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공원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사육신의 묘역 공원이다
사육신묘(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는 오늘날 성역으로 가꾸어져 있다
한강 인도교와 노량진역 사이 높은 언덕에 자리한 사육신묘는 조선 단종을 강제로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항거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 김문기 등 일곱 충신의 묘역이다
사육신공원 정문
사육신공원 종합안내
역사공원길 안내판
역사공원 길은 노량진역~사육신공원~노들나루공원~봉양봉저정~용봉정근린공원~학도의용군현충비~효사정~흑석역을 잇는 길이다
홍살문
사육신을 의미하는 육각형 주추의 홍살문이다
충신을 기리는 홍살문 안으로 의절사 불이문이 보인다
태양광 상록수 파빌리온
사육신의 충절과 도심 속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디자인을 접속해 조성했다
앞쪽에 조망대가 있다
사육신공원 조망대
사육신공원 조망지점 안내판
한강철교
사육신공원 조망대에서 봤다
63빌딩 방향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 안내판 / 한강철교 폭격 장면 사진
6 · 25전쟁 발발 직후 국군 제7사단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잇는 노량진 일대에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지연시키며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50년 6월 28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국군은 한강교량을 폭파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고자 했다
6월 30일 북한군의 침투로 제7사단은 수도고지(노량진 수원지 일대)에서 북한군과 백병전을 벌이고
7월 1일 39고지(사육신묘)와 월파정(수산시장)에서 공방전을 펼치는 등 한강방어선 전투의 최일선에서 싸웠다
당시 노량진 전투지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고자 한다
사육신역사관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전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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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 월요일 휴관이다
불이문(不二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불이문(不二門) 현판
사육신묘(死六臣墓) 안내판
김문기가 일곱 번째로 있다
의절사(義節祠)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대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 김문기 등의 일곱 충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의절사에서는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9일 추모제향을 올린다
*
조선시대에는 노들섬이 있던 백사장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다
조선소 인근에는 역적이나 중죄를 지은 죄인을 참수하는 형장이 있었다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실패한 사육신도 이곳에서 참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도비각(神道碑閣)
신도비(神道碑)
"유명조선국 육신묘비명"으로 시작하는 비문은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겼다고 적혀있다
정조 6년(1782)에 세워졌다
육각비
육각형의 사육신비는 1955년에 세워진 것이다
신도비각과 마주보고 있다
의절사
7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육각비 · 불이문 · 신도비각
뒷문
사육신 묘로 가는 문이다
표석
비문이 없어 누구의 빗돌인지 모르겠다
하위지 · 성삼문 · 유성원의 묘
유씨지묘(柳氏之墓 · 유성원)
성씨지묘(成氏之墓 · 성삼문)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다
하씨지묘(河氏之墓 · 하위지)
성삼문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 등과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과 집에서 자결한 유성원의 시신도 거열(車裂) 당했다
이개지묘(李氏之墓 · 이개)
이개 · 유응부 · 박팽년 묘이다
유씨지묘(兪氏之墓 · 유응부)
유응부는 잡히기 전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박씨지묘(朴氏之墓 · 박팽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다
김씨지묘(金氏之墓 · 김문기)
원래 이곳에는 박팽년 · 성삼문 · 유응부 · 이개의 무덤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 유성원의 가묘를 조성하고 그 후 김문기의 가묘도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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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8년 사육신묘를 성역화하기 얼마 전
김문기의 후손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가 사육신의 한 사람이라는 진정을 냈다
그 근거는 「세종실록」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성삼문 등 다섯 사람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한 달 이상 고심하던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존의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김문기의 행적을 인정하고 현창하되, 사육신은 그대로이다」라는 어쩡쩡한 결론과 함께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졌으며 신문 지상에 논설이 게재되어 논란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김문기의 18대 후손이었기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정하는 사육신에는 김문기는 제외된다
이개 · 유응부 · 박팽년 · 김문기의 묘
노량진1동
사육신 묘 언덕을 오르자 일곱 개의 주초석이 있다
주추석 아래 경사면에는 문인석 두 구가 있다
한 구는 허리춤까지 땅에 묻힌 것으로 보아 꽤나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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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지묘 · 유씨지묘 · 이씨지묘 · 성씨지묘라는 표석이 있는 네 개의 묘 뒤에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사육신의 충절을 추모하여 숙종이 이곳에 민절서원을 세우고 정조는 비석을 세웠다
세조 당대는 물론 오랫동안 사육신묘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다 이수광은 「지붕유설」에서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빌려 노량진에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3인의 묘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1650 ~ 1670년 사이에 박팽년의 후손 박숭고의 노력으로 육신묘가 국가의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유성원 · 하위지의 묘는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정비하지는 못했다
1950년대까지는 무덤과 비석 등이 훼손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72년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 이개의 4기 묘가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되고
1977~1978년 정화 사업 때 하위지와 유성원 그리고 1978년 이후 김문기 가묘도 추봉되었다
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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