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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홍천박물관 기획전시실

홍천박물관은 열린 복합문화공간으로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고자

홍천의 문화재를 소재로 한 다양하고 유익한 체험 프로그램을 개발 ·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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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박물관 2층(기획전시실)은 주제를 바꾸어 가며 전시를 하는데

이번 기획전시는 「홍천의 어제 그리고 오늘」이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홍천박물관 2층(기획전시실)

「홍천의 어제 그리고 오늘」이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홍천의 인물 용득이

홍천의 역사적 인물 중 고려시대 홍천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용득이를 들 수 있다

그는 팔만대장경을 제작 지휘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홍천으로 내려와 용수사를 창건하고 후진 양성에도 매진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용득이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홍천의 어제 그리고 오늘 · 2022. 1. 28~6.30

홍천은 구석기시대부터 풍요로운 자연환경으로 홍천강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자리잡고 살았다

고구려시대 벌력천현(伐力川縣)으로, 신라 경덕왕 때는 녹효(綠驍)로 칭해지다가

1018년 고려시대 현종 9년 넓고 큰 물이라는 뜻의 홍천(洪川)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되었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고장의 과거와 현재의 사진을 보여드리려 한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부터 어머니, 아버지 세대,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 세대까지 모두의 추억을 공유하고

미래의 홍천을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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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6월까지로 되어 있는데 8월에도 계속 전시하고 있다

 

 

 

 

홍천의 변화

홍천이 역사에 기록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이 통일 전쟁을 겪으며 고구려 땅이기도 했고 신라의 땅이기도 했다

고려가 한반도를 완전히 통일하고 나서야 지금의 이름인 홍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홍천은 대한민국에서 면적(1820.34㎢)이 가장 넓은 기초자치단체로 영동지방과 수도권에 모두 경계를 접하고 있다

예로부터 강의 물줄기를 따라 비옥한 농토가 많아 작물이 풍부하게 재배되어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홍천의 인구는 조선시대 말부터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다가 1966년 132,065명을 정점을 찍고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산업화와 공업화로 많은 사람들이 큰 도시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68,027명으로 1960년대의 약 절반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2015년에는 20~39세까지의 인구가 홍천군 전체 인구의 5.2%에 불과해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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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1960년대의 절반으로 감소했고, 20~39세까지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5.2%라니 홍천의 미래가 걱정된다

 

 

 

 

도시개발과 교통

조선시대 홍천에는 무관(武官)들이 배치되었다. 이것은 홍천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했음을 뜻한다

이후 역원(驛院)제도를 실시하면서 중앙정부와 강원 · 영서 · 영동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했다

홍천은 87%가 산이다. 그래서 예부터 다른 마을을 가거나 홍천을 떠나 다른 시군으로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최근에는 터널이 많이 생겨 지역을 이동하는데 편리해졌다. 서울 ~ 양양 고속도로 홍천 구간에는 무려 19개의 터널이 있다

도로는 고속도로 2개 노선 43.88km를 비롯해 총 1,263.88km이다. 이중 66.95%인 846.18km가 포장되었다

 

 

 

 

도시개발과 교통

홍천강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뱃길로 이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홍천에 선군(船軍) 65명이 배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륙이면서 선군이 있었던 것은 강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천강으로 세곡의 운송뿐만 아니라 상선을 이용한 상업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육상 교통이 발달하고 1944년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홍천강의 뱃길은 끊기게 된다

홍천은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철도망이 없는 지역이었다. 지역 균형 발전과 인구 증가를 위해 철도는 꼭 필요한 기반 시설이다

2021년 용문~홍천 철도 건설이 확정되어 수도권과 접근성이 높아지고 남쪽 지역으로의 이동이 편리해질 것이다

철도 건설로 홍천은 강원도 중북부 산업도시로, 관광도시로 발전할 것이다

 

 

 

 

시장 / 오일장과 상업

홍천강은 북한강으로 흘러 홍천의 산골 마을들을 서울을 비롯한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중요한 강이다

북한강의 수운 발전과 더불어 홍천의 상업이 발달된다

또한 육로에서도 중앙정부와 강원· 영서 · 영동 지역의 여러 마을들을 잇는 교통 요지에 위치해 상업이 발달했다

 

 

 

 

구시장 · 홍천시장

홍천읍 신장대리는 각종 상가 · 관공서 · 은행 · 회사 · 음식점 등이 즐비하고 홍천시장과 중앙시장이 자리 잡고 있는 홍천 상업의 중심지이다

홍천시장은 홍천읍장이 상설시장화한 홍천의 대표적인 종합상설시장이다

 

 

 

 

홍천 장날

홍천의 오일장 가운데 홍천읍장 이른바 홍천장은 「철 따라 진귀한 물건들이 모이는 전국에서 몇째 안가는 큰 장」으로

오늘날까지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가축시장

1930년대부터 강원도는 지역이 넓고 목초가 풍부해 천혜의 축산지대를 이루고 '강원우'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홍천에서는 1965년 홍천축협이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축산업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축산물의 수급과 가격 안정 · 생산과 유통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집유선 · 가축시장 · 도축장을 개선하였다

같은 시기 가축시범경매장을 준공하여 가축시장이 확대 발전하였다

1990년대 이후 질 좋은 고급육 연구 개발에 힘써 한우고급육사업이 활성화되었다

그 결과 홍천 한우는 현재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농가 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풍습과 축제 / 통과의례(通過儀禮)

통과의례는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네가지 의례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은 이후까지의 일생의례로 주로 관혼상제를 말한다

홍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면적이 큰 행정구역이면서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그러나 보니 인접 시 · 군도 여러 지역이라 홍천 고유의 풍속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다른 지역과 비슷한 경우도 많이 있다

 

 

 

 

섶다리에서 신랑이 신부를 업고 가는 모습 / 1970년

특히 혼례는 지역간의 넘나듦이 많다

 인접지역과 혼인을 맺어질 때는 어느 한 지역의 의례만 고집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홍천의 풍속은 시대적 변화와 지역 차이로 인해 바뀌어 가고 있다

 

 

 

 

학교생활

전통적인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을 대신하는 근대적 교육제도는 갑오개혁(1894)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홍천에서는 1908년 지금의 홍천초등학교인 광성의숙(廣成義塾)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초에 3개의 초등학교가 생겼고, 이후 해방 전까지 33개의 초등학교가 설립 · 운영되었다

현재 홍천군 교육 시설은 어린이집 42개소 · 유치원 26개소 · 초등학교 29개소 · 중학교 11개소 · 고등학교 7개소

그리고 다문화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가 1개소이다

 

 

 

 

홍천향교 · 노동서원

 

 

 

 

홍천여중 수타사 소풍기념 / 1974년

 

 

 

 

국군과 함께

해방후 미군정을 거치고,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치러지면서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해 2월 UN은 남한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했고 북한도 남한과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분단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홍천군의 머리 위로 분단선이 그어졌다. 이렇게 홍천은 대한민국 최전방지역이 되었다

한국전쟁 전부터 홍천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가리산과 공작산에는 무장공비가 침투하기도 했다

 

 

 

 

무의촌 진료 / 1963. 6. 21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최전방 지역인 홍천군은 전쟁 기간 중 중심지에 있어 파괴와 인적 · 물적 피해가 매우 심각했다

하지만 주요 군부대의 주둔지였던 홍천군은 국군의 활발한 대민지원활동과 1962년부터 국가 재건을 위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빠르게 복구되었다

현재에도 홍천군에 주둔하는 11사단은 군민들과 함께 크고 작은 일상을 함께하며 군민들과 나라를 지키고 있다

 

 

 

 

자연과 명소

홍천군은 팔봉산과 함께 가리산 미약골 · 금학산 · 가령폭포 · 공작산 수타사 · 가칠봉 삼봉약수 · 용소계곡 · 살둔계곡 등 아름다운 9개 풍경이 있다

또한 산간지역이지만 문화재가 많이 보존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홍천읍에는 고려시대의 석탑인 희망리 삼층석탑(보물 제79호) ·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보물 제540호)이 옮겨져 있으며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 대좌(보물 제543호) · 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내촌면 물걸리 집터의 통일신라시대 불교 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화재인 삼층석탑(보물 제545호)이 있으며

또한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의 〈월인석보 권 17, 18〉(보물 제745-6) 등이 있다

 

 

 

 

홍천 전경

1980년 · 1990년 · 2008년 사진이다

 

 

 

 

동학농민혁명군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원주, 양양, 강릉, 횡성, 홍천 5읍의 접주로 불리는 차기석은 1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홍천군 내면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자작고개에서는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전투가 있었고 수천명의 동학농민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76년 자작고개에서 유해 더미가 발견되었다

1978년에 홍천군 동학농민혁명군의 뜻을 기리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설치하였다

 

 

 

 

한서 남궁억

한서 남궁억(1863~1939)은 교육가 · 계몽운동가 · 독립운동가 · 사회운동가 · 시인 · 작사가 · 작곡가 · 언론인으로

민족의 교육과 독립 그리고 무궁화 보급에 힘썼다

1918년 홍천군 서면 모곡리 보리울로 낙향하고 일제가 나라꽃인 무궁화를 탄압하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1919년 9월 모곡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무궁화 묘표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우리 역사 교육을 하고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무궁화 예찬시 / 1923년

 

 

 

 

강재구 소령

강재구(1937~1965)는 1965년 월남파병부대인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에 보직되었다

1965년 10월 4일 파병을 앞두고 홍천군 북방면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훈련중

부하 사병의 실수로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이 훈련중인 중대원들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중대원 100여 명의 생명을 구하고 순직하였다

그가 순직한 북방면 성동리에는 강재구공원이 있다

육군에서는 '재구상'을 제정하여 매년 육군 중대장 가운데 모범 중대장을 선발하여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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