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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홍천박물관 역사전시실

홍천박물관은 열린 복합문화공간으로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고자

홍천의 문화재를 소재로 한 다양하고 유익한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 ·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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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박물관 1층(상설전시실) 홍천역사전시실은

홍천강 주변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부터 현재 홍천의 모습까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홍천의 주요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홍천 전역에 위치한 문화재 및 유적을 소개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홍천박물관

 

 

 

 

1층 홍천역사전시실 · 2층 기획전시실

 

 

 

 

홍천역사전시실

 

 

 

 

홍천의 어제 그리고 오늘 / 한눈에 보는 홍천의 문화유적

희망리 당간지주(보물 제80호) · 품걸리 석조여래좌상(보물 541호) · 광원리 삼봉약수(천연기념물 제530호)

수타사 대적광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 · 지상사 철불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 풍암리 동학군전적지(강원도 기념물 제126호)

군업리 지석묘군(강원도 기념물 제56호) · 명개리 열목어 서식지(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7호) · 한서 남궁억 묘역(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7호)

양덕원 삼층석탑 터(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호) · 괘석리 삼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호) · 풍암리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9호)

구 홍천군청(홍천미술관)(국가등록문화재 제118호) · 하화계리 선사시대유적 · 철정리유적

 

 

 

 

홍천강, 선사시대 사람이 모여들다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강을 중심으로 발생한 사실에서 알듯이 물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 요소이며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원천이다

사람들은 물이 풍부한 강 유역으로 모여들어 정착생활을 시작하였고, 물을 차지하기 위해 집단 간의 전쟁까지 벌였다

그리고 강 유역을 확보한 무리만이 살아남아 발전할 수 있었다

홍천은 마르지 않는 강과 양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을 갖추어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정착하였으며 긴 시간 동안 훌륭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구석기시대의 홍천

홍천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홍천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홍천강 유역은 토질이 비옥하고 물이 넉넉하므로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하다

또한, 홍천의 평야지대 주변을 병풍처럼 감싼 산은 풍부한 식량 자원을 제공하는 채집 터였을 것이다

이러한 지형은 방어에도 좋은 조건이기 때문에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모여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홈날 / 구석기시대 · 긁개 / 구석기시대

홍천 내 · 외삼포리 출토 유적

 

 

 

 

찍개 / 구석기시대

홍천 내 · 외삼포리 출토 유적

 

 

 

 

주먹도끼 / 구석기시대

홍천 내 · 외삼포리 출토 유적

 

 

 

 

돌조각 / 구석기시대 · 망치돌ㅣ모루돌 / 구석기시대

홍천 내 · 외삼포리 출토 유적

 

 

 

 

석기의 종류와 쓰임새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단단하고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을 깨뜨리거나 떼어내어 만든 석기로 사냥이나 채집을 했다

중석기시대로도 불리는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흑요석과 수정 등을 이용하여 좀 더 섬세하고 작은 석기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생활의 필요에 따라 새로운 도구를 만들거나 개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석기들은 저마다 쓰임이 있었는데

가공된 날의 형태, 손으로 석기를 잡았을 때의 모습, 사용한 흔적 등을 토대로 끍개 · 찍개 · 밀개 · 자르개 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석기 일괄 / 구석기시대

홍천 하화계리 돌터거리 출토 유적

 

 

 

 

신석기시대의 홍천

신석기시대 유적 역시 주로 하천에 인접한 충적 대지에 집중되어 있다

홍천 지역에서 발굴된 신석기 유적은 다른 시기의 유적에 비해 그 수가 많지 않다

자연 침식으로 유실 되거나 청동기와 철기시대 유구가 형성되면서 훼손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두촌면 역내리 유적 · 철정리∥ 유적 · 화촌면 외삼포리 유적 등이 있다

이 유적들은 대부분 소규모 주거지이며, 신석기시대 유물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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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음식을 저장하는 법을 깨우쳤다

오늘날 우리가 반찬을 냉장고에 널어두는 것처럼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모래 위에 토기를 반쯤 묻어 세워놓고 그 안에 식량을 담아 보관했다

 

 

 

 

빗살무늬토기편 / 신석기시대

홍천 철정리 출토 유적

 

 

 

 

청동기시대의 홍천

청동기시대 유적은 홍천강 본류와 그 지류에 접한 충적 대지에서 고르게 확인된다

두촌면 철정리 유적은 덧띠토기(돌대문토기) · 구멍무늬토기(공렬문토기) · 민무늬토기(무문토기) 등이 출토된 주거지와

돌널무덤(석곽묘) 등이 함께 확인되어 청동기시대 전 시기의 문화상을 단계별로 파악할 수 있으며

화촌면 외삼포리 유적에서는 반달돌칼 · 갈돌과 갈판 등이 다수 출토되어 청동기시대 홍천에서 농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외삼포리유적에서 출토된 덧띠토기(돌대문토기)는 청동기시대 중에서도 아주 이른 시기의 특성을 보인다

조기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외삼포리 유적은 인근 상류 지역에서 확인된 철정리∥ 유적과 함께

홍천 지역 내 청동기 문화 양상을 밝히는 데 주요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돌화살촉 / 청동기시대 · 돌창|간돌검 / 청동기시대

홍천 철정리∥ 출토 유적

 

 

 

 

석제 · 토제가락바퀴|토제어망추 / 청동기시대

홍천 철정리∥ / 성산리 출토 유적

 

 

 

 

시대별 유적 분포 /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시대

 

 

 

 

구멍무늬토기(공렬문심발형토기) / 청동기시대

홍천 철정리∥ 출토 유적

 

 

 

 

타날무늬짧은목항아리(타날문토기 원저단경호) · 토기뚜껑 · 토기항아리(경질무문토기호) / 철기시대

홍천 성산리 출토 유적

 

 

 

 

철기시대의 홍천

홍천의 철기시대 유적은 하화계리 · 철정리 · 성산리 · 태학리 · 화상대리 · 결운리 등에서 조사되었다

철정리∥ 유적에서19기, 성산리 유적에서 47기, 태학리 유적에서 58기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와 석기 · 철로 제작된 농기구 · 무기 등이며, 토기 중에는 경질민무늬토기(무문토기)와 두드림무문토기(타날문토기)가 주종을 이룬다

경질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 전통이 계승된 형태이며, 철기문화의 시작과 더불어 사용되다가 두드림무늬토기로 발전되었다

농경이 적합된 홍천강 유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철제 농기구와 토기 제작 기술이 발달하며 농업 생산량이 늘어난 것이 인구증가로 이어지며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깊은바리모양토기(경질무문외반구연토기) / 철기시대

홍천 철정리∥ 출토 유적

 

 

 

 

굽다리바리모양붉은간토기(적색마연대부발) · 손잡이달린깊은바리모양토기(경질무문내만구연파수부토기)

홍천 철정리∥ 출토 유적

 

 

 

 

갈돌|갈판 / 철기시대

홍천 성산리 출토 유적

 

 

 

 

쇠손칼돌|쇠도끼 / 철기시대

홍천 하화계리 출토 유적

 

 

 

 

삼국시대의 홍천

삼국시대에 홍천을 비롯한 강원도 영서 지역은 삼국시대에 교통 ·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은 오랫동안 한강과 그 지류 유역을 두고 대립하였고, 그 흔적은 한반도 곳곳에 고루 남아 있다

백제가 3세기 후반에 홍천이 먼저 강원도 영서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고 4세기 후반에는 홍천이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6세기 중반에 이르러 신라가 한강 유역과 홍천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하화계리 유적에서는 한성 백제 중앙 양식의 토기가 다수 발견되었으며

역내리, 철정리 일대에 집단을 이루고 있는 주거지 및 소분에서는 고구려계 토기를 비롯하여

고구려 양식의 돌방무덤(석실분)과 신라 토기 및 중앙정부의 흔적이 남은 대금구(신라 관리의 지위에 따라 준 금속제 허리띠 장식품)가 발굴되었다

 

 

 

 

백제 · 고구려 · 신라 영토의 홍천

 

 

 

 

토기뚜껑 / 통일신라시대

 

 

 

 

손잡이달린항아리(파수호) / 통일신라시대

홍천 성산리 출토 유적

 

 

 

 

통일신라시대의 홍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신문왕 5년(685)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성하였다

9주 아래의 행정구역 명칭도 군 · 현으로 바꾸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이때 '벌력찬촌'으로 불리던 홍천 지역의 이름이 '벌력찬현'으로 개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경덕왕 16년(757) 12월 이후 홍천의 이름은 '삭주 녹효현'으로 바뀌었다

물걸리사지, 희망리사지 등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사찰들의 존재는 통일신라시대 홍천의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모란무늬수막새 · 수키와 / 통일신라~고려시대

홍천 물걸리사지 출토

 

 

 

 

물걸리사지 보물에서 볼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예술 양식

 

 

 

 

고려시대의 홍천

민족의 두 번째 통일을 이뤄낸 고려는 제6대 왕인 성종 때 지방 행정조직을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하여, 제8대 왕인 현종 9년(1018)에 완성되었다

이때 「녹효현」이라 불리던 홍천의 이름이 「홍천현」으로 바뀌었다

통일신라 말 선종의 도입과 호족의 성장, 그리고 고려의 숭불정책으로 인하여 고려시대는 불교가 융성하여 불교 관련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홍천

조선은 건국 후 행정구역을 8도로 개편하였다

태조 4년(1395)에 영동의 강릉도 영서의 교주도를 합쳐 강원도로 개칭하였고, 홍천은 강원도의 13개 현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고종 33년(1896)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홍천군이 되어 9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충 ·  · 예를 중시하여 충효비 · 열녀비 등이 많이 세워졌으며 불상 · 탑 등 불교문화도 여전히 번성하였다

 

 

 

 

부장품 / 조선시대

 

 

 

 

강원도 홍천(江原道 洪川)이 쓰여진 항아리 / 1926년~1945년 제작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술의 연간 제조량을 파악하고 주세 징수를 위하여

양조장에서 관리하는 술독의 겉면에 술 제조일과 제조량을 표시하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이 항아리 겉면에 쓰여 있다

 

 

 

 

지도로 본 홍천

조선 후기에는 군사 · 행정 등의 목적으로 도별 · 군 · 현별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지도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해당 시기 각 지역의 자연 및 인문환경, 군사, 고적 등의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다

홍천의 모습이 그려진 여러 고지도를 통해 홍천 지역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자

 

 

 

 

홍천 철비(洪川鐵碑) / 강원도문화재자료제51호

홍천 현감을 지낸 원만춘(元萬春)의 덕을 기리기 위해 1661년(현종 2) 4월에 홍천 주민이 건립한 선정비다

연봉리에 있는 17기의 선정비 중 유일하게 주물로 제작된 홍천 철비는 높이 85cm · 폭 42cm · 두께 7cm이다

비의 앞면에는 '청백선정(淸白善政)'이란 글귀가 돋을새김되었고, 뒷면에는 비를 만든 장인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장인의 이름이 내금이(奈金伊)로 알려져 왔으나 2019년 연구를 통해 진금이(秦金伊)로 재조명되었다

 

 

 

 

홍천의 변천사

1968년 · 1980년 · 1990년 · 2000년 · 2008년 · 2020년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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