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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 중구 생활사전시관

인천 중구가 출범한 1968년을 기준으로 1960~70년대 인천 중구와 관련된 생활사를 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전시관은 연면적 761.84㎡로 지하 1층 · 지상 2층 규모이며

지하 1층에는 중구 출범 후부터 현재까지의 중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표가 전시되어 있다

지상 1층에는 1960~70년대 중구의 의 · 식 · 주 문화를 볼 수 있으며 특색있는 음식과 문화상품을 판매하는 전문판매점이 있다

2층에는 백항아리선술집 · 극장 · 다방과 같은 당시의 문화생활을 엿볼 수 있다

 

 

전시관 안내판

 

 

 

 

1968 시대에 비친 생활상/ 중구의 탄생

인천항이 자리한 인천광역시 중구는 제물포가 위치한 곳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 이름은 조선시대 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군사시설 제물진에서 유래하였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중구 일대에는 일본 · 청국인들의 거류지가 만들어졌다

또 지금의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고 주변에는 외국인 공동거류지인 각국조계가 생겨났다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서양식 건축물과 시설들이 마련되자 개항장 일대는 상당히 이국적인 도시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중구 일대는 점차 일본인 위주의 도시로 변화하였고

1945년 광복 전까지 인천 내의 조선인들은 주체가 아닌 주변인으로 생활하였다

광복 후인 1949년 8월 인천은 경기도 인천시가 되었고 1968년 1월 행정적으로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동구 · 남구 · 북구와 함께 중구가 탄생하였다

 

 

 

 

중구 1960년대 연표

 

 

 

 

인천 우량아선발대회

1965년 제1회 시민의 날이 제정된 이래 1970년대에도 이어져 시민들이 함께 모여서 즐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

오늘날 시민 혹은 구민의 날 출발이었다

당시 흥미로운 광경 중에는 우량아선발대회가 개최되었던 점이다

이 대회는 생후 6개원부터 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참가했는데 우량아 기준은 질병이 없어야 하고

각종 예방접종을 빠뜨리지 않고 맞아야 하며 무엇보다 체중과 가슴둘레 등 신체발달과 영양상태가 좋아야 했다

대부분 키 크고 살집 좋은 아이들이 우량아로 뽑혔다

 

 

 

 

인천도나스

학생들이 주고객이었던 인천도나스 · 용일당 · 명물당 · 맛나당은 사라졌고 신신옥 · 청실홍실 · 신포우리만두 등은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여기에 대성제과 · 신라제과 · 별제과 등 제과점도 당시 만남의 장소로 학생부터 성인까지 애호했던 공간이다

 

 

 

 

학다방

지금도 커피숍이나 서양식 카페가 차고 흘러넘치지만 예전에는 다방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했는데 이제는 거의 쇠퇴해 사라지고 없다

특히 중구 신포동 · 용동 · 내동 · 인현동 · 시청이 있던 시절의 관동 ·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다방이 있었다

은성다방 · 짐다방 · 별다방 · 유토피아다방 · 신포다방 · 르네상스다방 · 흙다방 · 태양다방 · 상록수다방

우봉다방 · 삼미다방 · 소월다방 · 성지다방 · 미담다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재 비교적 옛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업을 하고 있는 다방은 신포동의 국제다방과 경동의 학다방 정도이다

 

 

 

 

화선장

크게 이름을 날렸던 대표적인 인천 중구의 음식점이었다

인천의 대표적 일본식 요리집으로, 경양식집으로, 주물럭집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던 대표적인 인천 중구의 음식점이었다

「신포동 수제비골목」으로 들어서는 오른쪽 첫 2층 집이 옛 화선장 건물이다

지금은 1층 미장원 · 2층은 맥줏집으로 변해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우동집 구옥(龜屋)으로, 1930년대에는 요정 성금(成金)으로 유명했던 집으로

인천 상류층 · 관청의 고위 공무원들은 물론 서울에서 내려오는 고관들의 접대 장소로도 명성을 떨쳤다

 

 

 

 

신흥전파사

경동의 동아라디오 · 인천무선 · 중앙동의 고려양행 · 한미소리사 내동의 음악사 등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추억 속에나 남아 있다

196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서민 가정에 TV의 보급이 낮아 주로 라디오가 전파 매체의 중심 역할을 했다

주로 전파사라고 부르던 라디오 방은 거리에 스피커를 내놓고 음악을 틀거나 스포츠 중계를 내보내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기도 했다

12월에 들면 라디오 방마다 온종일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 놓아 시내는 온통 성탄 분위기에 설레기도 했다

이어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흑백TV전성시대를, 1980년대 컬러TV 전성시대에 이르는 동안

삼성전자, 금성전기(현 LG전자) 같은 대기업이 곳곳에 서비스센터를 열면서

소규모 개인 전파사는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까지 중구에는 여러 전파사가 있었다

경동의 동아라디오 · 인천무선 · 중앙동의 고려양행 · 한미소리사 · 내동의 음악사 등으로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추억 속에나 남아 있다

 

 

 

 

2층 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주택 내부

2층에서 내려다 본 1층이다

 

 

 

 

금주 상영작

 

 

 

 

인영극장

동인천 역전의 명물이었는데 일찍이 폐관하고 은행 등이 입주했었다

*

동방극장

규모는 작았으나 외화 개봉관으로 유명한 극장이었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첫 작품인 자이언트 · 007위기일발 · 빅컨츄리 같은 영화를 개봉했다

*

시민관

1970년대에 들면서 폐관한 듯한데 현재는 인성여고 체육관으로 쓰이고 있다

*

인형극장

싸리재 길에 생겼던 작은 영화관이었는데 오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제1관

서민의 휴식처이자 주요한 유흥 무대인 영화관은 거의가 중구와 동구에 집결하다시피 했었다

인천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100년 역사를 가진 애관극장을 위시해 동방극장 · 키네마극장 · 인영극장 등이 있었다

1980년대 컬러TV시대에 들면서 경영난에 처해 동방극장 · 키네마극장이 문을 닫았고

애관극장만이 시대에 맞춰 복합상영관으로 변신, 아직도 영사기를 돌리고 있다

*

카인의 후예를 상영하고 있다

 

 

 

 

카퍼레이드(백옥자)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하고 금의환향한 인천 선수들이 동인천역에서 시청까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당시 카퍼레이드 선두 차량에는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은 투포환 금메달리스트 백옥자 선수가 탑승했다

 

 

 

 

은성다방

도시의 응접실 다방은 이제는 거의 쇠퇴해 사라지고 없다

특히 중구 신포동 · 용동 · 내동 · 인현동 · 시청이 있던 시절의 관동 · 중앙동에는 한 집 건너 다방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다방이 있었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도 은성다방 · 짐다방 · 별다방 · 유토피아다방 · 신포다방 · 르네상스다방 · 흙다방 · 태양다방 · 상록수다방

우봉다방 · 삼미다방 · 소월다방 · 성지다방 · 미담다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재 비교적 옛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영업을 하고 있는 다방은 신포동의 국제다방과 경동의 학다방 정도이다

 

 

 

 

은성다방 내부

그 무렵, 도심의 번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는 중앙동 대로변의 한 모퉁이 일식집 2층에 있었다

한때 문화 예술인들의 휴식처이자 거점이었으며, 또한 예술활동의 숨통을 터주는 장소로도 활용되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마땅한 전시 공간을 달리 구할 수 없던 당시에 화가들의 작품 발표가 여기서 치러지는 일이 많았다

혹은 시낭송이나 시화전 장소로, 혹은 창작집의 기념출판회나 각종 문화 예술 관계 집회 모임의 장으로 크게 배려되었던

황량한 시대의 문화 소통의 공간이자 카타르시스의 배출구이기도 했었다

*

차 한 잔으로 공허한 시간을 때우는 실업자 예술인들이 매일같이 본능적으로 찾아들어 환담을 교환하는 '만남의 터'였다

무엇엔가의 기다림 같은 것이 항상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가운데서 무위에 주눅 든 듯한 예술인들이

초현실적인 자세로 앉아 있는가 하면 제법 활기 있게 움직이는 봉급생활자 무리도 끼어든다

늘 틀어놓는 레코드판은 그런대로 격조 있는 클래식이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맞아주는 그 집 주인 속칭 마담 김윤희

김윤희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인환은 "애교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여성이지만 손님에게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 다방은 1990년대 문을 닫았다

 

 

 

 

백항아리집

지역원로는 "그 때 백항아리집으로 말하면 단순한 목로주점으로서 몇 평 되지 않는 구조인 까닭에

따로 술과 안주를 차려 놓는 탁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벽쪽으로 돌아가면서 선반이 걸려 있고

대개는 그 선반에 안주 한 두 접시와 술주전자가 놓여 각자 마실 수 있는 만큼 청해서 마시는 아주 싼 술집으로

신포동 일대를 배회하는 많은 술꾼들이 드나들던 집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양수는 회상한다

 

 

 

 

백항아리집 그림

의자 없이 서서 마시는 서민주점은 1990년대에 들어서 문을 닫았다

 

 

 

 

인천 중구 생활사전시관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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