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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인천역~동인천역

인천역에서 동인천역까지 걸었다

장마철이기에 비가 와도 피하기 쉬운 도시 박물관을 중심으로 걸었다

 

 

인천역

일제가 여주 · 이천 지역의 쌀과 소래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1937년부터 수인선을 운행했다

시점이다

 

 

 

 

밴댕이특화거리

인천역사거리에서 짜장면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로 예전 인천역 뒤가 바다였기에 아직 밴댕이 식당이 많이 남아있다

 

 

 

 

해밀턴의 제물포연초회사 안내판

인천의 담배 즉 오늘날과 같은 권련의 역사는

1901년 그리스인 밴들러스가 중구 사동에 동양연초회사를 설립했다는 기록이 바로 최초의 연초공장이 되는 셈이다

이 회사는 1903년 수입 담배에 밀려 문을 닫는데 지배인이었던 미국인 해밀턴이 맥을 이어 다시 연초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홍도패, 산호, 뽀삐 등의 이름이 붙은 담배를 하루 30만 갑씩 생산했다

1910년대 담배 생산액은 정미업 다음으로 인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하지만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시행하면서 인천산 담배는 자취를 감췄다

광복 후 중산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

올림포스호텔 언덕 기슭에 있다

 

 

 

 

해망대산(海望臺山 · 올림포스호텔)

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언덕이다 하지만 바다에 접했기 때문에 봉화대가 있었고 바다를 향한 대완구(대포)가 있었다

개화기에는 한때 영국영사관이 설치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로 폐허가 되기도 했다

*

올림프스관광호텔은 1965년 12월 객실 43개로 개업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이 호텔은 중국식 광동요리의 나이트클럽 · 24시간 지하 바

한국 명기(名技)가 특대하는 한국요리집과 기생관 등이 있었다

1967년 8월 1일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들어섰고 2003년 카지노의 대부 전낙원이 호텔을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파라다이스호텔로 바꿨다

그후 다시 올림포스호텔이 되었다

*

해외에서 입국한 코로나19 확진자가 늘면서 4월 7일 격리시설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인천항

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앞에 있다

예전 독(dock)이 생기기 전에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있는 곳까지가 바다였다

 

 

 

 

인천항 · 월미도

인천항 너머로 월미도가 보인다

그야말로 섬으로 보인다

 

 

 

 

인천항

 

 

 

 

박정희 대통령 기념식수

1966년 6월 1일 기념식수라 돌기둥에 써있다

 

 

 

 

인천중부경찰서

 

 

 

 

서산그물

예전 바닷가라 어망을 파는 집들이 여럿 남아 있다

 

 

 

 

제물진두 순교자기념성당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

자유공원이 있는 응봉산 줄기가 내처달리다 바다와 맞닿은 곳으로 우리가 말하는 제물포(濟物浦)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진리의 큰 빛 ·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들어온 곳이다

 

 

 

 

해망대산(海望臺山 · 올림포스호텔)

 

 

 

 

인천선구

그물 · 로프 · 부표 등이 있다

 

 

 

 

인천항 선거 준공 기념비

인천항은 구한말 풍운이 감도는 1883년 1월 1일 개항하였다

1918년 10월 27일 소규모 독(dock)이 준공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 앞까지 들어왔다

 

 

 

 

대한감리교 기념탑교회

일제 대정시대(1911~1924)에 지은 건물로 원래는 객주집이었다

겉은 콘크리트 건물 같으나 실은 목조건물이다

 

 

 

 

1883년 인천항

대한감리교 기념탑교회 벽에 있는 사진이다

 

 

 

 

선교사님들 경로

대한감리교 기념탑교회 벽에 있는 안내판이다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

살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한국 창립 120주년을 맞아 첫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장소에 2007년 7월 22일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에 의하면 4명의 수녀가 1888년 7월 22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한중문화관

 

 

 

 

제물진두 순교성지

 

 

 

 

부안기사식당

 

 

 

 

구 인천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 국가등록문화재 제248호

인천 개항 초기부터 해운과 물류수송을 담당하였던 상선회사 사옥이다

1883년 미쯔비시우편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시작하여 1885년 공동운송회사와 합병된 후 1886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이 건물은 1888년 건립되었는데, 초기에는 붉은 벽돌 건물의 사옥과 사택 · 창고 등이 같이 세워졌다

건물의 건립 연도는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목에 기재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리나라 해운 및 유통산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제물포해전이 있었던 1904년 당시에는 일본병참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항만 관련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인천아트플랫폼 사무실로 활용되고 있다

 

 

 

 

대불호텔전시관 · 중구 생활사전시관(1960~1970년대)

인천 일본인 조계지에 위치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호텔 대불호텔이 철거 40년 만에 호텔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그 옆에는 1960~1970년대 인천의 생활사를 알려주는 전시관도 함께 개관했다

 

 

 

 

구)인천일본제1은행지점 / 인천 유형문화재 제7호

1883년 인천 개항 후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이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고, 초기에는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 법원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일본인거리

 

 

 

 

4 · 19혁명기념비

인천 중구청 앞에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축구와 야구 도입지

 

 

 

 

근현대사의 현장, 각국공원

 

 

 

 

인천항 공사 현장

 

 

 

 

신포로27번길

 

 

 

 

마냥집

모둠 전 · 스지탕 전문점이다

 

 

 

 

청년 백범 김구역사거리 백범 상

 

 

 

 

개항로

백범 상 앞에서 봤다

 

 

 

 

한진 SKY TOWER 아파트(옛 인천감리서 터)

 

 

 

 

구 인천감리서 터 표지석

현 한진 SKY TOWER 아파트 자리에 1883년 개항 직후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인천감리서가 생겼고

나중에 인천부(현 인천시청) 역활에다 개항장 재판소와 학교까지 들어섰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는데 이 학교가 후일 인천고다

 

 

 

 

옛 인천감리서 터 사진

인천개항장 재판소에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유항렬 주택

유항렬은 1937년 한국인 최초로 인천항 도선사 자격을 획득했다

1930년 후반에 건축된 그의 저택은 벽돌조 2층 건물로 현재까지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제물포 웨슬리예배당

내리교회 제2대 담임목사였던 조지 헤버 존스와 내리교인들이 1900년 6월 건축을 시작하여

1901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에 약 1천 명이 첫 예배를 드린 최초의 서구식 개신교 예배당이다

웨슬리 예배당은 아펜젤러가 1891년 내동 29번지에 세운 10평 정도의 한옥예배소를 허물고 신축한 건물이다

한옥예배소가 멸실되고 웨슬리예배당 공사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는 한옥예배소에서 얻은 폐자재를 활용하여

우각동(현 창령동)에 있던 선교사 주택을 약 2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에스베리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1900년 8월 26일 증축하여 임시로 사용했다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예배당을 1955년에 허물고야 말았다

이에 모든 내리교인들과 뜻있는 인천시민들이 애석하게 여기다가 인천광역시의 지원으로 꼭 111년 만인 2012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

 

 

 

 

미주 한인 선교 100주년 기념비

내리교회(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빗돌이 있다

 

 

 

 

아펜젤러 목사 · 김기범 목사 · 존스 목사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였다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숙소를 정하고 상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7월 7일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하자 아펜젤러는 1시간여 동안 연주를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회 찬송이었다

*

1901년 5월 14일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기범 목사

*

1888년 5월 14일 20세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존스 목사는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빼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제2대 담임목사직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김기범 목사

1901년 5월 14일 한국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인천내동교회

현재 한국 최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목사가 세운 정동장로교회(현 새문안교회)로 알려져 있지만

1922년 발간한 인천내리교회역사에는 내리교회가 2년 앞선 1885년 처음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천 학생6 · 25참전관

1950년 12월 18일 인천의 중고등학생 3천여 명이 인천학도의용대 대장 이계송(고려대 2학년)의 지휘아래

조국과 고향을 지키기 위하여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을 걸어가서 자원 입대 후 참전하여 208명이 전사하였다

 

 

 

 

능인사

인천 능인사의 역사는 곧 개항으로 시작된 인천 근대 불교의 역사다

1883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인천이 개항되면서 일본을 시작으로 외세 각 열강들이 인천으로 진출하고

인천은 세계 각국과 교통하는 조선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옛 지명인 제물포, 배다리 등의 명칭으로 미루어 인천 연안부두의 명성과 함께 중국 등으로 통하는 항구가 번성하였다

이에 불교계에서도 스님들의 해외 방문이나 중국 교류 등을 위해 인천 거점의 사찰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곧 오늘날 능인사의 시작이다

 

 

 

 

인천삼성요양병원(예전 신신예식장 터)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신신예식장이 자리했던 삼성요양병원 부근에 용동권번(龍洞券番)이 있었다고 한다

 

 

 

 

용동권번(龍洞券番)

1901년 5월에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용동권번,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대중가요 가수로 스타가 된 이화자와 같은 레코드사 소속의 김일타홍, 일본인보다도 일본 노래를 잘 불러 일본요정으로 단골 출장을 다닌 이화중선

아리랑의 나운규와 사랑에 빠진 영화배우 오향선, 중국 군함 함장의 마음을 빼앗아 출항 일정을 수 일 넘기게한 박미향 등이 있다

인천 출신 기생 중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기생들이다

일본 유학까지한 인텔리 여배우 복혜숙도 토월회 활동 때 인연을 맺었다

당시 토월회가 인천 공연에 나섰다가 흥행에 실패하자 남자 단원들이 밀린 여관비와 식비를 마련하겠다고

그를 남겨놓고 서울로 떠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후 복혜숙은 용동권번에서 3년간 생활하며 기생의 권익과 권번 개혁에 앞장섰다

*

2011년 동사무소는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발라버렸다

하지만 지역문화단체로부터 한소리 듣자 며칠 후 시멘트를 벗겨내었다

*

1897년 1월 인천 상봉루의 기생 9명이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냈다

또 1925년 7월 부천군(현 인천 남구)부근 수해를 입자 용동권번에서는 식료품으로 그들을 도왔고

1946년 4월 15일엔 인천권번 대표 김본건이 광복 후 중국에서 귀환한 전재민 동포들이 있는 수용소를 방문해

기생들이 모은 구호금 1만 원을 전달했고 동명학원에도 1만 원을 기부했다

이밖에 영화보통학교 운동장 확장 비용도 마련하는 등 사회 참여도가 높았다

 

 

 

 

칼국수거리

80년대엔 칼국수거리란 팻말이 들어설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젠 타산 맞추기 힘들어 문 닫은 집이 많다

 

 

 

 

큰우물 칼국수

 

 

 

 

우현 고유섭 생가 터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과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했다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별해 어린시절 조부모와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말이 없는 의기소침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3 · 1운동 때는 태극기를 만들어 동네 아이들에게 돌리고

용동 일대에서 만세를 부르며  돌다가 붙잡혀 3일간 구류를 당한 적도 있을 만큼 강한 성격도 있었다

 

 

 

 

용동큰우물 / 인천광역시민속자료 제2호

1883년 인천 개항 무렵 조성된것으로 전해지는 지름 2.15m · 깊이 10m의 우물로

원래는 자연 연못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하여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인천 시민의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인천시민의 생활용수로 활용되었다

1996년 6월 12일 인천광역시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용동큰우물 현판

1967년 기와 지붕의 육각형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현판은 이때 인천 출신 당대의 최고 서예가였던 동정 박세림이 썼다

 

 

 

 

가천 이길여산부인과 기념관

빈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열악한 의료환경 속에서 1958년 산부인과를 개원하여

아픈 이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자 했던 가천 이길여 여사의 산부인과가 있었던 자리 위에 세운 기념관이다

*

보증금 없는 병원

'돈이 없어서 병을 고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국내 처음으로 보증금을 없애고 문 앞에 내걸었던 '보증금 없는 병원' 간판이다

 

 

 

 

구 대한천일은행 지점(현 우리은행)

대한천일은행은 구한말 대한제국 관료층과 상업자본가들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 민족은행이다

현재 우리은행(상업은행→한빛은행→우리은행)의 전신으로 1899년(광무3) 1월에 설립했다

우리은행 인천지점은 1899년 5월 10일 개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 지점이다

 

 

 

 

예전 삼화고속 정류소 터

1970년 2월 23일 운행을 시작한 인천~서울간 고속버스 정류장이었다

예전 종로2가 사거리에서 출발하는 삼화고속버스를 타고 몇 번인가 온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부터 택시회사가 있던 곳이다

 

 

 

 

6월민주항쟁 기념비

마침점인 동인천역 앞에 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7.57km, 소요시간 6시간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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