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전투는 중국군의 대규모 공격에 맞선 유엔군의 첫 승전보로 미 제2사단 제23연대(프랑스대대 배속)가
1951년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지평면 일대에서 중국군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유엔군이 중국군과 싸워 얻은 최초의 전술적 · 작전적 승리다
지평리전투 이후 유엔군은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과감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지평의 함성
민족의 암흑기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의병의 발원지
6 · 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재반격의 거점
지평리에서 전하는 희망의 승전보
역전의 발판 · 지평리전투
전시공간 2
6 · 25전쟁의 타임라인
1950. 06. 25 북한군의 남침
1950. 08. 01 낙동강 방어선 형성
인천상륙작전 / 전쟁 초기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
1950. 09. 15 인천상륙작전 · 1950. 10. 19 중국군 참전 · 1950. 12. 10 흥남철수작전
1951. 01. 04 유엔군 서울 철수 · 1951. 01. 26 썬더볼트작전 시작
지평리전투 / 중공군 개입 후 유엔군의 첫 승전보
1951. 02. 13~15 지평리전투
새로운 전쟁 그리고 1 · 4후퇴
중국은 유엔군의 38도선 돌파가 임박한 1950년 10월 8일
「항미원조(抗美援朝) · 보가위국(保家爲國)」이라는 명분으로 6 · 25전쟁 개입을 최종 결정했다
중국의 참전으로 6 · 25전쟁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군사지원을 받는 조 · 중 연합군 대 유엔군의 전쟁
즉 공산진영 대 자유진영의 전쟁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중국군의 전술
중국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은 많은 전쟁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실적인 전술이었다
돌파해야 할 핵심지역을 선정하고 집중 공격 후 단계별 공격을 감행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적의 등장에 유엔군은 전투대형이 무너지면서 부대들이 연쇄적으로 붕괴되었다
*
소수부대로 상대 화력과 주의력을 유인하고 주력부대는 상대의 일익(一翼)이나 양익(兩翼)을 공격하여 포위
나팔과 피리 · 꽹과리 등으로 공포심을 유발하면서 바닷가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것과 같은 제파식 공격 반복
탄약이 떨어진 유엔군이 후방으로 철수를 시작하면 후방에 침투해 있던 중국군이 공격하여 섬멸
전환점의 시작
1950년 12월, 유엔군은 패배의식이 만연해 있었고, 유엔군 전쟁지도부는 한반도에서 철수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그때 지상군 총사령관이 된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공격작전을 계획하면서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중국군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게 된다
아군 방어선(분홍색 원) · 중국군 공격((붉은 화살표)
기다렸던 승전보 · 지평리전투
지평리전투는 1950년 중국군 개입 이래 유엔군이 중국군의 대규모 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진지를 고수하며 승리한 최초의 전투였다
이 전투로 유엔군이 중국군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후 38도선을 회복하는 반격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프랑스 대대의 백병전
프랑스 대대를 이끈 몽클라르 중령은 중국군의 피리와 나팔소리에 병사들이 불안해 할까봐 수동식 사이렌으로 맞불을 놓았다
수동식 사이렌에서 나는 엄청난 굉음은 중공군이 불어대던 피리 · 나팔 · 꽹과리 소리를 순식간에 잠재웠으며
예상치 못한 상황에 중국군은 혼란스럽게 했다
프랑스 대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매고 돌격해 중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야간 심리전에 능한 중국군의 전략에 맞섰다
*
당시 프랑스 대대에 180명(카투사 80여 명 · 일반병 100명)의 한국군이 예속되어 있었다
별도의 한국군 중대가 아닌 프랑스 대대로 배치된 한국군들은 프랑스 병사들 사이에 섞여서 역사적인 전투를 치뤘다
일반병으로 입대해 지평리에서 중국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임응상 참전용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2개월 동안 대구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동기생 100명은 1951년 2월 10자로 미 제2사단 제23연대 프랑스 대대에 배속되었다...(중략)...
우리가 이 부대에 도착하기 전에 80여 명의 한국군 카투사가 이미 배속돼 있었고 우리가 부대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주요인물
유엔군 / 폴 프리먼 대령 · 몽클라르 중령 · 크롬베즈 대령
주요 병력 5,600명 · 전사 52명 · 부상 259명 · 실종 4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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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 펑더화이
중국군 병력 50,600명 · 전사 4,946명 · 포로 79명
1940년도 US 김이만 제 김삼만
*
야전삽에 써있다
리지웨이 장군은 전선의 요충지인 지평리 고수를 결심
*
지평리전투 동영상이다
6 · 25전쟁 UN 참전국 소개
2층 전시 코너 3(평화기원실)이다
평화상징물
지평리 전투참전국 전쟁영웅 미국 육군 대령 폴 프리먼(Paul L. Freeman 1907~1988)
6 · 25전쟁 역사 중에 커다란 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지평리전투에서
미국의 폴 프리먼 대령은 우리 군보다 10배나 많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전쟁 지역 중에서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
나는 연대장으로서 어떤 상항에서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소"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전장의 프로답게 직접 총검을 들고 중공군에 대항했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후송도 거부한 채 병사들과 끝까지 싸웠다
절대 물러서지 않았던 폴 프리먼 대령의 굳은 신념은 당시 지쳐가는 병사들의 가슴속에 희망이 되었다
지평리 전투참전국 전쟁영웅 프랑스 육군 중령 몽클라르(Ralph Monclar)
몽클라르 장군은 세계제1차대전과 2차대전을 모두 참전했던 프랑스 육군 3성 장군으로 전쟁영웅이었다
6 · 25전쟁의 소식을 들은 그는 이 땅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직접 600여 명의 병력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였다
대대급 규모의 부대는 중령만이 지휘할 수 있어 그는 중장에서 중령으로 스스로 내려 참전하였다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험난한 지형과 추위를 뚫고 적의 대공세를 물리친 그는 우리 군의 사기를 드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이렌 · 휘발유 버너
지평리 전투의 참상
남으로 이동하는 피난민
임시 활주로
멀리 지평역이 보인다
임시활주로 전경
남으로 이동하는 피난민
화염방사기로 중국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유엔군
모니터를 촬영했다
치열하였던 전투 현장(미 제23연대 2대대 G중대 고지 사수)
지평리전투 후 훈장을 받는 프랑스 대대(몽클라르 중령 외 대대원)
지평막걸리를 만드는 지평주조 건물이 오른쪽 뒤편에 있다
중국군 참전과 유해발굴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 구간에서 북한군의 기습공세로 6 · 25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국군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하여 1950년 10월 25일 제1차 공세를 시작으로
1953년 7월 20일 마지막 공세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6 · 25전쟁 기간 동안 중국군의 병력은 122만여 명이었으며
인명 피해는 사망 11만6천여 명, 부상 22만여 명, 행방불명 및 포로 2만9천여 명 등 총 36만 5천여 명이었다
우리나라는 2000년 정부차원의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현재까지 발굴된 중국군의 유해를
인도적인 배려와 과거의 상흔을 치유하고 한 · 중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발전시켜나가자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
2014년부터 매년 중국으로 송환하고 있다
지평리전투의 용사들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서는 유엔군 5,500여 명과 중공군 50,000여 명의 전투가 있었다
약 10배 가량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를 이끄는 것은 장교지만 전투에 용감히 임했던 사병들이 있었다
프랑스 대대에는 당시 약 100여 명의 군군이 있었는데 박동하, 박문준, 이병선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적군이나 아군이나 모두 끔찍했던 지평리전투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지평리에 있었던 그들의 이름을, 존재를, 희생을, 이제는 기억해야 할 때다
*
박동하 · 박문준 · 이병선씨 사진이 오른쪽 윗쪽에 있다
평화 군인되어보기
배경 등을 고르고 셀프로 사진 찍기
사진은 메일로 보내준다
평화기원 메시지 쓰기
영상체험실
지평리전투를 대형 화면으로 보여준다
중국 인민지원군과의 만남
여러 장의 사진 중 하나다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
지평리전투는 19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에 미 제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 군대대와 함께
북방의 지평리에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 제39군의 사면포위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중부전선 교통 요충지인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력을 전면 방어태세로 배치하여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상태에서 4일 동안이나 막아내었으며
그후 미 제5기병연대가 후방으로부터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막아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으며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이후 최초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게 되어 재반격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 공적과 전몰장병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 마당
3층 지평리전투기념관 전망대에서 봤다
지평리전투 개요
망미산 · 지평면사무소
지평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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