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은 1740년부터 1745년까지 양천현령(현 강서구청장)으로 있었으며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등 기념비적인 불멸의 걸작을 남겼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2009년 4월, 강서구에서 정선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진경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조선시대 양천현아지 인근에 겸재정선미술관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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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제1 · 2기획전시실과 뮤지엄샵 · 2층 겸재정선기념실 · 원화전시실 · 진경문화체험실 · 영상실
3층 양천현아 모형도 · 카페테리아, 〈독서여가〉포토존이 있다
겸재정선미술관
겸재정선기념실
정선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시기별로 정리 해설하고 정선 및 관련 화가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이전에 비해 대상 소재가 광범위하고 다양해졌으며 양식상 한국의 예술적 특징을 담고 있다
출생과 초년시절 / ~ 30대 중엽
정선은 서울 북악산 아래 유린동(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 났다
정선은 사족 출신으로 문인의 교양을 닦았으나 타고난 그림 재능과 이웃에 살던 진경시의 대가 김창흡 등의 영향으로 서화에 매진하게 되었다
정선이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살게 되는 북악산 · 인왕산 일대는 서울 문인문화의 중심지이면서도 풍광이 뛰어나
정선은 일찍부터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다
출생과 초년시절
겸재 정선은 1676년(숙종 2) 음력 1월 3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에서 부친 정시익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여났다
정선은 전라도 광주가 본관으로 5대조 정응규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 · 고조부 정연은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내는 등 명문이었으나
증조부 이후 벼슬을 하지 못해 점차 집안이 쇠락하였다
그러다가 1689년(숙종 15) 14세 때 부친이 52세로 세상을 떠나자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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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출신인 정선이 그림에 뜻을 두게 된 것은 타고난 그림 재능과 어려운 집안 살림
그리고 숙종 15년의 기사환국으로 과거공부에 뜻을 두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정선은 청풍계 부근에 있는 외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년시절 학문과 예술의 성장
초년시절 정선의 학문적 · 예술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같은 동네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던 안동김씨 집안이었다
안동김씨 집안은 조선 후기의 정치와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영의정 김수항의 여섯 아들들은 정치 · 학문 · 예술 면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남 김창집은 나중에 영의정이 되고, 둘째 김창협과 셋째 김창흡은 학문과 문학으로 넷째 김창업은 문학과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이들 중 정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시인으로 조선 후기 문예에 큰 족적을 남긴 삼연(三淵) 김창흡으로 보인다
김창흡은 금강산 · 설악산을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시로 읊어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은 김창흡 문하생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 예술적으로 성장했으며
그중에서도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과는 평생에 걸친 지기가 되어 시화를 서로 교환하였다
겸재 정선 연보
화가로 이름을 떨치다 / 30대 중엽~40대 중엽
정선이 그림을 배울 무렵은 17~18세기 교체기로서 조선시대 회화사상 중기의 절파가 쇠퇴하고
새로이 명말청초의 남종문인화풍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또 윤두서와 조영석 등에 의해 한국적 풍속화가 점차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정선은 새로 들어오는 문인화풍을 공부하는 한편 문사로서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주역」에 능통하기도 했다
정선의 그림 실력은 37세 때인 1712년 금강산 여행에서 그린 《해악전신첩》이 문사들 사이에 유명해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세기 초 화단의 상황과 정선
정선의 성년기에 해당하는 18세기 초엽은 조선회화사에서 중기에서 후기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때는 명나라에서 도입된 절파(浙派)가 쇠퇴하고 명말 동기창 일파에 의해 정립된 남북종화론과 청 초기 문인화풍이 점차 세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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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도 본격적으로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하기 전에 이처럼 문인화풍을 기본으로 하였음은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사계산수도첩》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정선보다 약간 선배인 공재 윤두서와 평생 이웃에서 친하게 지내던 후배 관아재 조영석은
주로 인물풍속화를 통해 새로운 문인화풍을 선도하고 있었다
화명을 떨치다
정선은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진경시의 대가인 이병연과 절친하게 지내고 당시 학예계의 지도자인 김창흡의 문하생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 예술적 교양을 충실하게 쌓았다
정선은 동양 고전 중 어렵기로 손꼽히는 「주역」에도 능통하여 여기에 나오는 「겸괘(謙卦)」에서 자기의 호인 겸재(謙齋)를 따왔다고 한다
그의 호를 통해서 겸손하게 처세하는 대인군자다운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정선은 충실한 학문과 철학을 바탕으로 백악사단(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북한산 · 인왕산 중심의 문화계 인맥)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하양현감 시절 / 46~51세 · 1721~1726
정선은 41세 때인 1716년 관상감의 겸교수(종6품)로 벼슬길에 나간다
이후 46세 때인 1721년부터 1726년까지 만 5년 동안 경상도 대구 근처의 하양현감을 지내게 되는데
비로서 이 시기에 그의 회화발전과 관련된 본격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정선은 경상도 지역의 다양한 명승을 그린 화첩인 《영남첩》 · 《구학첩》을 그렸다
하지만 현재 이 화첩들은 전해지지 않아 그 실체를 알 수 없다
또한 성주 관아의 객사에 있던 정자를 그린〈쌍도정〉과 〈도산서원〉등의 경상도 지역의 명승을 그린 여러 작품들도 하양현감 재직 시절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인왕곡 시절 / 51~58세 · 1727~1733
만 5년의 하양현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한 정선은 이듬해인 1727년
그동안 줄곧 살아온 북악산 아래 유린동에서 인왕곡(현재의 군인아파트 터 옥인동 20번지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정선은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며 남은 여생을 살았다
청하현감 시절 / 58~60세 · 1733~1735년
정선은 58세가 되던 1733년 다시 경상도 청하현감(현재 포항시에 속함)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청하는 동해 바닷가에 있는 고을로, 인근 내연산에는 십이폭포와 유서 깊은 보경사가 있었고
위로는 관동팔경과 통하고 경주나 경상도 지역 여러 명승지는 물론 동해안까지 여행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정선이 답사한 흔적은 내연산 삼용추폭포 바위에 「갑인추 정선(甲寅秋 鄭敾)」이라고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청하에 부임한 이듬해 1734년 가을에 이곳에 들렸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
내금강 · 외금강 · 해금강을 그린 《금강전도》 등의 그림 들이 전시되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서쪽 내금강과 동쪽 외금강 그리고 해금강으로 나누어진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내금강을 전체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당시 한양에서 탐방할 때 먼저 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장안사 / 국립박물관 소장 · 비로봉 / 개인소장 · 금강대 /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전도 / 국보 제217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칠성암(七星庵) / 혜악전신첩 · 1747년(72세) · 간송미술관 소장
시중대 / 국립박물관 소장 · 백천교 / 국립박물관 소장
인왕곡 시절2 / 60~65세 · 1735~1740년
60세 되던 1735년 5월, 모친 밀양 박씨가 92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선은 청하현감을 그만두고 인왕곡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정선은 모친상을 치른 후 62세 때인 1737년 한강을 거슬러 올라 절경이 있는 남한강 상류의 청풍, 단양, 영춘, 영월 등
충청도 사군 지역을 여행하고 《사군첩》을 제작하여 이병연에게 증정한 것으로 보인다
또 같은 해 가을 제작된 대표적인 작품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관동명승첩》이다
이들 그림에는 골산을 묘사한 수직준, 토산을 묘사한 미점준, 그리고 일렁이는 파도, 번잡하지 않고 정돈된 구도 등
겸재 특유의 진경산수화법을 거침없고 장쾌하게 그려내어 정선 진경산수화의 전형적인 면모들이 완성되어 나아간다
서울 인왕산 주변을 소재로한 〈청풍계〉(1739년, 간송미술관) · 〈한양전경〉(1740년) 등에서도 완숙한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양천현령 시절 / 65~70세 · 1740~1745년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더욱 원숙한 경지로 올려놓은 중요한 계기는
그의 나이 65세부터 70세까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부근의 읍치가 있었던 양천의 현령을 지낸 것이다
정선은 만 5년간 양천현령으로 재직하며 이병연과 시화를 교환하고 《경교명승첩》과 같은 기념비적 역작을 남기게 된다
이들 그림에서는 겸재 특유의 힘차고 강한 필묵법이 아닌 한강변의 승경을 부드러운 선묘 · 서정적 선염
그리고 청록색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채색법 등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맛을 보여 주었다
양천현령 시절은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폭과 깊이가 더욱 심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계상정거 · 풍계유택 · 무봉산중 · 인곡정사
국민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이야기
지폐 속 겸재 그림 -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 보물 585호
조선시대 미술사를 전후기로 양분하는 중앙에 우뚝 선 우리나라 최고의 진경산수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역대 고미술 경매 역사상 최고가인 34억에 낙찰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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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발행된 천원권 뒷면에 새겨진 〈계상정거도〉는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중 한 폭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물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그 주변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계상정거(溪上靜居)는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고요히 지내다」는 뜻으로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으로 둘러진 가운데 자리한 암자가 보인다
청풍계 / 간송미술관 소장 ㅣ 부묘도감 / 계희도 개인 소장
자유자재의 경지 · 인왕곡 시절 3
자유자재의 경지
화가로서 드물게 84세까지 장수한 정선은 보통 화가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화풍의 완성과 완성을 너머선 대자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정선은 만 70세에 양천현감을 퇴임한 후, 십여 년 동안 인왕곡에서 여유로운 만년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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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朴淵瀑) / 개인 소장
실경을 재해석하여 조형적으로 변형시키는 진경산수의 시조이자 완성자인 겸재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인왕곡 시절3
만 70세가 되어 양천현령에서 물러난 정선은 인왕곡 집으로 돌아가 84세까지 여유있는 만년을 보냈다
비록 이 시기 동안 1747년에 동생 정유(66세)를 1751년에는 평생을 교유한 이병연(81세)을 먼저 보내는 슬픔도 있었지만
정선 자신은 명예로운 말년을 맞았다
즉 1747년(72세)에는 인원대비(숙종계비 김씨) 회갑 수경으로 종4품으로
1755년(80세)에는 인원대비 칠순 수경으로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2품 이상 3대 추증 법전에 따라 부친과 조부 · 증조부까지 각기 호조참판 · 좌승지 · 사복시정을 추증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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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겸괘(謙卦)에서 자기의 호 겸재(謙齋)를 따서 평생 겸손하고 온화하게 처신하며 예술에만 정진해온 대화가에게 적합한 말년의 명예였다
그러다가 정선은 1759년 3월 24일 8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현 도봉구 쌍문동)에 안장되었다
인왕제색(仁王霽色) / 1751년(76세) · 국보 제216호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계상정거(溪上靜居) / 퇴우이선생진척첩 · 1746년(71세) · 보물 585호 · 개인 소장
경건(勁健) / 사공도시화첩 · 1949년(74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강과 서울
전국(겸재 진경산수화 현장) · 정선 이전과 이후의 진경산수화
정선이 평생에 걸쳐 탐방하고 그림으로 그린 지역들로서 조선팔도를 거의 망라하지만 현재까지 전라도와 제주도지역을 그린 작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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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이전과 이후의 진경산수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실경산수화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정선은 이런 전통의 바탕 위에 18세기 전반에 진경산수화를 확립시켰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그 이전에 비해 소재가 엄청나게 넓고 다양해졌으며, 양식상 한국적 · 예술적 특징을 완비하였다
그래서 그 이전을 실경산수화, 이후를 진경산수화라 부르기도 한다
정선 이후에는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화가가 등장하여 진경산수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계승 발전시켰으나 19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현장 한강과 서울
겸재 정선의 업적
정선 이전과 이후의 진경산수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실경산수화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정선은 이런 전통의 바탕 위에 18세기 전반에 진경산수화를 확립시켰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그 이전에 비해 대상 소재가 엄청나고 넓고 다양해졌으며 양식상 한국적 · 예술적 특징을 완비하였다
그래서 그 이전을 실경산수화, 이후를 진경산수화라 부르기도 한다
정선 이후에는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화가가 등장하여 진경산수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계승 발전시켰으나 19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정선 이전 실경산수화의 전통
고려시대 최고의 화원 이녕은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등 개성 부근의 실경을 그렸다고 한다
조선 초기 대표적 문인화가 강희안은 개성의 〈박연폭포도〉를 그렸고 중기의 김시, 조속 등도 금강산도나 기타 실경을 그렸다
그러나 실제 작품이 전하는 것은 17세기 한시각 · 조세걸 등의 작품이다
또 초기부터 많이 그려진 각종 계회도에도 한강변의 경치를 중심으로 한 실경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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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이후 진경산수화의 계승과 변천
정선의 화풍은 손자 정황 이외에 김희성 · 정충엽 · 장시흥 · 김석신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런데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새롭게 변모 · 발전시킨 사람은 단원 김홍도였다
김홍도는 원근법과 투시법 등 서양화법을 많이 도입하여 진경산수화를 좀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변화시켰다
또 정선이 굳세고 힘찬 화풍을 구사한 데 비해 김홍도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화풍으로 우리나라 진경산수화의 지평을 새롭게 개척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가면 김정희 일파에 의한 청조문인화풍의 유행과 함께 진경산수화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정선의 기타 회화
정선은 진경산수화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종래의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관념산수화도 잘 그렸다
이런 관념산수화는 특정한 실재 경치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 속에 형성된 경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관념산수화의 대표적인 예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있다
소상팔경도는 본래 중국의 특정 지역의 실경산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정선은 진경산수화법으로 소화하여 우리화 해냈다
관념산수화 이외에도 정선은 각종 고사도(故事圖) · 화조도 · 동물화 · 초충화 등도 잘 그렸다
이런 다양한 회화 세계는 정선이 폭넓은 예술 세계와 함께 이면의 균형 잡힌 정서와 철학을 지닌 대가였음을 보여준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변천
겸재 정선의 예술 세계 원화전시실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우리 화풍으로 담아낸 화성(畵聖) 정선
겸재 정선은 화성(畵聖)의 칭호를 받을 만큼 우리 문화를 빛낸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경산수화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은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고유의 화풍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
정선의 그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산수유람(山水遊覽)의 풍조를 확산시키는 데도 일조하였다
또한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겸재파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화가들을 배출하였다
정선을 따른 화가들로서는 김희성 · 김유성 · 정충엽 · 정황 · 장시흥 · 변박 · 김석신 등이 있다
이러한 정선의 진경사수화는 현대적으로 계승되어 새롭게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선 그림 퍼즐맞추기
겸재 정선과 양천현아 모형
겸재정선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