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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성북동

한양도성의 북쪽 마을이라 성북동(城北洞)이라 불리는 동네로

예부터 수많은 작가들이 창작의 고향으로 뿌리를 내렸고, 수도(首都)를 지키는 북악산과 어울려 경관이 수려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한양도성 · 민족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간송미술관 · 가슴 아린 사연을 간직한 길상사 등

이름만 들어도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곳에서 특별한 서울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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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엔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 문인들이 여럿 살았다

서울의 중심에서가 아닌 도성 밖 한적한 마을에서 조용한 일상을 보내던 문화예술인들의 집터와

심우장 · 수연산방 · 길상사 · 삼청각 · 선잠단지 등을 찾았다

 

 

성북동의 유래

북한산의 주맥이 갈라져 형성된 넓고 깊숙한 골짜기에 들어앉은 성북동은 한양도성 성곽을 서쪽 울타리로 두른 아늑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영조 연간 혜화문 밖 선잠단 부근에 성북둔(城北屯)이라는 군사시설을 두면서부터 성북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북둔(北屯) · 북저동(北渚洞) · 북사동(北寺洞) · 북적동(北赤洞) · 묵사동(墨寺洞)이라는 별칭으로도 전한다

1765년(영조 41) 도성 북쪽 성저(城底)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에 주목한 조선왕조는

이곳에 어영청의 둔진을 두기로 결정하고 이듬해인 1766년(영조 42) 선잠단과 가까운 곳에 성북둔을 설치했다

조정에서는 둔사와 창고를 지은 후 군역(軍役)을 지는 장정과 그 가족 수십 호를 모집해 살게 하였으나

농사로는 자생하기 어려우므로 포백훈조계(曝白燻造契)를 조직해 생업을 보장해 주었다

마전이라고도 하는 포백은 생포목을 삶아 볕에 쬐어 새하얗게 표백하는 공정으로 성북동 사람들은 마전한 포목을 도성 안 시전에 납품했다

훈조란 메주 쑤는 일로서 해마다 정해진 양을 궁궐에 상납해서 일정한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성북동포백훈조계완문절목》은 이러한 포백훈조계 사람들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해 놓은 문건으로

18~19세기 성북동 주민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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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성북초등학교 앞 교차로에는 마전터 표석이 있다

 

 

 

 

선잠단과 그 주변에 마전한 포목을 말리는 사람들 / 1930년대 추정

 

 

 

 

성북동 /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는 골목

성북동 뒷골목을 사이에 두고 숨어있는 역사 · 문화의 흔적을 찾아가는 코스로

혜곡 최순우 · 만해 한용운 · 상허 이태준 등 역사 · 문화 관련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선잠단지 · 길상사 · 서울성곽 · 이태준 가옥 등을 통해 역사 · 종교 · 건축양식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나폴레옹과자점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는 1968년에 설립된 제과점이다

시점인 한성대입구역 5번출구 앞에 있다

 

 

 

 

성북예술창작터 / 예전 화가 오원 장승업(1843~1897) 집터

단원 김홍도 ·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 후기 3대 화가 오원 장승업의 집터이다

성북예술창작터는 시민 누구나 음악 · 미술 · 문학 등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2013년 4월 꾸며졌다

 

 

 

 

성북파출소 느티나무

이승만 대통령께서 1957년 식목일에 성북동에 나무를 심고 돌아오는 길에

3~4년생 느티나무 묘목 한 그루를 주시며 심도록 한 나무다

 

 

 

 

새이용원(예전 명랑이발관)

60년 전통의 명랑할머니 이발소다

 

 

 

 

성북크리닝

 

 

 

 

혜곡 최순우 옛집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말년을 보낸 곳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대표적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1930년대 전형적인 경기지역 한옥 양식의 집으로 작고 아담하며 선생이 직접 쓴 현판 · 수집해 아끼던 석조물

소담한 안뜰과 뒤뜰에서 그의 안목과 손길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국문학의 예술의 미를 널리 알리는 데 평생 애쓰던 최순우 선생의 집이 성북동 재개발로 한 때 헐릴 위기에 처했으나

2002년 시민 성금으로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로서 혜곡 최순우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오수당(午睡堂) 편액

혜곡의 방으로 김홍도 글씨를 채집한 편액이 걸려 있다

당신 스스로 오수노인이라 자칭하며 이곳에서 낮잠을 주무셨다고 한다

 

 

 

 

혜곡(兮谷) 방 편액

" 杜門卽是深山 丙辰 榴夏 午睡老人"이란 편액이 방문 위에 걸려 있는데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은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라는 뜻이고

선생님의 호는 혜곡이나 스스로 오수노인(午睡老人)이라 부르길 좋아하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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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앞쪽 편액으로 두 개의 편액이 있다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제83호

선잠단은 누에를 처음 치기 시작했다는 서릉씨(西陵氏)를 양잠(養蠶)의 신으로 받들어 국가의례 선잠례를 지낸 곳이다

조선의 선잠단은 1414년부터 1430년 사이에 새롭게 마련되었다

1475년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선잠단의 크기는 사방 2장 3척 · 높이 2척 7촌이며 4방향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다

제단을 둘러싼 상단과 하단 담장의 둘레는 각각 25보이다

선잠제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가운데 중사(中祀)로서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고 누에치기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우리나라의 선잠례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꾸준히 시행되었다

또한 궁궐 후원에서는 왕비가 뽕잎을 따며 양잠의 모범을 보이는 「친잠례(親蠶禮)」가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선잠례는 1908년(융희 3) 일제가 조선의 국가제사를 축소하고 선잠단의 신위를 사직단에 배향하게 되면서 중단되었다

선잠단지도 국유지를 거쳐 사유지로 팔렸다가 해방 후 도로 신설로 인해 축소된 상태로 정비되었다

2016년 선잠단지 복원사업을 위한 유적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선잠단 재단의 위치와 유구(遺構)를 확인하였다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제83호

조선 성종 때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기 위해 혜화문 밖에 세운 제단이다

나라에서는 일반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하기 위해 왕비가 손수 뽕잎을 따고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는 행사인 를 열기도 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왕비들의 기원을 아직도 간직한 듯한 역사적인 유적지로서 의미가 있다

매년 5월 이곳에서 선잠제례가 재현된다

 

 

 

 

선잠단지(先蠶壇址)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 1930년 추정

선잠단지와 주변 사진이다

 

 

 

 

성북선잠박물관

성북동에는 조선시대 선잠단의 터가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

선잠단에서 이루어졌던 선잠례는 음악 · 노래 · 무용이 결합되어 예악의 문화를 담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성북선잠박물관은 선잠단과 선잠제가 본 모습을 되찾는 첫걸음이 되고자 건립되었다

 

 

 

 

마전터(麻田址) 빗돌 / 성북동 122-7 일대

조선 후기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게 하였으나 농토가 적고 시장도 멀어서 생활 곤란으로 사람들이 계속하여 떠나가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765년(영조 41)에 서울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布木)의 표백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이곳 주민에게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주변에 「마전터」라는 상호를 사용하고 있다

 

 

 

 

성북역사문화센터

「지붕 없는 박물관」 성북동의 관광 인프라 거점시설로 2019년 건립하여 2020년 개관하여

성북동 역사문화자원과 관련된 각종 관광 콘텐츠 등을 발굴 및 홍보하고 다양한 관광 정보를 안내해 주고 있는 관광안내소이다

 

 

 

 

역사문화마을 성북동 안내도

테마로 즐기는 성북동 여행 4개 코스가 안내되어 있다

 

 

 

 

글라렛선교수도회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국가등록문화재 제768호

1966년 전형필(1906~1962)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했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전적 · 서화 · 도자기 · 불상 등의 미술품 및 국학자료를 수집하여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을 지어 보관해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태평양전쟁과 8 · 15해방, 남북분단 등 국내외의 격동 속에서 미술관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후 아들들이 유업을 이어 1965년 가을부터 한국 고미술품 및 전적 정리작업을 시작 「고 간송전형필수집서화목록」 상 · 하권을 간행했다

1966년 정리작업 진행중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발족되었다

1 · 2층에 전시실이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 · 고려청자 · 조선백자 · 불상 · 부도 · 석탑 · 그림 · 글씨 · 전 등 다양하다

그중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을 비롯하여 10여 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71년의 개관전시회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매년 봄 · 가을 2회에 걸친 수장품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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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수장고 신축공사와 내부 복원공사로 휴관 중이다

 

 

 

 

성북구립미술관

자치구 최초의 공립미술관으로 2009년에 개관하였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맥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독창적인 기획전시를 통하여 성북의 문화, 예술인들의 삶과 예술을 조망하고 역사적 가치를 탐색한다

아울러 미래의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어린이미술관 등 미술 전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구민들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한 전문적인 활동을 통하여 미술과 구민이 만나는 소통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시간의 초상 / 정현

올해 성북구립미술관 거리갤러리 공공미술 프로젝트 세 번째 참여 작가로 선정된 정현은

낡고 버려진 존재들에 응축된 힘과 시간의 흔적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성찰해온 작가이다

그는 철도의 침목(枕木) · 고 한옥의 대들보 등 폐기된 사물들과 아스팔트 콘크리트 · 석탄 · 석재 등의 물질을 통해

그 속에 깃든 시간의 기억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조각으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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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건물이 뒤에 있다

 

 

 

 

수연산방(壽硯山房 ) /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1904. 11. 4~ ?) 문학의 산실이다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 월북하기 전까지 살면서 글을 쓰던 문향루(聞香樓)이다

근대 순수문학의 기수인 그는 「달밤」 「돌다리」 등 주옥 같은 단편집과 여러 장편 외에 수필집 「무서록(無序錄)」 「문장강화(紋章講話)」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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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지정 아름다운 나무(사철나무 나이 70년 · 기준년 2015년)가 마당에 있다

 

 

 

 

문향루(聞香樓)

이태준은 이곳을 수연산방이라 하고 그의 수필 「무서록」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내력 등이 쓰여 있다

지금은 외종손녀가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하는 곳이다

 

 

 

 

금왕돈까스

성북동길에 있는 칼국수집 · 보리밥집 · 한정식집 등 많은 맛집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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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점심을 했다

 

 

 

 

이종석 별장 /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0호

1900년대 마포에서 젓갈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한옥이다

우물이 있는 바깥마당을 지나 일각문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행랑채 · 오른편에 본채가 있다

 

 

 

 

본채(안채)

ㄱ자형의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를 두고 왼쪽에는 안방을 두었다

누마루에는 「일관정(日觀亭)」이라고 쓴 글씨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었던 누마루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신분에 따른 주거 형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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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부호이자 보인학원 설립자인 이종석(1875~1952)의 여름 별장이다

일제강점기 일관정에서 이태준 · 정지용 · 이효석 · 이은상 등 문학인들이 문학활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행랑채

특이하게도 ㄱ자형으로 일반적인 가옥의 공간 구성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원래 담장이 놓여 있었는데, 이곳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도록 되어 있었다

 

 

 

 

심우장(尋牛莊) / 사적 제550호

독립운동가이자 승려, 시인이었던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3 · 1운동으로 옥고 후 성북동 골짜기 셋방살이를 하던 한용운은 지인의 도움으로 집을 짓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그가 유일하게 소유했던 집, 심우장이다

《님의 침묵》을 출판해 저항문학에 앞장섰던 그의 저항정신은 조선총독부를 등지고 지은 동북향 집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방 안에는 그의 친필 원고와 논문집 · 유품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심우장(尋牛莊) 관리동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광복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은 집이다

심우장이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의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한 가지 수행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에서 유래한 것이다

심우장은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의 단촐한 일자형 한옥으로 남쪽에 위치한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어 동북향으로 지었다

 

 

 

 

만해 한용운 동상

만해의 산책공원이다

 

 

 

 

수월암

 

 

 

 

성북 우정의 공원

 

 

 

 

성북로

삼청각으로 오르는 길이다

 

 

 

 

대사관로

 

 

 

 

삼청각(三淸閣) 정문

1972년 평양의 옥류관을 모델로 만들어진 삼청각(三淸閣)은 너른 숲과 정원 속에 6채의 한옥으로 이루어진 문화공간이다

1970년~1980년 3대 요정 중 하나였는데 궁전 · 민담 · 고궁 등 다양한 양식을 차용한 건축양식이 특이하고

100년된 적송 350그루가 들어선 정원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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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고위 정치인의 회동과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삼청각(三淸閣) 편액

삼청은 산청(山淸) · 수청(水淸) · 인청(人淸)으로 산이 맑고 · 물이 맑고 · 인심이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하정(幽霞亭)

팔각정 통유리 건축물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유하정 옆으로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소리를 감상하실 수 있는 곳이다

 

 

 

 

일화당(一和堂)

한옥의 당당함과 아름다운 정원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7 · 4남북 공동성명 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일화당(一和堂) 편액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석은 변종하 기념미술관

서양화단의 거목 석은 변종하(1926~2000)도 말년을 성북동에서 보냈다

한국적 이미지를 탐구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그는 오랜 투병기간 중에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창작활동을 지속했고

입체감과 생동감을 살린 개성 있는 화풍을 만들어 냈다

2000년 작고 후 그의 작업실이었던 성북동 주택을 개조해 2001년 석은 변종하 기념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덴마크대사관저

 

 

 

 

우리옛돌기념관

한국의 석조 유물 1,250점을 모아 만든 곳으로 이런 박물관은 이곳밖에 없다

수집된 유물들의 전체적인 테마는 수복강녕과 길상이다

 

 

 

 

하마비(下馬碑)

 

 

 

 

꽃과 동(童 아이)을 새긴 벅수(法首) / 조선 후기

벅수는 재앙이나 액운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마을 입구나 길가에 한 쌍씩 세운다

주름진 이마와 퉁방울 눈 · 사실적인 이빨 등 벅수를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복을 상징하는 꽃과 다산을 상징하는 동(童)을 몸에 새겨 마을 공동체와 개인의 수복강녕을 기원하였다

 

 

 

 

정법사(正法寺)

성북동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정법사는 조선 후기 유명한 학승이며, 선사였던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 대선사가 창건한 복천암(福泉庵)이라 불리던 작은 암자였는데

서울 가회동의 정법사가 이곳을 인수해 1960년 석산(石山) 스님이 머물게 된 이후 중창하면서 정법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삼각산 길상사(三角山 吉祥寺)

196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삼청각 ·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리집 중 하나였던 대원각을

주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씨가 1987년 무소유의 법정 스님께 시주하면서 요정 대원각은 길상사로 바뀌었다

길상사는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를 본따서 지었다

 

 

 

 

극락전(極樂殿)

시주 길상화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극락전이라 하였다

 

 

 

 

시주 길상화 공덕비 · 사당(祠堂)

1916년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여나 16세의 나이로 뜻한 바 있어 금하(琴下) 하일규 문하에서 진향(眞香)이란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하였다

1937년 천재 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으로 불리었던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생전에 「선가 하일규 선생 약전」 등의 저술을 남겼다

1955년 바위 사이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란 한식당을 운영하던 그녀는

1987년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생애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7천여 평의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청하였다

 

 

 

 

시주 길상화(吉祥華 · 본명 金英韓 1916~1999) 공덕비 · 사당(祠堂)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창건되는 아름다운 법석에서

김영한은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佛名)을 받았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첫눈이 온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으며

무주상보시의 귀한 뜻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2001년 11월 21일 이 자리에 공덕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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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子夜)는 월북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다 한다. 백석도 그녀를 위해 많은 연애시를 썼다고 한다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시주하고 수중 현금 2억 원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내 사랑 백석〉과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출간했다

 

 

 

 

진영각(眞影閣)

법정 스님의 사진과 유품들이 있는 내부는 촬영 금지다

 

 

 

 

법정 스님 유골 모신 곳

법정 스님(比丘 法頂 1932~2010) 전라남도 해남 출생으로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의지(善意志)와 진리의 길을 찾아 1956년 효봉 학눌(曉峰學訥)의 문하로 출가하여 수행자의 기초를 다진 후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쌍계사 · 해인사 · 송광사 등 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했다

1960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불교사전 편찬 · 불교경전 역경에 헌신하였으며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佛日庵)을 짓고 수행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청빈과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하였다

1994년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를 창립하여 이끌어주었고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김영한 여사가 성북동의 대원각(大苑閣)을 무주상보시하여 1997년 길상사를 창건하였다

2010년 3월 11일 법랍 55세 · 세수 78세로 길상사 행지실에서 입적하였다

저서 및 역서로는 무소유 · 버리고 떠나기 · 물소리 바람소리 · 화엄경 · 숫타니파타 등이 있다

 

 

 

 

북악슈퍼

 

 

 

 

누브티스 넥타이 박물관ing · 레스토랑

 

 

 

 

천주교 성북동성당

 

 

 

 

시인 조지훈 집터 / 성북동 60-44

조지훈(1920~1968)이 약 30년간 살았던 곳으로, 당시 건물은 1998년 경에 철거되고 지금의 주택이 건립되었다

시인은 《문장》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박두진 ·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시인으로 일컬어지며

자연추구와 함께 관조적 · 고전적인 품격의 시를 독자적으로 형성한 시인이다

작품으로는 〈청록집(공저)〉 · 풀잎단장 · 승무 등이 있으며, 이외의 많은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임종국 집터 안내판

문학평론가 임종국(1929~1989)은 1953년 성북동 58-19번지에 살았다

그가 1966년에 펴낸 《친일문학론》은 이전까지 금기로 여겨졌던 친일문제 연구의 길을 튼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 받는다

이웃에 살던 조지훈 시인은 그의 대학 시절 은사이다

 

 

 

 

낙화 / 조지훈

 

 

 

 

성북로

 

 

 

 

성북동과 문학

성북동은 문학과 관련이 깊은 마을이다

조선 후기 마을이 생기며 김정희 · 이덕무 · 채제공 등이 성북동에 와서 시를 지어 자연을 노래했다

근대에는 사대문안과 가까우면서도 시골의 정취가 남아 있는 성북동에 많은 문인들이 모였다

1930년대 초반 이미 김기진 · 김일엽 등 많은 문인들이 모여 살아 「문인촌」이라는 말을 들었다

1933년 이태준이 성북동으로 이사를 온 뒤, 문인단체 구인회(九人會) 회원들은 이곳에 드나들며 교류했으며. 박태원은 성북동으로 이사를 오기도 했다

1933년 성북동에 들어온 만해 한용운은 입적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에도 교류는 계속되었다

구인회 회원이었으며 돈암동에 살았던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한 세 명의 시인, 조지훈 · 박목월 · 박두진이

밤새 《청록집》의 발간을 논의한 곳은 성북동 조지훈의 집이었다. 청록파가 태동한 것이다

국가가 주도한 예술원에 반발하여 만든 「자유문인협회」의 초대 회장은 「성북동 비둘기」의 김광섭이었다

그는 성북동에 살며 자신이 사는 마을의 변화를 시로 써내려갔다

이밖에 염상섭 · 김기진 · 김일엽 등 수많은 문인들이 성북동에서 교류하며 살았다

이 성북동 문인들은 김환기 · 김용준 · 윤이상 · 채동선 등 다른 예술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했다

화가들은 문인들의 책표지를 꾸몄고, 음악가들은 시에 곡을 붙였다

성북동, 이곳에는 아직 문인들의 핢과 교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화예술가 이사연표 · 안내도

1930년 김일엽을 시작으로 한용운 · 이태준 · 조지훈 · 박태원 등이 이사온 해를 연표로 정리하고

문화예술가의 집 터 안내도가 옆에 있다

 

 

 

 

♡ 포토존

 

 

 

 

구포(龜浦)국수

국수집이 3곳이 붙어 있다

*

한성대입구역이 마침점이다

 

 

 

 

걸은 거리 8.2km · 소요시간 5시간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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