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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망원정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망원정 걷기다

합정역 7번출구
시점이다

 

 

절두산순교성지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楊花鎭)은 조선시대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기에 영조 30년(1754) 군진이 설치되었다
조선 조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양화진까지 들어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으며, 그로 인해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
복음이 선교사에 앞서 전해진 한반도에는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이래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였다
1890년 7월 미국인 의료선교사 헤론이 사망하자 미 공사관은 조영통상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조선 조정에 묘지를 요구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몇 차례의 담판 끝에 한양에서 멀지 않은 양화진 인근의 땅을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의 묘지로도 쓰였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내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A · B묘역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사진이 많아 따로 올렸다

 

 

베텔(Ernest Thomas  Bethell · 배설(裵設) · 1872~1909)
영국 출신 언론인으로 영국 〈데일리크로니클〉지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1904년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베델의 조국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도 일본을 편드는 기사를 싣는 것이 유리했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베델은 양기택 · 신채호 · 박은식 등 민족지사들을 신문의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간 '국채보상운동'의 지원금총합소로 대한매일신보사는 그 명성이 자자했다
더욱이 1908년 4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베델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자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간계를 짜내었고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영국 영사관 고등법원에서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서 3주간 금고형에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심신이 약해진 그는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소천하였다
1910년 양화진 베델의 묘에 장지연이 지은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로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4년이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 비를 세웠는데 지금 양화진에 있는 비문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C · D묘역

 

 

켄드릭(Rubye Rachael Kendrick · 1883~1908)
켄드릭은 1883년 1월 28일 미국 텍사스 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텍사스 엡윗청년회의 대표가 되었고 1907년 9월 텍사스 엡윗 청년회 후원으로 미국 남감리회 해외 여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첫 선교지인 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면서 아동교육을 담당하는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
1908년 엡윗청년회가 텍사스에서 선교대회를 열고 있을 때
조선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 한 통이 도착했는데 그것은 켄드릭의 선교 활동을 보고하는 서신이었다
서신에는 조선의 기후환경과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소개하는가 하면 인심이 넉넉한 조선 사람들을 극찬하면서
하루빨리 이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서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는 자신의 신념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편지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
그러나 그녀는 급성 맹장염으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던 중
조선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5세의 나이로 꽃다운 청춘을 낯선 땅에서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변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말은 텍사스 엡윗청년회 선교대회장에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선교의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들 중 20여 명이 마침내 조선의 선교사로 지망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선교 헌금을 모아 매년 선교비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H묘역
H묘역에는 모두 63기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중 선교사가 2명이다
이곳에 외국인 묘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50년대 말이며 1960년대 이후 미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묘지로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1950년대에 5기 · 1960년대에 23기 · 1970년대에 14기 · 1980년대에 9기 · 1990년대에 10기 · 2000년대 2기 등이 조성되었다
양화진에는 미군 관련 무덤이 총 73기(H묘역 39 · G묘역 28 · 기타 6) 있다
*
미용 애부런(MI YONG AVELLONE)의 묘비가 가운데 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G묘역
64기의 무덤에 65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태어난 지 1년 이내에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곳에는 1960년대에 어린이 무덤이 집단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총 39기(40명)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 어린이 무덤의 조성 배경과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다
이외에 1940년대에 4기 · 1950년대에 10기 · 1970년대에는 10기가 조성되었다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 2022 마포구 생생문화재 양화진 근대사 뱃길탐방
천주교 성지인 잠두봉과 주변의 양화나루터를 가르킨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 붙여진 이름이다
양화나루터는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군사상 중요 기능을 맡았던 곳이다
조선 근대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2015년부터 「양화진 뱃길탐방」을 하고 있다

 

 

양화진(楊花鎭 버들꽃나루) 옛터
이 일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였다
영조 30년(1754)에는 한강수로의 경비를 통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곳에 군진(軍鎭)이 설치되어 상비군이 주둔하였다
이곳을 양화진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군징 옛터의 일부를 장대석(長臺石)으로 구획해 놓았다

 

 

양화진(楊花鎭 버들꽃나루) 옛터

 

 

양화진 공원
합정동 사거리에 있는 빌딩이다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일자 1981. 10. 27

 

 

한국기독교100주년교회

 

 

망원시장

 

 

고향집
T.V.에 나왔던 맛집이다
칼국수 · 콩나물비빕밥 3,500원이다

 

 

동일루(東一樓)
30년된 맛집이다

 

 

망원정 터(望遠亭址)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
마포구 망원동의 동명이 유래된 양화나루 서쪽에 있는 옛 모습의 정자다
원래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세종대왕 6년(1424)에 지은 별장이다
그 이듬해인 1425년에 가뭄이 계속되자 세종이 농가 형편을 살피려 효령대군이 기거하던 마포에 거동하였다가
효령대군의 별장인 정자에 올랐을 때 마침 단비가 내려 들판을 흡족히 적시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명하여 글씨를 내렸다
세종은 그후 자주 희우정에 나와 농사 일을 살피고 수군들의 군사훈련을 참관했다
이후 1484년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게 되자
월산대군은 정자를 보수해 '먼 경치도 절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름을 망원정(望遠亭)이라 고쳐 지었다

 

 

망원정(望遠亭)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따라 매년 봄 가을 이곳에 거동해 농사의 정도를 살피고 문인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겼으며
형인 월산대군이 죽은 후에는 정자를 다시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해인 1506년 연산군은 창의문 밖 탕춘대에 호화찬란한 탕춘경을 짓게 하고
한강변에 있는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고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확대 공사가 중단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은 본래의 경치 좋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고, 명사들이 시를 읊는 명소로 바뀌었다
또 이곳은 주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됐으며
잠도봉(현 절두산)과도 가까워 잠두봉으로 가는 길에 들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망원정(望遠亭)
지난 2005년 10월 9일, 당시 세종이 쓴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이란 친필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세종 7년(1425) 4월, 세종이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낸 뒤
효령대군이 있던 합강정(合江亭)을 방문하여 가뭄으로 힘들어하는 백성을 걱정하던 중
때마침 큰 비가 내리자 세종은 이를 어진 형님의 덕이라고 칭송하며 비가 와서 기쁘다 하여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하였다

 

 

망원정(望遠亭) 현판
세종은 그 후 희우정에 자주 행차하여 농정을 살피고 수전(水戰) 연습을 관람했다
이때 대포를 발사하는 등 실전과 같은 훈련을 시행하면서 신하는 물론 세자와 대군들도 희우정에 올라 관람하였다
이로써 희우정 부근은 명승지로서만이 아니라 수군과 육군의 훈련장으로도 유명해지게 되었다

 

 

망원정 내부
이후 성종 15년(1484)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정자를 크게 고치고
「아름다운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멀리 바라보다」라는 뜻인 망원정(望遠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종을 위시하여 이후 역대 왕들은 세종 때와 마찬가지로
매년 봄 가을 서교(망원 · 합정 · 성산 · 서교지역)에 나와 농사 작황을 시찰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관람하였다
왕이 망원정에 거동할 때에는 수행 중신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여 우승자에게는 활 1장씩을 하사하는 등 문무정신을 함양하곤 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사신들도 망원정에 올라 시문을 읊은 이들이 많았다
*
희우정(喜雨亭) 현판이 있다

 

 

희우정(喜雨亭) 현판
세종 7년(1425)에 세종이 농사 형편을 살피기 위해 왔을 때 이곳에 들렸는데
때마침 내린 소나기로 들판이 촉촉히 젖는 것을 보고 「기쁜 비를 만난 정자」라는 뜻의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망원정(望遠亭)
이처럼 유서 깊은 망원정도 1925년(을축년) 서울지역 대홍수와 한강개발사업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후 1986년 한강변문화유적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시행된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의 문헌고증 및 1987년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의 복원이 결정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건물지 유구는 밝힐 수 없었으나
정원석으로 보이는 괴석과 장초석으로 쓰였던 파손된 석촌들의 존재와 변계량(卞季良)의 「희우정기」의 내용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
현재 건물은 1989년 다시 지은 것으로 건물 바깥쪽에는 망원정 · 안쪽에는 희우정 현판을 달았다

 

 

망원정의 인물들

 

 

희우정에서 망원정

 

 

망원정에서 시(詩)를

 

 

옛 지도 속의 망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