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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동구릉

동구릉이란 도성 동쪽에 있는 9개의 능이란 뜻으로 약 450여 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을 시작으로 현릉 · 목릉 · 숭릉 · 휘릉 · 혜릉 · 원릉 · 경릉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능이 조성될 때마다 동오릉(東五陵) · 동칠릉(東七陵)이라 불렀다가 1855년(철종 6) 수릉이 마지막으로 옮겨지면서 동구릉이 되었다

 

 

구리 동구릉 안내판

매표소 앞이다

 

 

 

 

동구릉 역사문화관

조선왕릉 분포도 · 조선왕릉 공간 구성 · 동구릉 · 동구릉 석물 변화의 안내판이 있다

 

 

 

 

조선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초기에는 석실, 후기엔 회격으로 조성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동구릉 석물 변화

조선왕릉의 봉분 주위에는 다양한 석물이 세워졌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며, 석호와 석양은 바깥의 나쁜 기운으로부터 왕릉을 지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5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왕릉을 지켰지만 크기와 모양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다

1408년 만들어진 건원릉 석물부터 1846년 수릉의 석물까지, 동구릉에서는 5세기에 걸친 왕릉의 석물 변화를 모두 볼 수 있다

왕릉에 두는 석물의 크기는 조선 전기 「국조오례의」에서 정하고 있었으나, 계속 변화했다

조선 중기까지 왕릉 석물은 계속 커지는 경향을 보였으나

왕릉 석물을 간소하게 만들고자 한 숙종과 영조의 뜻에 따라 18세기에는 왕릉 석물 크기가 작아진다

그러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후에 융릉) 조성을 계기로 다시 커지고 조각도 섬세하고 화려해 진다

이는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그대로 이어져 대한제국 시기의 황제릉인 홍릉과 유릉에는 크기가 3m가 넘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놓였다

 

 

 

 

동구릉 석물 부재

1970년대 해체된 동구릉 외금천교 부재와 동구릉 내 왕릉을 조성하고 보수하거나 옮기는 과정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 석물들이다

외금천교 부재의 일부는 홍예 모양을 복원하여 전시하였다

다른 석물들은 난간석 · 귀틀석 · 은장석 · 주초석 · 장대석 등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출처와 쓰임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동구릉 외금천교 항공사진

동구릉 입구에는 원래 신성한 왕릉의 공간과 속세 공간을 구별하는 물길인 금천이 흐르고

두 영역을 이어주는 돌다리인 금천교와 물길이 흘러드는 연못인 연지가 있었다

동구릉 내 각 왕릉 진입공간의 금천교 및 연지와 구별하여 이를 외금천교, 외연지라고 한다

외금천교와 외연지의 모습은 1975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나 이후 동구릉 입구를 지나는 43번 국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

이해를 돕기 위해 1914년 지적도와 2019년(현재) 항공사진을 중첩한 연출된 사진이다

 

 

 

 

홍살문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리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재실(齋室) · 향랑청(행랑채)

재실은 평상시 영(令 · 종5품) 또는 참봉(參奉 · 종9품) 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며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향대청(향안청) · 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자인 영(令 · 종5품)과 참봉(參奉 · 종9품)이 집무를 보던 곳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향대청은 제향에 쓰일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이다

 

 

 

 

행랑청(행랑채)

대문 · 하인방 · 창고 등이 있다

 

 

 

 

수릉(綏陵)

추존 문조(1809~1830)와 신정왕후(1808~1890)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22세에 요절하였으나,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대되고 고종 때 문조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는 1834년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고,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하였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 중 ·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인석이 하계에는 무인석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 · 무인석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수릉 비각(綏陵 碑閣)

 

 

 

 

수릉 표석(綏陵 表石)

조선국 익종대왕 수릉 신정왕후 부우

(朝鮮國 翼宗大王 綏陵 神貞王后 祔右) 

 

 

 

 

대한 문조익황제 수릉 신정익황후 부우

(大韓 文祖翼皇帝 綏陵 神貞翼皇后 附右)

 

 

 

 

현릉(顯陵)

조선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문종(1414~1452)은 제4대 세종의 맏아들로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나 2년만인 39세에 승하하였다

현덕왕후는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갔다 세자의 후궁이 되었다

1437년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올랐으며 1441년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떴다

사후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추봉되었다

 

 

 

 

현릉(顯陵)

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 5월에 승하하여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 해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 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조선 제5대 문종(왼쪽)과 현덕왕후(오른쪽)의 동원이강릉이다

 

 

 

 

현릉 표석(顯陵 表石)

조선국 문종대왕 현릉 현덕왕후 부좌강

(朝鮮國 文宗大王 顯陵 顯德王后 附左岡)

 

 

 

 

건원릉 금천교(健元陵 禁川橋)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다

 

 

 

 

건원릉 판위(健元陵版位)

왕이 능이 있는 구역에 들어가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공간이다

 

 

 

 

건원릉 정자각(健元陵 丁字閣)

동구릉에는 보물로 지정된 건원릉 · 숭릉 · 목릉 정자각 3채가 있다

그 중 1408년 세워진 태조 건원릉 정자각은 조선시대 정자각의 모범이 되는 기준이다

정자각의 기본 형태는 태조 건원릉 정자각을 따른 정면 3칸, 배위청 2칸 총 5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정자각은 대부분 5칸이지만 15세기부터는 규모를 늘려 8칸의 정자각을 세우기도 했다

8칸의 정자각에는 대개 팔작지붕을 올렸는데, 현재 숭릉의 정자각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8칸이지만 맞배지붕 정자각은 17세기 후반에 만든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중후반부터는 다시 맞배지붕을 올린 5칸의 정자각을 주로 지었다

 

 

 

 

소전대(燒錢臺) · 망예위(望瘞位)

제의식은 손을 씻고 헌작함으로써 물에서 시작하여 소전대(후에 예감)에서 축문을 불사름으로써 불로 끝난다

또한 제의식도 수방(水方)인 동방에서 시작하여 화방(火方)인 서방에서 끝난다

또 축문을 태울 때 이를 지켜 보던 일을 망예라 하고 그 자리를 망예위라 한다

 

 

 

 

배위(拜位)

건원릉은 정자각 위 오른편에 배위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는 조선왕릉 중 유일한 것이다

조선의 왕릉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망예위 보다 작은 크기다

 

 

 

 

건원릉(健元陵)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준다

*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묻히기 원했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태조 건원릉 비각(太祖 健元陵 碑閣)

왕릉에 세워진 비석에는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신도비에는 왕의 업적을 나열한 글인 서문과 업적을 찬양하는 노래글을 새겼다

신도비는 북한에 있는 환조(태조 아버지) 정릉과 태조의 첫 번째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을 시작으로

태조 건원릉 · 태종 헌릉 · 세종 영릉(英陵)까지 조선 초기에만 만들었다

5대 문종의 현릉을 만들 때부터는 왕의 업적은 실록에 기록되니 신도비가 필요 없다 하여 세우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왕릉에 신도비 대신 표수지석(표석)을 세웠다

표석 앞면에는 왕릉에 묻힌 왕이나 왕비, 능의 이름을 적고 뒷면에는 생년월일과 재위기간, 왕릉을 만든 날과 위치 등을 간략히 적었다

표석은 효종의 영릉(寧陵)에 처음 세웠고 이후 모든 능에는 표석을 세웠다

표석은 능 주인의 신분이 바뀌면 추가로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

건원릉 비각 안에는 왼쪽 신도비 · 오른쪽 표석이 세워져 있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太祖 健元陵 神道碑)

태조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409년(태종 9)에 세웠다

앞면에 태조의 생애와 업적, 조선 건국 이야기 등을, 뒷면에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명단을 적었다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大韓 太祖 高皇帝 健元陵) 표석

조선 멸망 10년 전 광무 4년(1900 · 고종 37년)에 세워진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 표석이다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이 1899년에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면서 이듬해 세운 것으로

앞면에는 고종이 직접 쓴 글씨로 「대한 태조 고황제 건원릉(大韓 太祖 高皇帝 健元陵)」이라 쓰여 있다

이 표석은 다른 능에 있는 표석과 달리 나란히 서 있는 신도비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점이 특징이다

*

조선의 흥망이 두 비 사이에 있는 듯하여 묘한 감회에 젖는다

 

 

 

 

목릉(穆陵)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동원이강릉이다

 

 

 

 

목릉(穆陵)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에 선조의 능, 가운데 언덕에 의인왕후의 능, 오른쪽 언덕에 인목왕후의 능이 있다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선조 때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 이 때를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부르기도 한다

1608년 세워진 선조와 의인왕후 · 인목왕후를 모신 목릉 정자각은 다포형식의 건물로 보물이다

*

정자각과 비각 사이 어정이 있다

 

 

 

 

목릉(穆陵)

난간석과 혼유석 · 망주석 1쌍 ·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혼유석(魂遊石)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고 혼유석의 무게 7, 8톤에 달해 건릉 조성 당시 혼유석을 옮기는 데 1,000명이나 동원됐다고 한다

그 혼유석 밑에는 박석이 있고 그 아래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결국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는 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도 9대 성종 능인 선릉과 11대 중종 능인 정릉을 훼손했을 뿐이다

 

 

 

 

망주석 ·  문인석 · 무인석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 중 ·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초계 망주석 · 중계 문인석 · 하계 무인석이 배치되었다

 

 

 

 

병풍석(屛風石)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사람 머리 위에 양의 모양이 뚜렸하다

 

 

 

 

인목왕후릉(仁穆王后陵)

목릉 건너편에 있는 능으로 석물의 조각이 생동감이 있다

 

 

 

 

목릉  정자각(보물 제1743호)

 

 

 

 

선조왕릉 · 의인왕후릉(懿仁王后陵)

샘이 솟는 물길 위에 다리가 있다

 

 

 

 

돌다리

물속을 보니 송사리들이 살고 있다

 

 

 

 

목릉 수복방

목릉의 물길 너머로 있다 

 

 

 

 

목릉 표석(穆陵 表石)

조선국 선조대왕 목릉 의인왕후 부중강 인목왕후 부좌강

(朝鮮國 宣祖大王 穆陵 懿仁王后 附中岡 仁穆王后 附左岡)

 

 

 

 

목릉 수랏간

 

 

 

 

휘릉(徽陵)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 16)에 왕비가 되었고 165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되었다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현종 대에 있었던 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장 기간 중,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을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기도 하였다

 

 

 

 

휘릉(徽陵)

 

 

 

 

휘릉 혼유석(徽陵 魂遊石)

잡귀를 막는 귀면(鬼面)을 새긴 둥근 북을 닮은 고석(鼓石) 5개가 받치고 있다

 태조의 건원릉과 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의 고석이 5개다

 

 

 

 

휘릉 정자각(徽陵 丁字閣)

정전 양 옆에 익랑을 덧붙인 것이 특이하다

 

 

 

 

휘릉 비각(徽陵 碑閣)

 

 

 

 

휘릉 표석(徽陵 表石)

조선국 장렬왕후 휘릉(朝鮮國 莊烈王后 徽陵)

 

 

 

 

원릉(元陵)

조선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조선 최장수 왕으로 보령이 83세에 이르며 재위기간이 52년이다

정순왕후는 원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5세의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정되었다

*

병풍석은 세우지 않고 난간석만 세운 쌍릉이다

 

 

 

 

문인석(文人石) · 무인석(武人石)

형상이 간결해지고 크기 또한 작아져 유약해 보인다

 

 

 

 

장명등(長明燈)

이 때부터 연꽃이 없어지고 모란이 나타났다

 

 

 

 

원릉 비각(元陵 碑閣)

 

 

 

 

원릉 표석(元陵 表石)

조선국 영종대왕 원릉(朝鮮國 英宗大王 元陵)

영조는 세상을 떠난 후 첫 묘호(廟號)를 영종이라 하였다가, 1890년(고종 27)에 묘호를 영조로 고쳤다

 

 

 

 

원릉 표석(元陵 表石)

조선국 영조대왕 원릉(朝鮮國 英祖大王 元陵)

영조는 세상을 떠난 후 첫 묘호(廟號)를 영종이라 하였다가, 1890년(고종 27)에 묘호를 영조로 고쳤다

 

 

 

 

원릉 표석(元陵 表石)

조선국 정순왕후 부좌(朝鮮國 貞純王后 附左)

 

 

 

 

경릉(景陵)

조선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능이다

조선왕릉 유일의 삼연릉(三連陵)이다

 

 

 

 

제상(祭床) · 향상(香床) · 축상(祝床)

정자각 안이다

 

 

 

 

예감(瘞坎)

제향을 지낼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경릉 비각

 

 

 

 

경릉 표석(景陵 表石)

대한 헌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

(大韓 憲宗成皇帝 景陵 孝顯成皇后 附左 孝定成皇后 附左)

 

 

 

 

동구릉 석조 유구

혜릉 화장실 옆이다

 

 

 

 

혜릉(惠陵)

혜릉은 조선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1696년 왕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 1718년(숙종 44)에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모셔졌다

이후 1720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의왕후로 추존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다

1722년(경종 2)에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을 새로 세웠다

혜릉의 석물은 명릉(숙종과 인현왕후)의 제도에 따라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사람의 크기와 같은 것이 특징이다

 

 

 

 

혜릉 표석(惠陵 表石)

조선국 단의왕후 혜릉(朝鮮國 端懿王后 惠陵)

 

 

 

 

숭릉(崇陵)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현종은 제17대 효종의 맏아들로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조선 왕 중 유일하게 타국 청나라에서 태여났다

왕위에 오른 후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 싸움이 치열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명성왕후는 1659년 왕비가 되었다. 현종 사이에 1남(숙종)과 3녀를 두었다

 

 

 

 

숭릉 표석(崇陵 表石)

조선국 현종대왕 숭릉 명성왕후 부좌(朝鮮國 顯宗大王 崇陵 明聖王后 附左)

 

 

 

 

숭릉 정자각

1674년 세워진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 정자각은 남아 있는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 형식으로 지어진 정자각으로 보물이다

다포형식은 지붕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기둥과 처마 사이에 설치하는 건축부재인 공포를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리는 주심포 형식에 비해 복잡하고 화려하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구릉 석조 유구

 

 

 

 

숭릉 연지

1674년(숙종 즉위) 왕과 왕후의 능을 만들 때의 담당 기관인 산릉도감에서 조성한 연못이다

네모난 형태에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型)으로 네모는 땅을,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는 우주관과 자연관을 담고 있다

이 연지는 처음 조성된 숙종 대부터 영조, 정조, 고종 대까지 연못 둘레의 돌축대를 정비하고 연꽃 종자를 능관에게 주어 심고 기르게 한 기록이 전한다

 

 

 

 

물길 축대 공사중이다

구리역이 시점이자 마침점이지만 GPS는 음식점에서 마쳤다

*

예전에 만든 자료 사진을 사용하였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1.37km, 소요시간 4시간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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