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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박물관 상설전시실 3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자연지세를 따라

태조 5년(1396) 축조된 한양도성은 600여 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수도의 성곽이었다

평균 높이 약 5~8m ·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훼철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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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 기획전시실 · 한양도성 자료실과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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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장 3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훼손되었지만 복원과 발굴 · 개방을 통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한양도성의 격동의 세월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수난의 아픔을 딛고 되살아난 한양도성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상설전시장 3

흥인지문은 황폐한 거리에 외딴섬처럼 남아 비극적인 역사의 목격자가 되었다

 

 

 

 

1966년 정부의 교통난 완화책발표 이후

전차의 운행이 중지되고 흥인지문 일대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발굴, 도성의 뿌리를 찾다

한양도성의 참모습을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서 시작되었다

1999년 주한 러시아대사관 건립 예정 부지에 대한 유적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숭례문 주변 · 정동 일대 · 장충동 일대

남산 백범광장 등지에서 시굴과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들 조사를 통해 땅 밑에서 수백 년간 성벽을 지탱해 온 기초 부분의 실체가 드러났고

지형과 지질에 따른 축성기법의 차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양도성이 자연과 한 몸이 된 것은 성을 쌓은 사람들이 성 쌓을 자리의 자연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상부에서는 완전히 멸실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던 성벽 선을 다시 찾은 것도 큰 성과였다

10여 년간 틈틈이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한양도성의 완전성을 이해하고 진정성 있는 보존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단초가 열렸다

지하에 있는 유구 또한 한양도성의 일부라는 사실을 함께 인식하고, 보존할 방도를 찾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2천여 년 전부터 형성 · 발전해온 한국 축성문화의 정수가 응축된 기념비적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에는 하늘의 선을 존중하고 인간의 개입을 절제하여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를 건설하려 한 한국인의 철학이 담겨 있으며

500여 년에 걸친 석재 가공 기술과 축성 기술의 발전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온 백성이 함께 쌓은 성곽이며, 도성 인근의 모든 주민에게 각자 지켜야 할 구간이 할당된 시설이었다

한양도성은 자연과 한 몸이 되었기에, 서울이 중세도시의 틀을 깨고 현대 대도시로 팽창하는 과정에서도 전면적인 멸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한양도성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수도성곽이다

서울은 인구 1천남의 세계적 대도시로 팽창했으나, 도성 안의 도로 체계는 성문으로 연결되었던 옛 모습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동아시아 역사도시의 현대화 과정을 보여주는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한양도성의 훼손

오래된 성곽 도시들에게 근대화란 인구 증가에 따라 도시 공간이 성벽 밖으로 팽창하고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하여 도로가 신설 · 확장되며, 신무기 개발로 인해 성벽의 군사적 가치가 감소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 세계 많은 도시들의 성벽이 근대화 과정에서 헐렸고 한양도성 역시 근대 도시 성곽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서울의 근대 도시화는 외세의 침탈과 맞물려 있었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평지의 성벽을 조직적으로 허물었으며, 수백 년간 서울의 상징 구실을 한 성문들을 철거하거나 방치하였다

일본 신토(神道) 사원인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남산 일원의 성곽을 훼손했고, 경성운동장을 지으면서 동대문 주변의 성곽을 무너뜨렸다

한양도성은 존엄한 땅을 표상하는 상징물에서 망국의 아픔을 드러내는 폐허로 바뀌었다

 

 

 

 

돈의문 주변 한양도성 전경(코넬대학교 소장)

이 사진은 통신원과 미국공사관의 부영사를 지낸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 · 1880~1918)가 촬영한 1900년대 초반의 도성 풍경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아치창의 서양식 건물은 정동에 세워진 프랑스공사관으로, 돈의문에서 수의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모습을 담아내고 잇다

여러 번 고쳐 쌓은 흔적이 여실한 도성의 성벽은 여장을 비롯하여 상단 부분이 허물어진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경성전도(韓國京城全圖) / 1903년

 

 

 

 

월장(越牆)

아놀드 헨리 새비지 랜도어(Arnold Henry Savage Landor)의 기행문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는

소의문 밖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갔던 새비지 랜도어가 성문이 닫히고 난 후

도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꼬마의 도움을 받아 성벽을 넘은 일화가 실려 있다

 

 

 

 

훼손 이전의 한양도성 지도 · 사진 / 1910년 전후

 

 

 

 

최신경성전도(最新京城全圖) / 1907년

 

 

 

 

남산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 1903년 이전

 

 

 

 

인왕산 곡성 / 1910년 전후

 

 

 

 

숭례문 부근 성벽에서 바라본 시가지 모습 / 1910년 전후

 

 

 

 

흥인지문 부근 전차선로 공사 / 1898~1899년

흥인지문 주변 전차 개통을 준비하기 위해 선로를 부설하는 과정을 담은 사진이다

1898년 전차선로가 완공되고, 1899년 돈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의 노선이 개통되었다

당시 전차의 개통은 일본 교토(1895년) · 나고야(1898년)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였으며, 아시아의 수도로서는 최초의 사례이다

 

 

 

 

흥인지문 부근 전차선로 공사 / 1898~1899년

 

 

 

 

흥인지문 부근 전차선로 공사 / 1898~1899년

 

 

 

 

한국에서(EN COREE) / 1904년 · 에밀 부르다레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한국의 모습을 기록한 책이다

1900년대 초반 도시와 농촌의 경관 · 생활상 등 작가가 직접 본 내용을 다양한 사진과 함께 수록하였다

돈의문에서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성곽과 그 뒤로 보이는 프랑스공사관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PANORAMA DE SEOUL」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 1895년 · 아놀드 헨리 새비지 랜도어

영국 화가이자 탐험가인 아놀드 헨리 새비지 랜도어(1865~1924)가 한국을 방문했던 1890년의 기록이다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한국 사람들의 생김새 및 생활 모습 · 풍광 · 여러가지 문화들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였다

수도 서울을 감싼 한양도성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내용과 도성 밖으로 나갔다가 성문이 닫혀 성벽을 넘어 들어왔던 아찔한 경험담이 수록되어 있다

 

 

 

 

은자의 나라 한국 / 1882년 ·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

미국 저술가이자 동양학자인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1843~1928)가

한반도의 고대사부터 근대사의 을사조약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와 풍습 전반을 다룬 책이다

서구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당시 한국의 위상과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조선의 수도 한양과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에 대한 내용이 그림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 1915년 · 노르베르트 베버

독일에서 창설된성 베네딕토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초대 아빠스(Abbot)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가 한국의 모습을 기록한 저서이다

베버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이책에서 그의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변화의 시작

19세기 중후반부터 시작된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 속에서 조선 정부는 해안과 도성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경복궁과 흥인지문을 새로 짓는 등 도성을 재정비하고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도성 안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면서 도성의 군사적 의미는 크게 손상되었다

또 정부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삼군문이 해체됨으로써 일상적인 도성 관리도 허술해졌다

도성 안은 1882년 중국 상인들에게, 1885년부터는 통상조약을 체결한 모든 나라 상인들에게 개방되었다

남산 기슭에서 개천에 이르는 구간은 일본인과 청국인의 거류지가 되었다

도성 안에 외국 공관과 종교시설, 교육시설들이 속속 들어섰는데, 이들 둥에는 성벽 바로 옆에 지은 것이 많았다

 

 

 

 

전차가 다니는 성문

1894년 조선 정부는 국가의 법률과 제도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서울을 근대 국가의 수도답게 개조하는 사업도 본격화했다

중심 대로인 종로와 남대문로 양변에 늘어서 있던 가가(假家)들을 철거하고 도로의 원래 폭을 회복하였으며

경운궁을 새 황궁으로 정비하고, 독립문 · 환구단 · 기념비각 등 나라의 자주와 독립, 황실의 존엄을 상징하는 기념물들을 건립하였다

1899년 돈의문에서 흥인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노선에서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고

뒤이어 종로에서 숭례문을 거쳐 용산에 이르는 노선도 추가되었다

전차 궤도가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50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인정과 파루가 중지되고 대신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시행되었다

성문의 실용성은 약해졌으나, 그 상징적 기능은 유지되었다

정부는 1902년 숭례문과 돈의문 단청을 보수하는 등 도성의 체모를 지키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도성의 수난 · 성벽처리위원회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일본은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시정(施政) 개선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내정 간섭을 본격화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한국 정부를 장악한 일본인 과닐들은 위생상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애 있돈 연못을 매립하는 한편, 성벽 일부를 철거하려 했다

이에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기구가 설치되어 숭례문과 소의문 · 흥인지문 부근의 성벽과 오간수문의 철책을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바로  실행했다

철거된 성벽의 부재는 도로와 건축공사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대한민국 관보 제3833호 / 1907년

1907년 8월 1일 내각령 제1호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건

성벽처리위원회는 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성벽의 훼철에 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했던 한시적인 조직이었다

1908년 9월 5일 내각령 제9호에 의해 폐지되었다

 

 

 

 

경성전차안내 / 1929년 · 전차승차표 / 일제강점기 · 경성유람승합자동차 / 1910~1920년

 

 

 

 

사라지는 문루들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총독부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 소속으로 삼아 수도의 지위를 박탈하고 일개 지방 도시로 격하시켰다

1914년에는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성 밖 용산 일대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도시의 경계를 표시하는 성벽과 성문의 기능도 사라졌다

이어 1914년에 소의문, 1915년에 돈의문을 헐고 그 문루와 석재를 건축자재로 매각했다

다른 성문들을 일부러 헐지는 않았으마, 퇴락하도록 방치하여 1928년 혜화문 문루가 붕괴되었다

1938년에는 도로를 확장한다는 명목으로 남아 있던 혜화문 육축마저 철거했다

민간인들이 주택을 지으면서 성벽을 훼손하는 일도 흔했다

도성의 권위를 표시하던 성벽은 퇴락하고 허물어져 한국인들에게 망국의 아픔을 일깨우는 유적이 되었다

 

 

 

 

신궁 참배로가 된 남산 성벽

조선총독부는 신민지 통치의 일환으로 한국인들 사이에 일본 토속 종교인 신토(神道)를 침투 시키고자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12월 일본 내각에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請議)'를 제출했으며 일본 내각은 이듬해 7월 이를 승인하고 예산을 편성했다

제사 지낼 신은 일본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한국 강점의 부역인 메이지왕(明治王)으로 정했다

1920년 한국인들이 신성시해 온 남산 성벽 아래 국사당(國師堂) 자리에서 기공식이 열렸고 1925년에 준공되었다

준공 직전 일본 내각은 신사의 격을 높여 「관폐대사조선신궁(官弊大社朝鮮神宮)」으로 개칭했다

조선신궁과 참배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변 성벽이 대거 훼손되었다

 

 

 

 

운동장에 묻힌 이간수문

지대가 낮고 평탄하여 방어하기 어려웠던 흥인지문과 광희문 주변에는 훈련원 · 하도감 · 염초청 등 여러 군사 시설이 배치되었다

영조대에는 이 구간에 여섯 개의 치성(雉城)을 만들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 뒤 이 지역에 있던 군사시설들을 학교 연합운동회나 직공 연합운동회 등의

대규모 운동회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으니 이곳은 한국 근대 스포츠 발상지라 할 수 있다

고종 황제와 순종황제의 영결식도 훈련원 터에서 거행되었다

1926년 경성부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훈련원공원 한 편에 근대적 경기장인 경성운동장을 지었다

운동장을 지으면서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남아 있던 성벽마저 파괴하고 이간수문도 헐었다

성벽 하단부의 석재는 관중석 기초로 사용되었다

 

 

 

 

경성부관내도(京城府管內圖) / 1927년

 

 

 

 

조선신궁(朝鮮神宮) / 1925~1945년

남산에 자리잡은 조선신궁의 모습이다

신궁과 참배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양도성의 성벽이 크게 훼손되었으며 숭례문 앞에는 조선신궁참도(朝鮮神宮參道)라고 새겨진 대형 석등을 세웠다

 

 

 

 

경성운동장 / 1925~1945년

 

 

 

 

택지 개발과 도성 훼손

소의문 밖 아현리 · 숭례문 밖 이태원 · 광희문 밖 신당리 · 혜화문 밖 미아리 등지는 수백 년간 도성 사람들의 묘지였고

1920년대까지 성벽에는 묘를 쓸 수 없는 곳과 있는 곳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적 농업 정책으로 인해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대거 서울로 이주하면서 1920년대부터 서울 인구는 날로 늘어났다

도성 안의 개천 변과 산자락은 물론 공동묘지 주변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인 토막들이 들어찼다

조선총독부는 인구증가에 대응하는 한편 경성을 대륙 침랻을 위한 전초기지로 개발하기 위해 1936년 경성부의 면적을 대폭 확장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성 밖 묘지와 주변지역들이 새 택지로 개발되었고 성벽 주변의 도로도 확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돌을 건축 재료로 삼은 경우도 많았다

 

 

 

 

다매케이스 · 사진액자 · 기념엽서 · 경성관광안내서 · 한국풍속풍경안내첩 · 등록상표 남대문 덕용장부 / 일제강점기

 

 

 

 

한국풍속풍경안내첩

 

 

 

 

등록상표 남대문 덕용장부 / 일제강점기

 

 

 

 

명승지 관광기념품 / 일제강점기 · 기념 부채 / 1945년 이후

 

 

 

 

일제강점기 훼손된 한양도성 / 1910~1945년

 

 

 

 

경성부관내도 / 1937년

 

 

 

 

좌우 성벽이 훼철된 흥인지문

 

 

 

 

좌우 성벽이 훼철된 흥인지문

 

 

 

 

인왕산 범바위 성벽

 

 

 

 

문루 아래로 전차선로가 놓인 돈의문

 

 

 

 

소의문 철거 후, 「경성시구개정회고이십년(京城市區改正回顧二十年」

 

 

 

 

명색뿐인 고적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지배체제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하여 한반도 내 문화유산을 가급적 보존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을 제정 · 공포하고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포함하여 212점의 건조물 · 공예품 등을 조선 보물로 지정했다

1936년에는 한양도성(당시 경성성곽)을 고적으로 추가 지정했다

그러나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 구간은 고적 지정에서 제외했으며, 지정된 구간에 대해서도 별다른 보존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다

경성성곽을 고적으로 지정한 뒤에도 조선총독부는 혜화문 육축과 주변 성곽을 철거했으며 민간의 성벽 훼손도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숭례문과 흥인지문 등 한양도성의 시설물들은 자체의 빼어난 건축미로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라는 지위를 굳게 지켰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사진엽서나 관광 안내 책자에 이들 사진이 빠짐없이 실렸다

 

 

 

 

대경성부대관(大京城府大觀) / 1936년

1936년 조선신문사에서 제작하여 배포한 조감도 형식의 지도이다

경성부를 비롯하여 영등포 · 명수대 · 인천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공중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기존의 지도와 달리 건물의 입면까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지도의 본체를 이루는 경성부는 남산 위에서 북서쪽으로 백악산과 인왕산을 내려다 보는듯한 구도로

북쪽은 백악산 정상 · 동쪽은 동대문 밖의 창신동 · 남쪽은 용산지역 · 서쪽은 안산의 일부와 마포~서대문 구간의 전차노선까지 표현하였다

1930년대 한양도성과 경성 시가지의 모습을 상세히 보여준다

 

 

 

 

한양도성, 소생하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 도시는 근대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담을 수 없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성벽이 도시 발전을 방해하는 낡은 시대의 잔재로 인식된 것은 보편적인 시대 현상이었다

전 세계 역사도시들의 성벽이 헐렸고 한양도성 역시 중세 성곽의 숙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평지에 건설된 다른 수도 성곽들과는 달리 한양도성은 자연과 한몸으로 축조되었기에 많은 부분이 온존될 수 있었다

질풍노도와 같은 근대화의 시기를 지난 이후, 민족적 전통이 담긴 이전 시대의 유물들을 온전히 보존하고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양도성 역시 한국과 서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념비적 유산으로 재발견되어,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담은 구조물로 소생했다

원 모습대로 복원하겠다는 서툰 태도가 오히려 진정성을 훼손한 사례가 적지 않았으나

한양도성은 그 상처마저도 미래 세대에 전승할 교훈으로 품은 채 인간과 자연,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의 표상으로 거듭났다

 

 

 

 

해방 계속되는 수난

1925년 경성운동장 건립 · 조선신궁 건립

1926년 숭례문과 흥인지문 고적으로 지정

1928년 혜화문 문루 철거 등을 보여준다

 

 

 

 

숭례문 종단면도(崇禮門 縱斷面圖 ) / 1960~1969

축대가 된 성벽 · 도성에 남은 전쟁의 상흔이 양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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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대가 된 성벽

한양도성은 193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고적으로 지정되었으나, 도성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해방 직후의 혼란과 전쟁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생활과 의식, 전통문화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태도 등은 도성 보존에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민간인들이 집을 지으면서 성벽을 축대로 사용하는 일은 일반적이었고

정부나 교육기관, 종교단체마저 성벽을 훼손하면서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만들곤 했다

혜화문 옆의 성벽은 고등학교의 축대가 되었고, 남산 성벽 주변에는 자유센터 · 타워호텔 · 외인아파트 등의 대형 건물이 건립되었다

수많은 성돌이 이들 건물의 축대를 쌓는 데 사용되었다

세조 때 신설되었다가 폐쇄된 남소문 터는 도로공사로 깎여 나갔으며, 광희문은 제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옮겨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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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 남은 전쟁의 상흔

1945년 8월 15일,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자주적 정부를 세울 수는 없었다

한동안 혼란이 지속되었고, 외국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귀환하여 서울에 정착했다

일본인들은 물러갔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울의 주택은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벽 주변에 굴을 파거나 토막을 짓고 거주했다

1950년 6 · 25전쟁 중에는 서울역과 가까운 남산 일대에 공중 포격이 집중되어 숭례문이 일부 파손되었고

성벽 일부 구간은 시가전 와중에 총탄 세례를 받기도 했다

휴전 후에는 월남민과 상경민들이 성벽을 훼손하면서 판잣집을 지었다

현재 성벽 주변에 있는 마을들은 대개 휴전 직후에 형성되었다

1953년부터 서울 복구 사업에 착수한 정부는 그해에 숭례문을 보수했으나, 한양도성의 전 구간을 보수할 여력이 없었다

 

 

 

 

서울성곽 보수공사 설계도 / 1972년 · 서울남대문수리보고서 / 1966년

서울시 교육위원회에서 발간한 숭례문 중수공사 보고서이다

1961년 7월 20일 기공(起工)되어, 1963년 3월 13일 준공이 이루어졌다

육축부터 문루까지 숭례문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체 · 수리가 진행되었으며, 당시 공사비는 144,700,000원 이었다

 

 

 

 

경신팔십년약사(儆新八十年略史) / 1966년

경신학교 개교 8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약사이다

1886년 설립된 경신학교는 서울 정동 · 경기도 양주 · 부산 등을 거쳐 1955년 현 위치로 이전하고 교사를 신축하였다

신축 과정에서 한양도성의 일부를 훼손하고 성돌(城石)을 축대의 재료로 이용하여 논란이 되었다

 

 

 

 

경신학교 졸업앨범 / 1969년

1968년 경신중학교 제62회 졸업기념 사진첩이다

학생들 단체사진의 배경으로 보이는 담장은 아래쪽 돌의 모양을 볼 때 훼손된 한양도성 성벽의 흔적 혹은 성돌을 사용해 쌓은 축대로 추정된다

 

 

 

 

총력안보의 상징이 된 도성

1962년 1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숭례문은 국보 · 흥인지문은 보물 · 한양도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한동안 도성의 훼손은 지속되었다

한양도성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울까지 침투하여 백악 성벽 주변에서 국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정부는 이 사건 직후 숙정문을 보수했으며

1974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한양도성 전 구간을 복원하여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 자료로 삼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에 서울성곽복원위원회와 서울성곽 목원사업추진본부가 구성되어

멸실된 구간의 성벽을 새로 쌓고,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1982년까지 9.7km를 새로 쌓았으나, 성벽 뒷채움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오히려 한양도성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시정사진 보관 봉투 / 1970년대 · 한양도성 복원공사 사진 / 1970년대

서울시 문화공보실에서 촬영한 1970년대 한양도성 복원공사 모습 사진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서울성곽 정화사업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도시의 정체성 찾기

1990년대 이후 민주화와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도성을 역사도시 서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구성요소로 대하는 태도가 확산되었다

서울시는 1991년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 과정에서 봉수대 1개소를 복원하였고, 1994년에는 혜화문을 새로 지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옛 도성 전체를 다시 잇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는 구상 아래

2012년까지 멸실되거나 무너진 구간의 성벽 2.3km를 새로 쌓거나 덧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재료와 기술 등 여러 면에서 전통적인 축성 방법을 따르지 않아 문화유산의 진정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2년 서울시는 한양도성도감을 설치하여 유네스코 기준에 맞춰 진정성을 우선하는 새 보존 관리계획을 수립 · 시행하도록 했다

더불어 한양도성연구소와 한양도성박물관을 신설하여 도성에 대한 연구 · 홍보 · 교육을 강화했다

 

 

 

 

도성을 다시 쌓은 사람들

1970년대 서울성곽 정화사업을 시작으로 한양도성 보수 · 복원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한양도성의 보수 · 복원에는 초기 사업 계획을 수립 · 추진하는 담당 공무원부터 자문위원 · 건축가 · 석수 · 목수 · 와공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하였다

국가 및 서울시는 보수 복원을 위한 기본 계획 및 실행 계획을 수립하고

자격을 갖춘 문화재 전문 업체의 석수가 석재의 채취 · 운반 · 가공 · 성곽 쌓기를 담당하였다

성문과 문루 공사에는 목재를 가공하는 목수와 기와를 설치하는 와공 등이 참여하였다

이 밖에도 보수 · 복원 공사를 감독하는 현장 감독관과 문화재 전문위원이 자문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및 기술자가 한양도성의 보수 · 복원 사업을 수행하였다

 

 

 

 

혜화문(惠化門) 현판

 

 

 

 

혜화문 정면도

 

 

 

 

흥인지문 장식기와

조선시대에는 주요 건물의 지붕 추녀마루 위에 용두(龍頭)와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한 잡상(雜像)을 올려놓았다

이는 화재를 막고 잡귀로부터 건물을 보호한다는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무 건물에나 쓸 수 없었으며, 잡상의 숫자가 많을 수록 건물의 등급이 높았다

흥인지문에는 상층 9개 · 하층 8개의 잡상이 있는데

상층의 경우 대당사부 · 손행자 · 저팔계 · 사화상 · 이귀박 · 이구룡 · 마화상 · 삼살보살 · 천산갑의 순으로 잡상을 세우고 그 다음 용두를 배치하였다

흥인지문 보수 · 정비 과정에서 수습된 잡상은 마화상과 사살보살을 제외한 7종류이다

 

 

 

 

시민에게 열린 도성

1993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서울 침투 이후 25년 만에 인왕산 성벽 주변 지역에 대한 민간인 출입 금지 조치가 해체되었다

2007년에는 숙정문과 백악 주변 성벽도 민간인에게 개방되었다

이로써 서울 시민들은 한양도성 전 구간을 둘러보며 옛 순성놀이의 정취를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간수문을 비롯한 성곽 유구가

2013년에는 회현동 남쪽 기슭에서 성벽의 판축과 기초부가 양호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를 토대로 장소별 · 시기별 축성 기법의 차이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었다

한양도성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한양도성문화제가 열린다

한편 해방 이후 성벽 주변에 형성된 마을들도 옛 성벽의 현대적 이용 사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파악하여

서울시와 마을주민들이 함께 바람직한 보존과 관리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땅속에서 찾아낸 도성

 

 

 

 

돌 거북(龜形 石獸) / 조선 후기

오간수문(五間水門) 물가름돌 위에 설치되었던 거북 모양의 석수(石獸)이다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물가름돌은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물릐 압력으로부터 수문(水門) 통수부(通水部)의 간벽(間壁)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오간수문에는 총 4개가 설치되었고 좌우 양쪽 끝의 물가름돌 위에 돌 거북을 하나씩 두었다

 

 

 

 

이간수문 이음쇠 / 조선시대

이간수문 홍예석(虹霓石)의 연결부에 사용된 철제 이음쇠이다

동대문운동장 철거 후 2008년에 실시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 파크 건립부지 내 시 · 발굴조사' 과정에서 수습되었다

통수부를 통해 성 바깥으로 나가는 유수(流水)의 수압에 홍예석이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간수문 주변 성벽

 

 

 

 

금영 명 기와(禁營銘瓦) / 조선 후기 / 반방전(半方塼) / 조선 후기 / 진다구(鎭壇具) / 조선시대

 

 

 

 

땅속에서 찾아낸 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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