고
기둥의 중간을 다람쥐나 쥐모양의 세호(細虎)를 왼쪽(동향)에는 올라가고 오른쪽(서향) 내려가는 모양(左上右下)을 새겨 넣고
머리는 연꽃 모양외 다양한 형태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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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기의 망주석이 있다
비석골근린공원 석물전시장
문인석 12기 · 동자석 6기 · 망주석 14기 · 상석 2기 · 비석 2기 · 향로석 2기가 있다
초안산과 수락산 · 불암산 등 노원구 일대에서 수습한 묘지 석물들이다
증 좌의정 청주한공 경원지묘(增 左議政 淸州韓公 景瑗之墓) 배 증 숙부인 덕수이씨 부좌(配 證 淑夫人 德水李氏 祔左)
상석 · 비석 · 향로석이 있다
○평태씨지묘(○平泰氏之墓)
문인석(文人石) 형태 · 조성연대
복두공복(幞頭公服)과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 두손을 모아 홀(芴)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복두공복을 입고 있는 형태의 문인석은 조선 초 ~ 조선 중기로 추정된다
금관조복 차림의 문인석은 16세기~조선 말기까지 유행한 문인석으로 추정된다
문인석(文人石) 조성유래
문인석은 무덤 앞에 세워진 사람 형상의 석물로서 중국 한나라 때부터 세워지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순장풍습을 대신해 토용을 묻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무인석 · 석수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의미의 석물이다
묻혀 있는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따라 모양과 크기 · 형태가 각기 다르며
그 사람이 생전에 누렸던 지위나 후손의 권세에 따라 그 크기와 조각 수준 등이 다르다
현재 초안산 일대에 남아 있는 석인상은 금관조복 차림의 문인상이 주를 이루고 있으므로
16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인 묘역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90cm~190cm이다
동자석(童子石)
형태는 쌍상투 · 민머리에 옷을 입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크기는 90cm~110cm이다
조성연대는 초안산의 조선시대 분묘군에서 발견되는 문인석과 같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16세기~조선 말기로 생각된다
조성유래는 동자상은 석인상(石人像)의 일종으로 주요 인물을 수행하는 시자(侍者)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어린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문인석과 달리 관모를 쓰지 않고 두손으로 무언가를 공손히 들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묘지 내의 석물 설치에 제한을 엄격하게 두었기 때문에
동자상은 학문적 업적이 뛰어났으나 벼슬에 오르지 못한 경우나 당하관 이하의 경우에 동자석상을 세웠으며
문관상 보다 크기가 작은데 이는 묻혀 있는 사람의 신분과 무관하지 않다
동자상이 묘의 석인상으로 조성된 것은 16세기 이후로 볼 수 있다
동자상의 기원은 도교와 불교의 동자상에서 찾을 수 있으며 초안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동자상은
대체로 쌍상투 또는 민머리이며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찰에 조성된 동자상의 도상과 일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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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기의 동자석이 있다
비석골근린공원 석물전시장
문인석 12기 · 동자석 6기 · 망주석 14기 · 상석 2기 · 비석 2기 · 향로석 2기가 있다
비석골공원
월계동 각심재로 가며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