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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양도성박물관 상설전시실 2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를 위해 자연지세를 따라

태조 5년(1396) 축조된 한양도성은 600여 년 동안 서울을 지켜온 수도의 성곽이었다

평균 높이 약 5~8m · 전체 길이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일부 훼철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까지 그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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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로

상설전시실 · 기획전시실 · 한양도성 자료실과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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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설전시장 2

조선의 한양 천도와 수도 건설 · 도성의 축조까지 한양도성의 탄생을 비롯한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한양도성의 건설뿐만아니라 성문의 개폐 · 도성의 관리 · 도성 안팎에서 살아온 조선시대 서울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다채롭게 소개하고 있다

 

 

상설전시장 2

 

 

 

 

태조 어진(太祖 御眞) / 1900년 복원 모사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초상화이다

1900년(광무 4) 함경도 영흥(永興) 준원전(濬源殿)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선원전(璿源殿)에 모셔두었던 것으로

한국전쟁 시 부산 피란 때에 화재로 절반 이상이 소실된 상태이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용안(龍顔)의 상당 부분이 사라진 태조의 모습을 바탕으로

1913년 촬영한 준원전 태조 어진의 유리원판 사진과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참조하여 복원 모사한 것이다

노년 모습의 경기전 어진과 달리 준원전의 어진은 장년기의 모습으로, 1900년 모사된 태조 어진 역시 그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붉은 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 태조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모으고 정면을 바라보는 근엄한 자세로 용상 위에 앉아 있다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

1392년 음력 7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무장(武將)과 관료들이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 직후 새 왕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라고 명하였다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왕은 '예로부터 새 왕조를 개창한 뒤에는 반드시 도읍을 옮겼다'고 강경히 주장하여 그 뜻을 관철시켰다

이에 곧바로 천도를 단행하였지만, 궁궐과 성벽이 없는 곳에서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에 곧 개경(開京)으로 환도하였다

이후 2년여간 여러 군데의 후보지를 두고 새 도읍의 적지(適地)를 물색한 끝에 한양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한양은 풍수지리설로 보아 명당일 뿐 아니라 국토의 중앙부에 있어 행정력을 남 · 북 변방에 고루 미칠 수 있으며

지류가 발달한 한강에 면해 조운(漕運)이 편리하였다

1394년(태조 3) 10월 25일, 조선왕조는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도성 건설 공사를 본격화하였다

 

 

 

 

한양 이외의 천도 후보지

 

 

 

 

한양도성의 건설

도성은 그 위치 · 규모 · 형상 · 격식 등을 통해 한 나라의 위상과 통치 이념을 드러내는 공간이자 구조물의 집적체이다

모든 정령(政令)은 도성 안에서 나오며, 중요한 국가 의례는 모두 도성 안에서 이루어지고, 뛰어난 인재와 물자는 도성으로 모여든다

1392년에 개창된 조선왕조가 새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고려의 남경(南京)이었으나 성벽조차 없었던 곳이었다

조선왕조는 이 땅의 자연 형상을 따라 성벽을 쌓고 유교적 이상도시론에 맞추어 내부 공간을 채웠다

도성 안의 도로는 성문을 통해 전국으로 이어졌으며, 도성 남쪽에서 동서로 흐르는 한강은 물자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중엽, 일본과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도성이 함락되고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성벽이 무너지면 다시 쌓고 성문이 퇴락하면 고쳐 지으면서 도성의 기본 구조는 조선왕조 500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한양도(漢陽圖) / 19C

위백규(魏伯珪 1727~1798)의 「환영지(寰瀛誌)」에 실린 지도를 모본(模本)으로 제작한 지도이다

궁궐 · 성곽 · 문루 · 丁(정)자로 표현된 도로와 시전 행랑 등 도성 안 주요 시설들과 성 밖 지형 지물을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여덟 성문을 비롯하여 개천과 도성이 맞닿은 지점에서 수문(水門)을, 남산 정상에서 봉수대를 확인할 수 있다

 

 

 

 

도성 조영의 원리

북한산과 한강 사이의 한양은 고려시대부터 삼한 제일의 명당으로 꼽혔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중반부에서 지맥이 갈라져 서쪽으로 치닫다가 우뚝 솟아 북한산을 이루었으며

그 남쪽의 지맥이 백악(白岳)으로 이어졌다

백악은 남쪽으로 목멱을 마주 보고 동쪽에 낙산 ·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널찍한 평지를 감쌌다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하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목멱 남쪽의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

조선왕조는 내사산(內四山)의 능선에 따라 성벽을 쌓아 도성의 외형과 크기를 정했고

그 내부의 시설 배치는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 · 「고공기(考工記)」의 원리를 준용하였다

백악 앞에 궁궐을 지었고 그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배치했으며

궁궐 앞 대로에는 주요 관청을, 도성 내부를 관통하는 '丁(정)'자형 대로 좌우에는 시전(市廛)을 조성하였다

 

 

 

 

축성연대기 1396년(태조 5)

1차(1396. 1. 9~2. 28) 석성 19,200척(尺) · 토성 40,300척(尺) 건설

2차(1396. 8. 6~9. 24) 흥인지문 부근 축성 · 석성 보수 · 문루 완성

 

 

 

 

도감과 군문

1395년(태조 4) 음력 윤9월, 도성 축조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이 설치되었다

도감(都監)이란 국가적 행사나 공사 등의 한시적 목적 사업을 위해 설치되었다가 일이 끝나면 해체되는 임시 기구에 붙는 이름이었다

고려시대 도감의 일반 직제(職制)대로 구성했으며, 97개로 나뉜 공사 구간 두 곳당 한 명씩 현장감독인 감역(監役)을 배치하였다

1398년(태조 7) 숭례문 역사가 끝난 뒤 해체되었다

세종 때의 공사는 1421년(세종 3) 음력 10월에 설치된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이 관장하였다

도성조축도감 역시 수리와 개축 공사가 끝난 뒤 해체되었고

대신 1426년(세종 8)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 신설되어 성벽 수리와 방화 업무를 겸하였다

숙종 때에는 따로 도감을 설치하지 않고, 각 성벽 구간의 수비를 맡은 군문(軍門)에서 공사를 관장하였다

 

 

 

 

한양도성을 쌓은 사람들

중세 사회에서 양인(良人)은 국가에 조세 · 공물 · 요역(徭役)을 바쳐야 했다

양인은 사대부와 천민(賤民)을 제외한 자유민으로서 국가는 이들의 노동력에 의존해 유지되었다

조세는 수확한 농작물의 일부를 바치는 것 · 공물은 지역 특산물을 바치는 것 · 요역은 노동력을 직접 제공하는 것이다

요역 중 대표적인 것이 군역(軍役)이었지만 · 길을 닦는 치도역 · 성을 쌓는 축성역 등도 종종 부과되었다

한양도성 축성은 전국의 양인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점검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1396년(태조 5)에는 경기 · 충청 · 황해도 양인들은 궁궐 건설을 맡았다

1422년(세종 4)에는 전국에서 322,460명의 양인과 2,211명의 공장(工匠)을 동원하였다

1704년(숙종 30) 이후의 도성 수축공사는 도성 내외 군문(軍門)의 병사들과 임금 노동자인 모군(募軍)들이 담당하였다

 

 

 

 

축성 준비

농경사회에서 토목공사는 농한기인 겨울에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인 공조(工曹)를 동관(冬官)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겨울철 공사를 앞두고 먼저 각 지방관에게 일할 사람들을 뽑아 한양으로 올려 보내게 하였다

그즈음 한양의 호구 수는 수천에 불과하였으니

궁궐 · 종묘 · 사직 등의 영건(營建) 공사와 도성 축성 공사에 동원된 수십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시설이 있을 리 없었다

본격적인 공사에 앞서 수십만 명 인부들의 먹을 거리와 땔거리를 조달하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세종 때에는 네 곳의 구료소도 설치하였다

토석(土石)과 목재는 공사 현장 인근에서 조달하였다

1448년(세종 30) 도성 내외의 산에서 채석(採石)을 일체 금지하였기 때문에

1704년(숙종 30)의 수축 공사 때에는 도성 밖 노원(蘆原)과 주암(舟巖)의 돌을 캐서 썼다

하지만 공사가 지연되고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여

곧 도성 인근의 구준봉(狗蹲峰) 밖 청수동(淸水洞) · 사동(寺洞) · 불천(佛川) 근처 창의문과 혜화문 주변 등으로 채석장을 확대하였다

 

 

 

 

채석 시기 · 채석장

 

 

 

 

북한성도(北漢城圖) / 19C

한양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북한산성을 그린 지도이다

북한산성은 서울의 북쪽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삼각산(북한산)에 위치해 있다

삼각산은 지세가 험준한 천혜의 요새로 고대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도성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711년(숙종 37)에 축조된 것이다

성의 전체 둘레는 12.7km이고 14개의 성문과 유사시에 왕이 거처하는 행궁(行宮) · 군사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19세기 초에 제작된 「동국여도(東國與圖)」에 수록되어 있다

 

 

 

 

도성연융북한합도(都城鍊戎北漢合圖) / 19C

한양도성 · 연융대성(鍊戎大城) · 북한산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그린 지도이다

연융대성은 1754년(영조 30) 탕춘대성을 고쳐 부른 이름으로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산성이다

숙종대에 도성의 수축과 북한산성의 축조가 마무리된 후, 서로 떨어진 두 성 사이를 연결하여 방어능력을 보완하고자 쌓았다

성의 전체 길이는 약 4km이며 창의문 서쪽에서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이어진다

도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성(西城)이라고도 하였다

도성 외곽에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이 축성되면서 한양주변의 도성방어 체제가 완성되었다

 

 

 

 

주례(周禮) / 17C

중국 주나라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戰國時代) 각국의 제도를 기록한 책이다

천(天) · 지(地) · 춘(春) · 하(夏) · 추(秋) · 동(冬)의 6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중 동관(冬官)이 유실되어 한대(漢代)에 보충해 넣은 것이 「고공기」이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의 〈영국(營國)〉편에는 도성 건설제도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는 후대 중국 역대 왕조의 도성건설에 기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도성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 후기

조선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이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증수하여 1530년(중종 25) 편찬하였다

지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 · 경제 · 역사 · 행정 · 군사 · 사회 · 민속 · 예술 · 인물 등

지방 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적 성격을 지닌 백과사전식 서적이다

「경도(京都)」편에는 조선의 건국과 수도 한양의 입지 및 도성 내 주요 시설물 등이 소개되어 있다

 

 

 

 

삼봉집(三峯集)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시문집이다

이 중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進新都八景詩)」는 새로운 수도 한양의 모습을 예찬한 육언절구(六言絶句)의 한시(漢詩)이다

기전산하(畿甸山河) · 도성궁원(都城宮苑) · 열서성공(列署星拱) · 제방기포(諸㧍碁布) · 동문교장(東門敎場) · 서강조박(西江漕泊)

남도행인(南渡行人) · 북교목마(北郊牧馬) 등 8가지 주제로 한양의 풍수지리적인 이점과 굳건히 도성을 방위하는 군사들

그리고 이곳에서의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노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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畿甸山河(기전산하)

沃饒畿甸千里(옥요기전천리) / 기름지고 풍요로운 천 리의 경기 땅​

表裏山河百二(표리산하백이) / 안팎의 산과 물은 천하의 요새지로다

德敎得兼形勢(덕교득겸형세) / 덕교에다 형세마저 아울렀으니

歷年可卜千紀(역년가복천기) / 왕업은 천세기를 길이길이 누리리라

 

 

 

 

숭례문(崇禮門)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정문이었던 숭례문의 모형이다

2008년 화재 이후 2013년 새로 복원한 숭례문을 1:25로 축소하여 제작한 것으로

1907년 이후 철거되고 변형된 좌우측 성곽과 지반의 원형을 가능한 한 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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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은 도성문 가운데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되었다

규격이 크고 잘 가공된 석재로 육축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중층(重層)의 목조 문루를 마련한 형식이다

육축 중앙에 통로를 두어 통행에 편리하도록 하였고, 좌우의 성벽은 외부로 돌출되게 쌓아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육축 위에는 사방으로 둘러친 여장이 있고, 여장 동 · 서측으로 각각 1개소의 협문이 있다

문루는 상 · 하층 모두 정면 5칸 ·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 주상포를 놓고 기둥 사이에는 칸의 크기에 따라 개수를 달리 하여 주간포를 놓은 다포식이고

지붕은 상 · 하층 모두 겹처마이며 용마루 양 끝에 취두를 올린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다

 

 

 

 

시대별 축성방식

태조대의 축성방식(1390s)

산지구간에 쌓은 석성의 경우 편마암과 화강암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자연석에 가까운 돌을 막쌓기(허튼층 쌓기) 하였다

따라서 줄눈이 일정하지 않으며 석재 사이에 틈이 많고 커서 작은 돌을 이용하여 틈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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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의 축성방식(1420s)

성벽의 가장 바깥쪽을 이루는 면석(面石)은 크기와 상관없이 방형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을 쌓고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아 최대한 가로줄눈을 맞춰 빈틈없이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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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의 축성방식(1700s)

면석의 크기가 대체로 규격화되어 가로 · 세로 40~45cm 내외의 거의 정확한 정방형 형태이다

가로 줄눈을 맞춰 견고하게 쌓았고, 지형의 경사도와 상관없이 줄눈은 수평이 되도록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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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대의 축성방식(1800s)

숙종대의 축조방식을 계승했으며, 면석의 크기는 50~60cm 가량이다

앞선 시기의 성벽과 달리 각자성석이 성 안쪽 여장에 위치한다

 

 

 

 

성 쌓기

축성 공사는 성 쌓을 자리의 땅을 다지는 지정(地定)에서 시작된다

바닥이 흙인 경우에는 땅을 깊이 파서 나무 말뚝을 박거나 잔돌을 넣어 다지고, 암반인 경우에는 돌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평평하게 다듬었다

땅이 다져지면 바깥쪽으로 지댓돌을 놓았는데, 빗물에 파여 나가지 않도록 그 앞을 평평한 돌로 덮기도 했다

지댓돌 위에 평평한 자연석이나 네모지게 가공한 돌들을 쌓아 올리고 그 뒤를 잔돌과 흙으로 채우는 과정을 반복하여 체성(體城)을 만들었다

체성 위에는 여장(女墻)을 쌓고 옥개석을 덮었다

축성 공사에서 큰 비중을 점한 것은 돌을 뜨는 채석(採石)과 돌을 다듬는 치석(治石)인데

태조와 세종 때에는 도성 밖 먼 곳에서 돌을 떠 산 능선까지 운반하는 고된 노동이 부가되었다

 

 

 

 

성벽 축조 과정

운반 · 치석(治石) · 터 닦기(地定) · 성돌 쌓기(築石) 등의 모형이 있다

 

 

 

 

석공의 도구

 

 

 

 

석공의 도구

 

 

 

 

성벽

성벽은 몸통인 체성(體城)과 그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으로 구성된다

체성은 다시 바깥쪽의 석축과 안쪽 뒷채움으로 이루어진다

석축은 뒷채움으로 쌓은 흙과 돌의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들여 쌓아 상단부와 하단부 사이에 수직으로 1m 내외의 거리가 있다

여첩(女堞) · 타(垜) · 성가퀴라고도 하는 여장은 성벽에 의지하여 몸을 보호하면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쌓은 시설이다

성벽의 중간 중간을 끊어 요철 모양으로 쌓았는데, 끊어진 곳을 타구(垜口)라 하며 타구와 타구 사이를 첩(堞) 또는 타라 한다

세종대 쌓은 여장의 모양은 알 길이 없으나 숙종대 쌓은 여장은 주력 무기가 총으로 바뀐 것을 반영하여 총구멍을 내었다

이를 총안(銃眼)이라 하는데 수평으로 낸 것은 먼 곳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원총안

아래쪽으로 기울여 낸 것은 가까운 곳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근총안이다

 

 

 

 

도성의 문

성문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특별한 공간과 그 외부 사이의 접촉을 통제하는 시설이다

도성을 빠져 나가는 사람이나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모두 성문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었고, 문을 여닫는 시각은 국가가 통제하였다

한양 도성에는 8개의 문과 2개의 수문(水門)이 있는데, 동 · 서 · 남의의 세 문은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취해

흥인문(興仁門) · 돈의문(敦義門) · 숭례문(崇禮門)이라 이름 지었으나 북문은 풍수지리설의 논리에 따라 숙청문(肅淸門)이라 하였다

흥인문은 후에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었고, 숙청문은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다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석축 위에 2층 문루를 지어 대문(大門) 격식을 갖추었고, 숙정문에는 문루가 없었으며, 나머지 문루는 모두 단층이었다

도성 안에서 발원하여 성 밖으로 흘러나가는 물길을 위해 흥인지문 남족으로 각각 5칸짜리와 2칸짜리 수문을 내었다

 

 

 

 

이간수문(二間水門) 모형

이간수문은 남산 기슭에서 청계천 본류로 흐르던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위에 세워졌던 두 간 구조의 수문이다

1925년 경성운동장 건립으로 성곽과 함께 묻혔다가 2008년 동대문운동장 발굴 과정에서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상부 홍예석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완벽하게 안아 있었으며, 수문 방어를 위해 꽂았던 목재가 하부에서 확인되었다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 형태의 석축이 수문 내 · 외측에 존재한다

 

 

 

 

방어시설

성벽에는 취약지점을 보완하거나 방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시설들이 부가되었다

옹성(甕城)은 성문에 접근한 상대를 에워싸 공격하기 위한 시설로서, 1397년(태조 6) 흥인지문 박에 조성되었다

치성(雉城)은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3면에서 상대를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영조대 광희문 북쪽에 6개를 만들어 어영청에 관리를 맡겼다

곡성(曲城)은 바깥쪽으로 굽은 지형을 활용하여 치성과 같은 기능을 하도록 쌓은 구간으로 백악산 동측과 인왕산 서측 정상부에 있다

성랑(城廊)은 도성 수비군사의 숙소이자 초소로서, 영조대 성벽에서 5보(步) 떨어진 위치에 세웠다

돈의문에서 숙정문에 이르는 훈련도감 담당구간에 24개 · 돈의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금위영 담당구간에 24개

숙정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어영청 담당구간에 27개 등 총 75개가 있었다

 

 

 

 

돈의문(敦義門) 현판

 

 

 

 

도성의 관리와 생활

도성은 왕의 존엄과 나라의 권위를 표상하고 수호하는 시설로서 그에 걸맞는 권위를 지녀야 했다

세종대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성벽을 따라 안팎으로 순심로(巡審路)를 내었는데

군사들이 매일 이 길을 다니며 이상 유무를 관찰하고 이상이 발견되면 담당 관서에 알려 보수하게 했다

왕과 외국 사신들이 자주 드나드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특히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었으며, 문루는 화재 감시용 망루 역할도 했다

도성은 서울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직접 강력히 규제했을 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백성에게도 상징족, 실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울 주민들은 도성 문이 여닫히는 시각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했으며, 매일 성벽을 보고 살았다

영조대 「수성절목(守城節目)」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든 도성민에게 유사시 달려가 지켜야 할 성벽 구간이 할당되었다

지방에서 상경(上京)하는 사람들은 성벽과 성문을 보고 서울을 인지했다

 

 

 

 

도성의 안과 밖 · 《동국여도 도성도(東國與圖 都城圖)》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도성 안의 호수는 1만 7천 15호, 성벽 바깥 10리 이내인 성저십리(城底十里)의 호수는 1천 7백 79호였다

성저십리의 면적이 도성 안보다 5배 이상 넓었으나 인구는 1/10에 불과했다

성저십리의 행정도 한성부가 담당했지만, 성벽은 그 안과 팎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누었다

도성 안은 왕실과 국가의 존립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도성 주민은 조세 · 공물 · 요역을 모두 면제받았다

대신 도성 안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국가의 지휘에 따라 일상생활을 조직할 의무를 졌다

성문이 닫히면 도성 안에서는 남자들의 통행이 금지되었고, 문루에서 화재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불을 끄러 나와야 했다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거나 군인  · 공장(工匠)으로 불려올 때, 혹은 도성 안 사람들의 생활용품을 공급할 때나 도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성이 경계선의 기능을 잃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성안에 산다」는 말에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한성부의 도성 관리

조선왕조는 도성을 쌓은 후 그 안을 한성부(漢城府)라 이름 지었다

한성부는 새 수도의 행정구역인 동시에 도성 안과 성저십리의 행정을 관할하는 정이품(正二品)관청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한성부는 호구대장 작성 · 시전(市廛) 관리 · 범죄 단속 · 산과 하천의 관리 · 도로 정비 등 일반적인 행정업무 외에

형사재판 업무까지 담당하여 사헌부(司憲府) · 형조(刑曹)와 함께 삼법사(三法司)로 불렸다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내에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방(六房)을 두어 분담 시켰다

한양도성과 관련해서는 성벽 주변을 순찰하고 내사산의 임야를 관리했으며, 징을 쳐서 성문 게폐 시각을 알리는 좌경(坐更) 업무를 담당했다

한성부 주민들에게 도성 보수를 위한 방역(坊役)을 부과하는 것도 한성부가 맡은 일이다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 1861년

김정호(金正浩 · 1804~1866 추정)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수록된 지도이다

한성부의 행정구역인 5부 전체를 그린 것으로 내사산(內四山)을 비롯하여 삼각산(三角山) · 한강 · 중랑천과 난지도까지 표현되어 있다

 

 

 

 

도성도(都城圖)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가 제작한 《동여도(東輿圖)》에 수록된 한양 지도이다

도성 안의 지명과 궁궐 · 다리 · 하천 등 주요 지리정보를 묘사하고 있다

 

 

 

 

호패(號牌) / 조선시대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발급되었던 패찰이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재질과 기재 사항도 달랐다

보통 앞면에는 이름 · 출생년도 · 과거에 합격한 시기와 과목 · 벼슬에 들어간 연도 등을 적고 · 뒷면에는 호패 제작연도를 적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 / 1785년

1785년(정조 9)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속대전(續大典)」 및 그 뒤의 법령을 통합하여 편찬한 통일 법전이다

「대전통편」의 편찬으로 「경국대전」 이후 300년 만에 새로운 통일법전을 이룩하였다

 

 

 

 

도성의 관리와 운영

더구나 도성의 누십만(累十萬)의 사서(士庶)들은 바로 옛날에 애휼(愛恤)하던 백성이니, 어찌 차마 버리고 홀로 갈 수가 있겠는가?

이것으로써 생각을 한다면 모든 백성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한다고 할 수가 있다

이번 이 하교의 의도는 실상 백성을 위한 것이다

지금 비록 원기와 정신이 피곤하지만 도성을 지키려는 뜻은 저 푸른 하늘에 절정할 수 있으니

설혹 이런 일이 있다면 내가 먼저 기운을 내서 성 위의 담에 올라가 백성을 위할 것이다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

 

 

 

 

19세기 한양도성

1865년(고종 2)에 시작된 경복궁 중건 공사가 마무리되고 흥인지문이 개건(改建) 되는 등, 수도 한양의 면모가 일신된 1872년 한양도성의 모습이다

1863년 즉위한 고종(高宗)은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사업을 벌였고

종묘 · 종친부 · 6조 이하 각 관서와 도성의 성문 등을 수축(修築)하였다

 

 

 

 

도성삼군문분야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 / 1751년

도성 순라는 도둑과 화재를 방지하고, 성문의 개폐 상태와 수문군의 수직(守直) 여부를 살피며

시설물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궁궐과 도성 둘레를 순찰하는 것을 순라(巡邏)라 했다

세종대에 도성을 수축하면서 성벽 안팎에 순찰을 위한 길도 만들었다

조선 초기에는 순청(巡廳)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오위(五衛)에서 군사를 보내 순찰하게 했다

임진왜란 이후 삼군문이 도성 수비를 전담하게 되면서 순찰도 삼군문과 포도청이 나누어 맡았다

좌우 양 포도청은 매일 밤 도선 내외를 순찰했고, 삼군문은 날짜를 나누어 돌아가며 순찰했다

순찰 부대를 패(牌)라 했는데, 각 패는 패장(牌將) 1명에 군사 6~12명으로 구성되었다

순라군은 모두 군호(軍號)를 받았으며, 순찰하는 패가 서로 만났을 때 군호를 물어 통하지 않으면 통행금지 위반자로 취급되어 처벌받았다

 

 

 

 

성곽 수리

조선 전기에는 성곽에 무너진 구간이 생길 경우 지방 군사를 동원하여 수리했다

그러나 숙종대 도성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이후로는 성문과 성곽 수리도 삼군문에서 책임졌다

각 군문은 순찰 도중 성벽이 무너진 구간을 발견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왕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왕은 먼저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무너진 성벽 주변에 울타리를 치게 하고 관할 군문에 파수(把守)와 수리공사를 지시했다

관할 군문에서는 병사를 현장에 보내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돌아가며 수직하게 하는 한편, 공장(工匠)들을 모집하여 일을 맡겼다

공장들에게는 맡은 구간의 길이에 따라 보수를 지급했다. 체성 공사가 마무리되면 군병들을 철수시키고 여장을 쌓았다

첫 보고일로부터 여장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대략 2개월의 시일이 걸렸다

 

 

 

 

성문의 개폐

성문을 닫는 시각을 인정(人定) · 여는 시각을 파루(罷漏)라 했다

인정은 초경(初更) 3점 · 파루는 오경(五更) 3점이었는데

관상감(觀象監)에서 매일 시각을 측정하여 알리면 종루에서 인정에는 28번 · 파루에는 33번의 종을 쳤다

28번은 28수(宿)의 별자리에 · 33번은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33천(天)에 고하는 의미였다

성문이 닫힘과 동시에 도성 안에서는 남자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문의 개폐를 보류하거나 폐문 시간에 문을 열려면 부험(符驗)이라는 허가증을 제시해야 했다

성문을 여닫는 일은 각 문을 지키는 수문군(守門軍)이 맡았다

조선 초기에는 숭례문 · 흥인지문 · 돈의문 · 혜화문은 오위(五衛) 소속의 호군(護軍)이 맡고

나머지 문들은 사직(司直) 이하 무관들이 보병을 거느리고 지켰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삼군문에서 맡았다

 

 

 

 

성문 출입

왕이 성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능행(陵幸)이 대부분이었는데, 능의 위치에 따라 숭례문과 흥인지문 · 돈의문을 주로 사용하였다

중국 사시을 맞이할 때에는 돈의문과 숭례문을 이용했고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지내거나 동교(東郊)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할 때에는 창의문과 혜화문으로 드나들었다

중국 사신들은 숭례문과 돈의문 · 여진족 사신들은 혜화문을 이용했다

국장(國葬) 때 대여(대大輿)는 숭례문 · 흥인지문 · 돈의문을 통과했다. 일반 신하와 백성들의 상여는 소의문과 광희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다

도성 안에서 소비되는 물자는 대부분 성 밖에서 조달되어야 했기 때문에 성문으로는 우마차도 빈번히 드나들었다

도성 상업이 발달한 19세기에는 매일 새벽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우마차 행렬이 수백 대씩이었다

 

 

 

 

육모방망이 / 조선시대

조선시대 순라군(巡邏軍)이 지니고 다녔던 치안용 타격기이다

재질이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육모 또는 팔모로 다듬었다

 

 

 

 

조족등(照足燈) / 조선시대

조선시대 순라군(巡邏軍)이 야간 순찰할 때 길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등기구이다

조족등이란 명칭은 발 아래를 비출 수 있도록 고안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부험(符驗) / 조선시대

원형의 목재 패로 조선 초기에는 양면에 전서(篆書)로 신부(信符)라 쓰고, 도장을 찍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한 면에 해당 문의 이름과 시간을 새겼다

부험은 두 쪽으로 나누어 개문좌부(開門左符)는 궁중에 비치하고 개문우부(開門右符)는 수문장에게 교부하였는데

유사시 궁중에 보관된 개문좌부를 내려 수문장이 가진 우부와 서로 맞추어 보고 문을 열 수 있게 하였다

 

 

 

 

경국대전 병전(經國大典 兵典) / 1603

조선시대 기본법전으로, 건국 초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원전(原典)」과 「속전(續典)」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해 만든 조선시대 두 번째 통일 법전이다

*

개방하는 시간이 아닌데 도성 문을 열려면 궁궐 대내에서 개문좌부(開門左符)를 내려주어야 한다

궁성문은 표신(標信)을 확인한 다음 열고 닫는다

 

 

 

 

대전회통(大典會通) / 19C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조선왕조 최후의 육전 체제 통일법전이다

조선왕조 여러 왕대에 걸쳐 시행된 모든 규정이 집대성된 법전이라  할 수 있다

 

 

 

 

도성과 도성민의 놀이와 삶 / 놀이와 예술

내사산의 아름다운 풍광과 한 몸이 된 한양도성은 놀이와 문예활동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도성 안쪽 40리에 달하는 성벽 길을 하루 만에 돌며 경치를 감상하는 순성놀이는 봄과 여름철 서울 사람들이 즐긴 대표적인 놀이였다

성벽 주변에는 산과 물이 잘 어우러진 명승지가 많아 시인 단체인 시사(詩社)들의 모임도 자주 열렸다

시사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성벽 주변의 풍광을 소재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시첩(詩帖)과 화첩(畵帖)에 담아 공유했다

활쏘기 시합인 편사(便射)도 조선시대 양반들이 자주 한 운동이자 놀이였는데

성벽 인근에는 인왕산 백호정(白虎亭)과 등룡정(登龍亭) · 남산 석호정(石虎亭) 등 활쏘기를 위한 정자들이 여럿 있었다

 

 

 

 

정선의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 등의 그림과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가 전시되어 있다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 / 1731년 · 정선

정선의 이웃이자 친구인 이춘제(李春躋 1692~1761)가 청나라로 가는 사신의 부사가 되어 떠나는 것을 송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왼쪽이 무악산(毋岳山) · 오른쪽이 인왕산이며 인왕산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 성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창의문(彰義門) / 18C · 정선

도성 안에서 창의문을 바라보고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의문〉과 유사한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근경(近景)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 속 창의문에 문루가 없으므로 창의문이 중건된 1741년(영조 17) 이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정보월도(西庭步月圖) / 18C · 정선

동자를 거느리고 달밤을 거니는 봄날의 정취를 그렸다

인왕산 서쪽 자락으로 보이는 바위산이 있고, 그 옆으로 한양도성 성벽이 이어져 있다

도성 방어를 위해 성벽 일부분을 돌출시킨 인왕산 곡성(曲城)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동문조도(東門祖圖) / 18C · 정선

동문조도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술자리를 베풀고 작별하며 보내는 일, 즉 동문(東門)에서의 작별이라는 의미이다

낙산 자락에서 내려온 성벽과 흥인지문 · 그 오른쪽으로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성벽이 보인다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 1760년

1760년(영조 36)에 실시된 청계천 준천(濬川)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기록화첩의 일부이다

오간수문 왼쪽으로 이어진 성벽 끝에서 중층 문루를 지닌 흥인지문의 모습이 확인된다

 

 

 

 

의례와 신앙

성문과 그 주변은 국가적 의례의 장소이기도 했다

비가 너무 내려 수재(水災)가 발생했거나 예상될 때 지내는 국가 제사가 영제(榮祭)인데

그 장소가 숭례문 · 흥인지문 · 돈의문 · 숙정문의 네 문이어서 사문영제(四門榮祭)라고도 했다

반대로 날이 오래 가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이때에는 평소 닫아두었던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다

음력 섣달그믐에는 궁중에서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나례(儺禮)를 행했는데

여기에 가면을 쓴 관원들이 궁중의 액(厄)을 모두 모아 성문 밖으로 몰아내는 의식이 포함되었다

도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에는 도성 문루에서 수괴(首魁)의 머리를 베어 왕에게 올리는 헌괵례(獻馘禮)를 치렀다

백악 정상의 백악신사(白岳神祠)와 목멱 정상의 목멱신사(木覓神祠)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초제(醮祭)가 거행되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 1830년

수도 한양의 역사와 풍속을 자세히 기록한 부지(附誌)이다

저자와 간행연대가 미상이나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아들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정조 때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경지략 제1권 「천문(天文)」에는 봄과 여름에 사람들이 짝을 지어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는 순성(巡城) 놀이에 대해 설명하였다

 

 

 

 

경도잡지(京都雜志) / 조선 후기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지은 세시풍속지(歲時風俗志)이다

서울의 문물제도와 풍속 · 연중행사 등을 기록하였다

완성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도잡니 「유상(遊賞)」에는 도성을 한 바퀴 돌던 순성(巡城)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꼭두(木偶) / 조선시대

상여의 난간에 세우는 장식물이다

다양한 모양의 꼭두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는 상징물로

죽은 사람을 안전하게 저승으로 인도하거나 저승에서의 새로운 삶을 소망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꼭두(木偶)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 무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광희문이나 소의문으로 상여를 메고 나가 도성 밖에서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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