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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그의 가족 145명이 다른 이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당시 세상의 변방이던 〈Corea〉에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헌신하였다
또 이들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를 살펴보면 이들을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맺은 열매들을 확인할 수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楊花鎭)은 조선시대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기에 영조 30년(1754) 군진이 설치되었다
조선 조정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양화진까지 들어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으며, 그로 인해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
복음이 선교사에 앞서 전해진 한반도에는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이래 서양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였다
1890년 7월 미국인 의료선교사 헤론이 사망하자 미 공사관은 조영통상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조선 조정에 묘지를 요구하였으며, 조선 조정은 몇 차례의 담판 끝에 한양에서 멀지 않은 양화진 인근의 땅을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화진에는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의 묘지로도 쓰였다
*
양화진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복음화와 근대화를 위해 진력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소가 있는데
이들은 복음전파와 성경번역 · 교육과 의료사업 · 그리고 당시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했다
*
(재)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은 1985년 경성구미인묘지회로부터 양화진외국인묘지 소유권을 증여받았다
재단은 양화진을 개신교 성지로 가꾸기로 결정하고 1986년 한국 교회 성도들과 재계 인사들의 헌금으로 선교기념관을 건립했으며
당시 서울유니온교회로 하여금 묘지를 관리하면서 선교기념관에서 예배하도록 했다
*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은 정부와 서울시에 양화진일대를 개신교성지공원으로 조성해 줄 것을 거듭 청원하였다
그 결과 2003년 서울시와 마포구는 개신교의 양화진외국인묘지와 천주교의 절두산성지를 아울러
〈양화진성지〉로 명명하고 두 성지 사이에 양화진성지공원을 조성했다
재단은 2005년 7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하여
양화진외국인묘지와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하여 명실공히 개신교 성지로 가꾸는 일을 전담토록 했다
재단과 100주년기념교회는 마포구청과 협의하여 이 묘원의 명칭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정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A · B지역

 

 

베텔(Ernest Thomas  Bethell · 배설(裵設) · 1872~1909)
영국 출신 언론인으로 영국 〈데일리크로니클〉지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1904년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베델의 조국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도 일본을 편드는 기사를 싣는 것이 유리했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베델은 양기택 · 신채호 · 박은식 등 민족지사들을 신문의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간 '국채보상운동'의 지원금총합소로 대한매일신보사는 그 명성이 자자했다
더욱이 1908년 4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베델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자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간계를 짜내었고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영국 영사관 고등법원에서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서 3주간 금고형에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심신이 약해진 그는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소천하였다
1910년 양화진 베델의 묘에 장지연이 지은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로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4년이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 비를 세웠는데 지금 양화진에 있는 비문이다

 

 

헐버트(HOMER B. HULBERT · 1863~1949)
헐버트 선교사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 받는 분이다
그는 조선에 관한 글을 써서 외국에 알렸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고종의 밀사로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과 함께 참석하여 우리나라 주권회복에 적극 노력하였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지만 여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문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트성당 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씌여있다

 

 

하디(Robert A. Hardie · 1865~1949) 영적대각성운동 기념비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로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제 100주년을 맞아 다시 영적대각성의 불길을 사모하고
그가 이 땅에 남기고 간 사랑하는 두 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이 비를 세워 역사에 뜻을 기리고자 한다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 강모인 · 1853~1920)
캠벨은 1852년 미국 텍사스 주에서 출생하였고 미 남감리회 선교사로 한국 여성들을 위해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이미 중국에서 10년 동안 선교사역을 하였으며 1897년 10월, 44세 때 남감리회의 첫 번째 여성선교사로서 중국인 양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1898년 10월 2일 지금의 종로구 내자동에 여성들 대상의 학당을 열었다
그리고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배화학당」으로 이름 지었다

 

 

켄드릭(Rubye Rachael Kendrick · 1883~1908)
켄드릭은 1883년 1월 28일 미국 텍사스 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텍사스 엡윗청년회의 대표가 되었고, 1907년 9월 텍사스 엡윗 청년회 후원으로 미국 남감리회 해외 여선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첫 선교지인 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면서 아동교육을 담당하는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
1908년 엡윗청년회가 텍사스에서 선교대회를 열고 있을 때
조선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 한 통이 도착했는데 그것은 켄드릭의 선교 활동을 보고하는 서신이었다
서신에는 조선의 기후환경과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소개하는가 하면 인심이 넉넉한 조선 사람들을 극찬하면서
하루빨리 이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서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는 자신의 신념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편지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급성 맹장염으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던 중
조선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5세의 나이로 꽃다운 청춘을 낯선 땅에서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변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말은 텍사스 엡윗청년회 선교대회장에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선교의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들 중 20여 명이 마침내 조선의 선교사로 지망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선교 헌금을 모아 매년 선교비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랜들(Pauline Glass Randle · 1890~1925)
1890년 6월 8일 미국 루이지애나 주 아카디아에서 남감리교회 목사 랜들(Robert Randle)의 딸로 출생
맨스필드대학과 스카렛대학을 졸업한 후 1918년 한국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 후 5년간 개성과 춘천에서 여성사업을 통한 선교사업에 종사한 후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에모리대학 문과를 수료했다
1925년 2월 재차 내한하여 철원지방에서 선교하던 중 급성 맹장염에 걸려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 악화로 그해 5월 19일 별세하여, 5월 25일 태화여자관에서 발인 양화진에 묻혔다

 

 

젠킨스(Beatrice Aurora Jenkins · 1879~1927)
포스터 갬블(F. K. Gamble · 1879. 8. 5~1928. 1. 14)의 부인이다
*
비석의  총탄자국은 한국전쟁 당시 양화진전투가 치열했음을 알려준다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 파락만(巴樂萬) 가족
YMCA를 통해 조국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국의 청년들에게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준 인물이다
한국에 처음 YMCA를 세운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상류층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초대교회는 주로 못 배우고 가난한 소외계층들이 구성원들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상류층의 청년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브로크만은 한국 학생 YMCA 운동의 개척자로서 전국 규모의 ‘하령회(수련회)’를 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학생회 간사이던 이승만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면서 수많은 학교에 YMCA 학생회를 조직하였다
한일합방 이후에 이루어진 하령회는 특히 성황을 이루었는데 조국을 잃은 학생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항일과 애국을 새롭게 다짐하였다
일제는 YMCA와 기독교세력을 민족운동의 온상으로 보고 이를 와해시키기 위해서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브로크만은 이상재를 도와 YMCA가 일제강점 후 유일한 전국적 규모의 민간단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편 브로크만은 1923년에 농촌 운동을 시작하여서 미국 농촌 기술자 10명의 파송을 약속 받기도 하였다
1927년 브로크만은 과로로 인한 중병에 걸려 미국으로 돌아갔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현재 양화진에는 브로크만 선교사와 모친 그리고 딸이 묻혀있다

 

 

푸릭 사관(JENNY SOFIA FRICK · 1886~1912) · 스웨덴 · 계급 참위 · 직책 사령관 비서
1911년 임관 후 독신으로 한국에 파송되어 4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고 쪽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누어 주며
문서전도 · 축호전도 · 가로전도 등 전도에 힘을 쏟던 중 급성뇌염으로 승천했다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순직자다

 

 

마텔(EMILE MARTEL 1874~1949)

 

 

채핀(VICTOR D. CHAFFIN · 1881~1916 / ANNA B. CHAFFIN · 1883~1977) 부부
채핀 선교사 부부는 일생을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특히 아내 안나 선교사는 여성 신학교육과 농촌 여성지도자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빅터 채핀 선교사는 1811년 미국 인디애나 주 뉴하모니에서 태어났으며 안나 채핀 선교사는 1883년 아이오와 주 매닝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만나 1911년 6월 결혼했다
빅터 채핀 선교사는 1913년 4월, 아내와 함께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직후 언더우드 선교사를 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선교사로서 예수를 위해 그의 모든 삶을 바쳤으나 내한 3년 만에 과로로 사망해 양화진에 안장됐다
안나 채핀 선교사는 남편의 사망 이후 더 본격적으로 선교사역에 헌신했다
그녀는 1920년, 미 남북감리교단이 연합하여 설립한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의 초대 교장과
남녀공학이 된 협성신학교의 초대 부교장을 역임하면서 여성 신학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1940년 일제의 추방에 의해 한국을 떠났던 안나 채핀 선교사는 광복 이후
다시 한국에 들어 와 이화여대 교수, 감신대 명예교수, 이화학원 이사장으로 봉직했다
1962년 돌아간 안나 채핀 선교사는 1977년 미국에서 사망했으나, 양화진에 묻힌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로사(BLANCHE ROSA 배의례(裵義禮) · 1888~1938)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 1829~1908

 

 

로사(BLANCHE ROSA 배의례(裵義禮) · 1888~1938) · 에케르트(HERR Franz Eckert 애거다(埃巨多) · 1852~1916)
프란츠 에케르트는 독일 출신의 음악가 · 작곡가 · 그리고 지휘자로서 한국과 일본에 서양 음악, 특히 독일 군대음악을 소개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실레시아 프러시안 지방의 도시인 누로드에서 태어나
브레스라우와 드레스덴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나이세에서 군사음악을 전공했다
그는 빌헬름스하펜에서 왕립해군군악대의 밴드마스터로 일하던 중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 고문으로 초청받아 1879년 3월 일본에 왔으며 이후 20년 동안 활동했다
에케르트는 1899년 건강상 문제와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2세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어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독일에서의 생활은 짧게 끝났다
그것은 1900년에 극동의 한 나라, 대한제국으로부터 새로운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정부로부터 궁정악단을 조직하고 대원들에게 서양악기 연주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에케르트는 한국 최초의 궁정군악대를 조직하여 궁정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으며
매주 목요일에는 탑골공원에서 대중을 위한 연주회도 열었다
한편, 에케르트는 서울 도착 직후부터 한국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 작곡에 착수했는데
그 곡은 1902년 9월 9일, 고종황제 탄신일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에케르트는 대한제국으로부터 3품의 작위를 받았다
에케르트는 1916년 8월 6일(64세) 인후두암으로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린필드(MAUDE SAXE GREENFIELD · 1874~1910)
그린필드 선교사 부부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온몸을 던져 교육과 복음 전파에 힘써 큰 업적과 감동을 남겼다
윌리스 그린필드(M. Willis Greenfield · 1881~1917)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소년 시절 캐나다로 이주하여 시라큐스대학과 어번신학교(Auburn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1907년 5월 마우드 그린필드와 결혼하고 그해 여름 아내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서울에서 남편은 경신학교 전신인 존 디 웰즈학교(John D. Wells School) · 아내는 정신여학교에서 기독교의 일꾼이 되기 위해 모인 학생들을 가르쳤다
마우드 그린필드 선교사는 1909년 정신여학교의 6대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이듬해 1월 출산 후유증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아내의 별세로 그해 여름 일시 귀국했던 그린필드 선교사는 다시 내한하여 1912년 2월부터 대구와 경상도의 오지에서 복음 전도에 힘을 쏟았다
용감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성품을 지닌 그는
경북 북부와 동해안 일대의 넓고 개발되지 못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선교사들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먼 거리를 걸어서 전도한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몸을 돌보지 않는 전도여행 탓에 그는 건강을 잃어 1914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경상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밀즈 선교사와 재혼하고
다시 한국에 와 복음을 전하려는 소망을 품었지만 1917년 12월 별세함으로써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벨 R. 겐소(Genso, Rittgers Mabel)
1882년 4월 5일 미국 아이오아 주 디모인에서 출생하여 디모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02년 디모인 하이랜드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무디 성경학교를 수료 했다
그 후 아이오아 주 폴크에서 초중등학교 교사 로 봉직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1906년 6월 6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선임 되어 1908년 11월 27일 내한하여 서울에서 활동했다
한국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뒤 1910년 정신여학교 제7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1910년 프레드릭 겐소와 한국에서 결혼하여 1남 2녀의 자녀를 낳았다
1916년까지 영어교사와 아동교육 및 심리학교사로 봉직하고, 1920년 정신 교장 서리로 다시 취임했다 그 후 전도사업과 사회봉사사업에 진력했다
1923년 서울 안동교회 부설 초대 유치원장으로 있으면서 영어 성경반을 인도했다
YWCA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기독교 여성단체 등 에서 끊임없이 활동했다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출국하여 1947년 다시 내한하고 계명협회(啓明協會) 협동 총무로 활동하다가
1956년에는 보육원 에서 아동 부녀 복지사업에 참여했다
 한국에서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출국하여 1957년 6월 28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Arlington)에서 별세하여
유언대로 양화진에 남편과 아들 곁에 안장되었다
 *
세 살 때 숨져 가장 먼저 양화진에 묻힌 아들 존( John Rittgers 1911~1914)과 부부가 함께 묻힌 묘비에는
“Them also which sleep in Jesus will God bring whit Him.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 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라는 성경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4)이 쓰여 있다

 

 

무어(SAMUEL FORMAN MOOR · 1860~1906)
백정 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운동의 조력자로 칭해지는 인물이다
무어는 미국 매코믹신학교 재학 중 언더우드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졸업 후 32세 때 선교사로 왔다
그는 꾸준한 노방전도로 사람들을 모아서 곤당골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열었다
학생들 중에 관자골에 사는 백정 박씨의 아들 봉주리(Pong Choolie)가 있었는데 
어느 날 봉주리에게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무어는 박씨를 여러 차례 위문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무어가 외국인 한 사람을 박씨에게 데리고 왔다. 바로 고종의 주치의 에비슨이었다
에비슨은 여러 차례 왕진하면서 정성스럽게 치료해주었고 마침내 박씨는 완쾌되었다
박씨는 왕의 주치의가 백정을 치료해 준 것에 감격해서 곤당골교회에 출석해 세례도 받고 성춘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당시 교회에 나오던 양반 교인들은 백정과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다면서 예배당 앞쪽에 양반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무어에게 졸랐다
무어가 ‘복음 안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결국 이들은 따로 교회를 세우고 갈라졌다
한편 신분 차별에 설움 당하던 많은 백정들은 복음 안에 차별이 없다는 무어와 박성춘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3년 후인 1898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는 분리되었던 홍문동 교회와 다시 합하여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 드리는 중앙교회로 거듭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백정교회로 불렀다
이후 중앙교회는 1905년 8월에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교회가 되었다
장티푸스에 걸렸다 살아난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에비슨이 세운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대의 전신)의 1회 졸업생으로 모교에서 1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것은 당시 백정 신분으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박성춘은 승동교회(곤당골교회)에서 1911년 장로로 안수를 받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3년 후 왕손이던 이재형도 같은 승동교회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았다
이것은 차별 없는 복음을 직접 경험한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무어의 사역이 거두어들인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교사약란지(金敎士若蘭誌)

 

 

벙커(Dalzell BUNKER 방거(房巨) · 1853~1932)
벙커는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육영공원이 양반 자제들의 학업 태만과 재정지원 중단으로 문을 닫자 벙커는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으로 옮겨 간다
또한 아펜젤러가 순직한 후에는 배재학당의 3대 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 벙커는 한국에 들어온 이듬해 민비의 시의였던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와 결혼하였다
당시 배재의 학생들은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의 강연을 통해서 서구의 정치사상과 민족의식에 눈뜰 수 있었다
그런데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중심인물들이 수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때 벙커가 아끼던 제자 이승만도 함께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벙커는 동료 선교사들과 힘을 모아서 한성감옥 수감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고
결국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져서 그들은 자유롭게 차입도 하고 전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이상재 · 이원긍 · 안국선 등 12명의 고관 출신 양반과 선비들이 최초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벙커는 배재학당장을 사임한 후, 조용히 전도와 교육사업을 하다가 1926년 73세 고령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소천 하였지만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유언에 따라 그의 부인이 유골을 안고 와서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위더슨(MARY WIDDOWSON · 1898~1956)
구세군의 한국 선교는 1908년 호가드 대령 부부가 파송되면서 시작되었다
양화진에는 몇 명의 구세군 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묻혀 있는데 위더슨 부인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위더슨 부인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로 건너가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구세군사관으로 일하다가 1926년에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떠나는 같은 구세군 크리스 위더슨과 결혼하고 서울에 와서 7년을 살았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서울 변두리의 고아원에 보금자리를 차리고 줄곧 고아들과 같이 생활하였는데 이들의 첫 아들도 물론 고아들과 친구로 같이 자랐다
이들은 늘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었 있었는데,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들이 여러 가지 병균을 묻혀 왔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결국 발진티푸스에 걸려 고열로 시달리게 되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고아들을 걱정하였다
위더슨 부부는 7년의 한국생활 후 이번에는 아프리카 케냐로 파송되어 그곳에서 7년 동안 고아들을 돌보았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한창 전쟁 중이던 한국으로 가라는 음성을 듣려 주셨고 이들은 망설임 끝에 순종하였다
1953년 1월 부산에 도착해서 한국 구세군 사령부를 조직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일도 계속하였다
하지만 위더슨 부인은 위암에 걸려 얼마 후인 1956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소천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편에게 남겼다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내가 죽는다고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늘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레이트하우스(GLARENGE RIDGLEY GREATHOUSE · 1846~1889)

 

 

허치슨(WILLIAM DUFLON HUTCHISON 할치신(轄治臣) ·  ?~1901)
허치슨은 영국의 교장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으며 1886년에 세운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핼리팩스 등과 함께 조선인 정부 고관 및 그 자제에게 영어를 가르쳐 조선인 해관원을 육성하는데 기여하였다
1887년 조선해관 제2대 총세무사 메릴(Henry Ferdinand Merrill) 아래에서 Chief Secretary(수행실장)직을 역임하다 사직하고 귀국하였다가 다시 내한하여
1893년부터 우리나라 해군사관학교의 효시인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어교육에 공헌하였다

 

 

스트리플링(ALFRED BURT STRIFLING 설필림(薛弼林) · 1838~1904)
전직 경찰출신인 스트리플링은 1883년 6월 16일 인천에 도착하여 조선해관 창설 당시 초대 인천해관 세무사를 맡아 2년 3개월간 근무하였다
조선해관 초대 총세무사 묄렌도르프가 경질된 후 약 1개월간 서리총세무사를 맡았지만 제2대 총세무사 메릴이 청국에서 부임하자 조선해관에서 물러났다
조선의 광산개발에 적극 나섰으며 대한제국 수립 후 경무청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피터스(ELIZABETH CAMPBELL PIETERS · 1872~1906)
엘리자베스 피터즈 선교사는 1872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노드웨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학창시절부터 해외선교의 꿈을 갖고 있었으며 1902년 가을,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에 온 피터즈 선교사와 결혼했다
그들은 결혼 후 2년 동안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후 피터즈 선교사가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1904년 9월 남편과 함께 내한했다
그러나 그녀는 필리핀에서 얻은 병으로 1906년 1월 5일 사망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피터즈(Alexander A. Pieters 피득(彼得) · 1871~1958) 선교사는 한국 선교 초창기에 성경, 특히 시편 번역과 보급의 공로자이다
그는 1871년 러시아에서 출생한 유태계 러시안으로 1895년 4월, 일본에서 미국 선교사 피터즈를 만나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이름도 피터즈로 개명했다
그리고 미국성서공회 한국 책임자로 내한했다
그는 유태계로서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천부적인 어학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 추진되던 성경번역에 동참하게 되었고,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시편성경인 〈시편촬요〉를 번역 · 출간했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04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여 구약성서번역위원과 성서개역위원으로 활동했다
피터즈 선교사는 1941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양화진에는 피터즈 선교사의 두 아내, 엘리자베스 캠벨과 에바 필드 선교사가 묻혀 있다

 

 

모야곱(JAMES H. MOORE · 1914~1967)
뉴욕 출생으로 애즈베리대학 · 드류신학교 ·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운 후
1947년 10월 미연합 감리교회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여 1948년 내한한 부인과 함께 한국 음영 및 연극 선교에 종사하였다
1949년 그에 의해 설립된 한국 기독교 시청각교육국(K. A. V. C)은 불모지였던 시청각 교육의 한 전기를 마련한 후 1967년 4월 4일 한국에서 병사하였다
부인(Margaret Martin Moore 모진주)은 1919년 1월 4일 만주 용정에서 캐나다 의료 선교사 마틴(S. H. Martin  閔山海)의 장녀로 출생하여
1927년 가족을 따라 서울로 이주, 외국인 고등학교를 마친 후 애즈버리대학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전공, 결혼 후 내한하여
이화여자 대학교 · 장로회 신학대학 · 감리교 신학 대학에서 연극학을 강의하고 실제로 지도하였다
1967년 남편 사별 후에도 한국에 남아 활동을 하였다
1969년 캔터키 대학 대학원에서 연극학 석사 · 1969-72년 감리교 신학대학 · 이화여대에서 교수
1970년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협동 총무 · 1976년 극단 가교를 인솔하여 홍콩 · 일본 · 대만 순회공연했다
배화학원이사 역임 후 1984년 6월 은퇴한 후 귀국했다
그가 연출한 작품은 말괄량이 길들이기 · 예물 · 12야 · Mikado 등이 있다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 권세열) · 도로시 킨슬러(DOROTHY WOODRUFF KINSLER 권도희)
프란시스 킨슬러 목사는 메리빌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1928년 10월 4일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대한민국 평양에 파송되어 내한하였다
(이미 누이 마리안은 1922~42년까지 서울에서, 헬렌은 1922~30년까지 대구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었다)
그는 1929~36년까지 숭실대학에서, 1931~70년까지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신약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리고 불우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성경구락부를 1929년에 창설하여
4대 교육원리(종교 · 지육 · 체육 · 봉사)에 입각한 교육으로 현재까지 약 150만 명의 청소년을 교육시켰다
그는 이 땅에서 4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1970년 9월 14일 정년으로 은퇴한 후 귀국하여 롱아일랜드 센터모리츠교회에서 1976년까지 섬긴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날까지 한인 이민교회를 돕는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
도로시 킨슬러 여사는 윌슨대학을 졸업한 후 프린시스와 평양에서 결혼한 후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왔다
한국전쟁 전후 격변기에 고아원 및 자선사업 단체에서 구호사업을 하였으며
특히 미국으로 입양될 신체장애 아동들을 위한 수양부모로서 그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썼다
그리고 정신여고 및 장신대에서 영어교사로서 사역하였다
지녀로는 현재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딸 헬렌과 1972년 이후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아들 아더(권오덕)
그리고 중미와 LA에서 신학교 교수와 선교사로 사역한 로스 등 삼남매가 있다

 

 

르젠드르(Charles W. Legendre 이선득(李善得) · 1830~1899)
1830년에 프랑스 올렝에서 출생한 르젠드르는 왕립렝스학교(Royal College of Reims)에서 수학하였으며 파리대학(University of Paris)을 졸업하였다
1855년에 미국인 클라라 빅토리아(Clara Victoria Mulock)와 결혼한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국적을 획득하였다
그 뒤 남북전쟁에 참전하였는데 1862년 3월과 1864년 5월에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결국 1864년 10월에 전역하였으며, 1865년 3월에 준장으로 명예 진급하였다
1866년 7월에 르젠드르는 중국 하문(厦門) 주재 미국영사로 임명되었다
1867년 3월에 미국 상선 라버(Rover)호가 대만 해안에 좌초하였는데 대만인들이 미국 승무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르젠드르는 미국 군함으로 직접 대만으로 가서 미국 상선이 좌초된 지역과 대만인의 살해 행위를 직접 조사하였다
조사를 마친 후 복주(福州) 지역의 청 관리에게 대만에 군사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개인 소유의 군함을 대만으로 파견하였다
결국 르젠드르는 대만 지역에서 난파한 미국인과 유럽인 선원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약을 성사시켰다
1871년에 유구(琉球) 선박이 대만에 좌초하자 르젠드르는 대만으로 가서
난파 선원의 안전에 관한 조약의 적용 범위를 일본인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 후 르젠드르는 1872년에 미국으로 귀국하는 도중 일본에 들렀는데
외무대신 부도종신(副島種臣 소에지마 타네오미)은 르젠드르를 외교 및 군사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르젠드르는 부도종신 일행과 함께 1872년 12월에 북경으로 가서 대만인의 유구인 살해사건에 관한 청일 교섭에 참여하였으며
1874년에는 일본의 대만 출병을 기획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르젠드르는 영사관 근무지를 이탈한 죄목으로 상해에서 체포됨으로써 이후 일본의 대만 출병에 관여할 수 없었다
1875년에 외교관을 은퇴한 후 1890년까지 개인 자격으로
대외중신(大隈重信 오쿠마 시게노부)의 고문 역할을 수행하면서 일본의 개혁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중에는 일본이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정치적 · 사회적 요건에 관한 글과 조선 · 대만 침공을 주장한 글도 있었다
한편 1884년 11월에 르젠드르는 신호(神戶 고베)를 거쳐서 조선을 방문하였다가 갑신정변을 경험하였는데
당시 청국인들이 르젠드르를 위협한 일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르젠드르는 1890년에 고종의 초청으로 조선으로 건너와서 조선 정부의 고문이 되었으며 1899년 9월 2일에 서울에서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핼리팩스(THOMAS EDWARD HALLIFAX 해래백사(奚來百士) · 1832~1908)
헬리팩스는 조선인들에게 처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초대 총세무사 묄렌도르프의 건의로 설립한 ‘동문학’의 교사로 발탁된 영국인이다
조선인으로서 최초 해관원이 된 남궁억과 홍우관 등이 그의 제자이며

임명 후 20년 이상을 우리나라에서 영어교사로 활약하여 조선인 해관원을 육성하는데 기여하였다
한편 그는 전신기술자로서 조선의 통신선로가설(남로가설)에도 기여했다
일본인 부인 사이에 얻은 외동딸 아그네스(Agnes Florence)와 나란히 묻혀 있다

 

 

아편설라 앨리스 우리백가(ALICE REBECCA APPENGELLER · 1885~1950)

 

 

웰본(REV ARTHUR G. WELBON · 1912~1914) 가족
웰본 선교사 부부는 원주 · 안동 · 대구 등 우리나라 오지에 복음을 전한 선교 개척자이다
웰본 선교사는 1866년 8월, 미국 미시건 주 이스트맨빌에서 태어나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 있는 매칼레스터대학과 캘리포니아 샌 안셀모에 있는 샌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 10월,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사로 내한했다
1년 뒤인 1901년 9월, 1899년부터 조선에서 간호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사라 선교사와 결혼했다
웰본 선교사는 1909년까지 서울 선교부에서 사역하며 원주 선교부 설치에 기여했으며 1909년부터 8년간 안동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간호선교사인 아내와 함께 농촌 · 산촌에서 진료를 통한 선교에 주력하여 경상도 북부지역 복음화에 공헌했다
웰본 선교사 부부는 아내 사라 선교사의 건강이 나빠져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3년 만에 웰본 선교사는 혼자 다시 내한하여 대구에서 활동하던 중 1928년 과로로 사망했다
양화진에는 웰본 선교사와 그들의 6남매 중 태어난 지 10일 만에 사망한 첫째 아들 하비와 3살 때 사망한 막내 딸 앨리스 등 3명이 묻혀 있다
아내 사라 선교사는 1925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허스트(JESSE WATON HIRST 허시태(許時泰) · 1864~1952) 가족
할보 선교사는 세브란스병원장을 역임한 허스트 선교사의 아내로 송도 선교의 개척자이며, 문서선교의 선구자이다
할보 선교사는 1875년 3월, 미국 일리노이 주 록포드에서 출생하여 위싱턴 D.C.에서 자랐다
할보 선교사는 1901년 남감리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할보 선교사는 송도선교부 총무로 사역하면서 송도 최초의 남자학교인 송도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이후에는 감리교 선교잡지인 〈The Korea Methodist〉 편집인
감리교와 장로교의 연합 신학잡인 〈The Korea Mission Field〉 스탭으로 문서 선교에 헌신했다
그녀는 1907년 3월, 세브란스병원 의료선교사인 허스트 박사와 결혼한 이후에는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에서 교사로 헌신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강건하지 못했으나 모든 정열을 선교를 위해 쏟다가 1928년 2월 사망하였는데 4살에 죽어 양화진에 묻힌 딸 캐롤 곁에 안장됐다
할보 선교사의 남편 허스트 선교사는 1920년대 세브란스병원장을 지내며 우리나라 의료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의료선교사이다
1864년 출생한 허스트 선교사는 1899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894년 9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1934년 선교사를 은퇴한 후 귀국하여 지내다가 1952년 플로리다에서 사망했다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ILDS · 1867~1951) 가족
레이놀즈는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이면서 한글성경번역에 크게 공헌하였던 선교사다
그는 햄펀시드니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는데 특별히 언어에 재능이 많아서 신학교에서 성서 원어와 라틴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레이놀즈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언더우드의 영향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안식년 기간에 미국에서 열린 해외 선교 신학교연맹 대회에서 한국 선교에 대해서 연설하였는데
마침 그 곳에 있던 레이놀즈와 몇 사람의 신학생들은 크게 감동을 받아서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소속된 남장로회 선교부와 교회 어디에서도 한국선교에 관심이 없어서 선교후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친형과 언더우드가 남장로회에 이들의 선교비 명목으로 3천 달러를 헌금해서 이들은 마침내 1892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들이 레이놀즈 부부를 비롯한 7인의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들이었다
이듬해 열린 장로회선교사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남장로회는 전라도와 충청도지역에서 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레이놀즈는 전라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레이놀즈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
성경번역은 외국인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성경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의 공이 컸다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성경번역의 과정은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하지만 끈기있게 일을 진행하던 레이놀즈는 마침내 그 열매를 보게 되었다
한 권씩 개인역이나 수정역으로 나오던 신약 전체를 묶어서 1900년 단권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이다
출판된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되자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은 아예 성경번역에만 매달렸다
이들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하였다
히브리어에 정통하였던 레이놀즈는 1910년 구약성경의 출판에서도 주역의 역할을 하여서 신 · 구약 성경 한 권이 온전히 출판되는 일에 쓰임 받았다
레이놀즈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도 일하였다
신학지남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간행한 기독교신학연구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장로교회의 신학이해와 신앙영위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목사들의 신학 연구를 북돋고 뛰어난 목회자 · 설교자가 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 연구지는 현재까지도 장로회 신학대학 측의 〈교회와 신학〉, 총신대학 측의 〈신학지남〉으로 계속 간행되고 있다
양화진에는 채 한 살이 되기 전 한국에서 죽은 맏아들과 미국에서 76세로 죽은 둘째 아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김희동(金熙東)

 

 

올링거( Franklin Ohlinger · 1845~1919)
프랭클린 올링거는 1888년 1월부터 1893년 9월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미국 북감리교 출신의 선교사다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으로 파송되기 전 중국에서 16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올링거가 한국에서 첫 사역을 시작할 당시 그의 나이는 42살이었다
때문에 20대 청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언더우드나 아펜젤러에게는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한 그의 합류로 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역은 한국 기독교는 물론 인쇄와 출판 및 교육사업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 선교 첫 해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배제학당에 설립하였고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 역시 그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김창식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중 전도하여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다
올링거는 여러 전도 문서를 번역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쓴 설교학과 목회학 저서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학교 교재로 채택되었다
올링거 선교사는 그의 아내와 함께 초기 한국 감리교 찬송가의 상당수를 번역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프랭클린 올링거는 후대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에 의해 미국 북감리교의 초기 선교 신학을 대변한 선교사로
19세기말의 선교 신학의 주요 흐름이었던 ‘기독교 문명론’(Christian civilization)을 한국 · 중국 · 일본의 선교 현장에서 구현하였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올링거 선교사는 1845년 11월 29일 오하이오 주 샌드스키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남북전쟁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올링거는 부친과 형이 남북전쟁에서 돌아 온 1865년 저먼 왈라스대학에 입학했다
저먼왈라스대학은 술, 커피, 담배 등을 금지하는 마을 헌법을 바탕으로 천년왕국론에 입각한 실험적인 공동체를 가졌던 교육도시였다
대학을 졸업한 올링거는 미시간의 사기노와 베이시티 독일 감리교회 등에서
설교자로 1년간 사역한 뒤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의 독일 감리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였다
진로를 놓고 기도하던 중 북감리교의 한 감리사의 조언에서 소명을 발견한 올링거는
1870년 가을 당시 중국 선교의 중심지였던 복건성의 수도 복주에 파송되었다
복주에서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맥클레이 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중국에 파송된 그 다음해였던 1871년 볼드인 신학교를 조직하였고 1874-5년에는 최초의 한문 신문인 〈순산사자〉를 발간하였다
1876년에는 귀국하여 독일 감리교회 목사 존 슈바인푸르트의 딸 베르타와 결혼하였다
올링거는 1881년 최초의 근대 학교인 복주 중서학원을 설립,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서학원의 설립은 선교사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300명의 학생 가운데 절반이 비기독교인이었던 이 학교가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영어교육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삼자 정책’을 따르지 않은 올링거 선교사의 ‘신교육 운동’에 반대했다
결국 이 논란으로 인해 올링거 선교사는 1887년 말,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올링거 선교사는 파송 첫 해에 인천에서 오두막 예배당인 인천내리교회를 세웠다
1891년 1월에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여자 의사 박에스더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는 정동교회를 담임하며 복음을 전했다
한국 선교 3년째가 되던 1890년, 올링거 선교사는 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성교서회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설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889년 2월부터 그는 스크랜튼 부인이 자기 집에서 시작한 여성들의 모임을 이어받아 여성교회 담임목사가 되었고
1893년에는 당시 한반도의 주도적인 항구 가운데 하나였던 원산에서 의료선교사 맥길과 함께 기독교 서적을 팔며 병자도 고치는 사역을 감당했다
그 해 5-6월에 올링거 선교사는 열두 살과 아홉 살 난 아들과 딸을 편도선염으로 잃었다
한국에서 죽은 최초의 서양 어린이들인 이들을 양화진에 묻은 올링거 선교사 부부는 1893년 9월에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안식년을 마치자 올링거 선교사 부부는 1895년 다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911년까지 복주에서 인쇄소와 대학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그 이후 은퇴한 올링거 선교사는 미시간 앤 아버에서 1919년 사망하여 톨레도 우드론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올링거 부인은 1943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남편 곁에 묻혔다

 

 

밀러(FRED. S. MILLER 1866~1937) 가족
밀러 선교사는 충청북도 지역 복음화의 초석을 놓았다
밀러 선교사는 1866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태어나 피츠버그대학과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2년 11월 아내 안나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밀러 선교사는 1893년 정동 예수교학당 책임자가 되어 이를 고아원에서 학교(민노아학당)로 발전시켰다
민족운동가 안창호가 민노아학당에서 2년간 수학했는데 밀러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교사로도 활동했다
또 1895년부터 연못골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해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했다
밀러 선교사는 1904년 10월 북장로교 선교부의 충청도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밀러 선교사는 청주읍교회를 개척하고 청남학교 등 6개 학교를 설립하는 등 충청지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특히 그는 금주운동과 쪽복음을 이용한 문서전도에 헌신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밀러 선교사는 1937년 사망하여 청주 금천동의 두 번째 아내 도티의 무덤에 합장됐다
양화진에는 밀러 선교사의 첫 아내 안나와 두 아들이 묻혀 있다
안나 밀러 선교사는 1865년 출생하여 남편 밀러와 함께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899년과 1902년 잇달아 두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안나 선교사는 점점 쇠약해졌고
1903년 6월 사망하여 먼저 묻힌 두 아들과 함께 양화진에 안장됐다

 

 

엘나에루위스

 

 

헤론(JOHN W. HERON 혜론(蕙論) · 1856~1890)가족
헤론은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이다
헤론은 테네시대학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이미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초빙 받은 수재였다
그는 헤티(GALE HARRIET G. HERON(1860~1908)와 결혼한 후
1885년 6월 21일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서 내한하여 알렌 ·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
20대 후반의 열정에 넘친 세 신참 선교사들은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서로 간에 많은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위생환경은 매우 불결하였습니다
천연두,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연례행사처럼 창궐해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 질려서 일부 선교사는 바로 자신의 나라로 귀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인들을 돌보던 선교사들도 있었고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은 그만 자신이 전염병에 희생되기도 하였다
헤론 역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많은 환자들을 돌보다가 그만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 때, 헤론의 병상을 3주 동안 불철주야 지킨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선교 초기 갈등을 빚기도 했던 두 사람의 우정은 이때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헤론의 유가족으로 아내와 어린 두 딸이 남았는데 헤론은 아내에게 조선에 계속 남아서 선교의 일을 계속 하기 원한다고 부탁 하였다
또한 조선인 하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도 부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론은 ‘나의 사역이 참 보잘 것 없었지만, 그것이 모두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
윌리엄 홀은 캐나다 벽촌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로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고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만난 의사 로제타와 약혼을 하였다
약혼녀인 로제타는 먼저 한국에 선교를 위해 들어오고 윌리엄은 약혼녀 보다 1년 늦은 1891년 한국에 들어와 두 사람은 서울에서 혼인을 한다
이들 부부는 1년 후 평양 선교 개척의 중책을 맡고 아직 채 한 살이 안된 아들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데
온갖 핍박 속에서도 이들 부부는 의료 봉사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1894년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후에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던 윌리엄은 자신도 전염병에 걸리게 된다
뒤늦게 서울로 와서 아내의 돌봄을 받았지만 1894년 11월 24일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이때 그의 아내, 로제타는 임신 7개월 중이었다
29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로제타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딸 에디스을 낳은 후 두 자녀를 데리고 1897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우고 직접 부인과장으로 일하였다
이 때 사랑하는 딸 에디스도 이질로 희생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지만 그녀의 헌신은 계속됐다
그녀는 김점동(나중에 박에스더라고 불림)이라는 한 여성을 미국에까지 데리고 가서 의학교육을 시켰다
박에스더는 의학공부를 마치고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하여서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남편과 딸을 잃으면서도 그녀의 헌신은 4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들의 아들, 셔우드 홀은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역시 의사이던 부인 메리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6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였다
그는 특히 폐결핵 치료 전문가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폐결핵으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셔우드가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이다
또한 그는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돕기도 했다
그는 1940년 크리스마스 씰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등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한국을 떠나기 바로 직전 미국 선교본부로부터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서신을 받았고
그의 가족들은 지체 않고 일본으로 가서 인도로 가는 배를 바로 탔다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에서 1963년까지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페인(JOSEPHINE O. PAINE · 陛仁 · 1869~1909)
1869년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한 교육선교사다
그녀는 고교를 졸업할 즈음에 아펜젤러 선교사 강연을 듣고 조선의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후 페인은 1892년 보스턴 선교사양성소를 졸업한 직후 미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페인은 1893년 9월, 이화학당장에 취임하여 성경과 영어를 직접 가르치며 15년 동안 헌신했다
페인은 학당장 재임 중 나라가 튼튼하려면 몸이 튼튼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체조를 정규교과로 가르쳤다

 

 

힐만(MARY R. HILLMAN · 1870~1928)
힐만 선교사는 최선을 다해 한국인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전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힐만 선교사는 1870년 4월, 미국 오하이오 주 뉴아크에서 출생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나라에서 선교사로 일할 것을 기도한 부모의 양육을 받았다
힐만 선교사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한 후
프로테스탄트 병원에서 1년간 간호사 교육 받았고, 뉴욕에 있는 폴츠선교사학교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힐만 선교사는 결혼도 하지 않고 19세기의 마지막 날(1899년 12월 31일),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1900년 초부터 제물포 여성선교사회에 소속되어 여성을 위한 성경공부 지도에 힘썼다
특히 힐만 선교사는 강화 · 삼산 · 교동 · 해주 지역까지 방문하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된 후에는 사경회를 열고 모세와 여호수아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6년부터는 원주 선교부에서 강릉 지역까지 오가며 선교활동에 헌신했다
힐만 선교사는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탓에 건강이 나빠져 1922년부터는 조선예수교서회에서
신앙서적 번역 업무를 담당했으나 과로로 인한 병으로 인해 1928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기퍼드(DANIEL LYMAN GIFFORD · 1861~1900) 부부
기퍼드는 초기 한국선교 과정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1888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해서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이때 기퍼드는 외부의 도움 없이 교인들의 헌금과 노동으로 새로운 예배당을 짓도록 하였으며 몸소 노동의 본을 보여주기도 했다
1890년에는 같은 북장로회 선교사로서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2대 당장이던 메리 헤이든과 결혼하였다
기퍼드는 한국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그의 저서 〈조선의 풍속과 선교〉에서는 자신이 선교를 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담담하고 세밀하게 썼다
그는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00년 4월 10일 남부지방을 순회하던 중 이질에 걸려서 소천 하였고
그의 부인 (Mary Hayden Gifford · 1857~1900)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채 한 달도 않돼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존슨(WALTER VIRGIL JOHNSON · 찬 · 1874~1903)
1874년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파크대학과 어번신학교를 졸업했으며, 목사가 된 후 약 1년 반 동안 워싱턴에서 목회했다
존슨은 대학 시절에 만난 아내(에밀리 존슨)와 함께 한국 선교사를 지원했으며
1902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선발되어 기착지인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아내가 귓병에 걸렸고 일본 고베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1903년 1월 별세했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계획대로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기 위해 1903년 2월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마저 한국에 온 지 한 달 만에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결국 3월 18일 별세하였다

 

 

제이콥슨(ANNA P. JACOBSON · 아락선(雅各善) · 1868~1897)
미국 북장로교가 파견한 첫 서양의료 간호선교사다
1868년 노르웨이에서 태여나 미국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간호교육을 받았다
1895년 4월, 제중원 원장 에비슨 선교사의 요청으로 의사 화이팅과 함께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후 세브란스병원 의학당에서 간호학 교수로서 '붕대법 및 마사지'를 가르쳤다
제이콥슨 선교사는 한국인,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했는데 한 보고서에는 그녀가 "나는 이제 조선의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고 친근하게 생각해 준다면, 만족하리라"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1896년 8월 심한 이질에 걸렸으나 회복된 것으로 생각하고 병원 일을 재개했으나
10월 말 갑자기 악화되었고, 이듬해 1월 20일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됐다
1897년 1월 21일자 〈독립신문〉은 제이콥슨 선교사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이 여인의 죽음은 조선에 있는 것에 비하면 낙원에 있는 것이지만 조선 인민에게는 크게 손해"라고 보도했다

 

 

젠센(Maud Keister Jensen · 1904~1998) 가족
젠센 선교사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1897년 덴마크에서 태어난 젠센은 코넬대학과 보스톤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 감리교 국내 선교부에서 일하던 젠센은 1926년 5월부터 미국 감리교의 한국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마우드와 1928년 7월 결혼했다
그들은 1929년 한국에 들어와 10년 동안 인천 · 수원 · 이천 등 서울 근교, 경기도 지역 · 강원도 원주 · 동해안 도시들
그리고 서해의 섬 지역을 오가는 순회 선교사로 일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젠센 부부는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곧바로 다시 선교사로 들어왔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그날, 젠센 선교사는 개성에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포로생활을 겪고 1953년 5월에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족과 재회한 젠센은 허약해진 몸을 추스른 다음 미국 전역을 돌며 간증여행을 했으며
1954년 10월에는 아내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사역을 재개했다
한국에서도 그는 전국을 돌며 선교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1956년 11월 하나님을 부르심을 받아 양화진에 묻혔다
아내 마우드 젠센은 1969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미국 전역의 교회를 돌며 선교 헌금을 모아 서울 정동교회 내에 젠센기념관을 지어 한국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관으로 봉헌했다
양화진에는 크리스 젠센 선교사와 아내 마우드 젠센 선교사, 그리고 딸 클레어 젠센이 안식하고 있다

 

 

켄뮤어(ALEXANDER GORDON KENMURE · 1896~1897) 가족
켄뮤어 선교사(1895~ ?)는 1895년부터 1904년까지 약 10년 동안 조선에서 영국성서공회 총무로 일하면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 초석을 놓았다
켄뮤어 선교사는 1856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글라스고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영국성서공회 중국 선교사로 1886년부터 약 10년 동안 성경 반포 사업을 담당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성경 반포사업이 결정되자 켄뮤어 선교사가 그 일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893년 5월 조선을 방문해 한글 성경 번역 논의과정에 참여했고 1895년 10월에는 영국성서공회의 한국 담당 총무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성경의 한글 번역과 반포사업에 기틀을 마련하는데 매진했다
이를 위해 전국을 돌며 성경 보급을 위한 조직을 구축했으며 권서사업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그는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해 개방적이어서 복음 전도에 매우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00년부터 성서번역위원회의 행정업무를 담당하여 신약성경 완역에 기여했다
켄뮤어는 1904년 초 영국 · 미국 ·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연합한 성서공회 공동총무로 선임되었으나
과로로 인해 건강을 잃고 1904년 5월 고향에서의 요양을 위해 한국을 떠났다
양화진에는 1896년 9월 10일 태어나 113일만에 죽은 아들 알렉산더 고든 켄뮤어가 잠들어 있다

 

 

빈턴 가족(LETITIA COULTER VINTON · 1873~1903)
빈턴 선교사는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나 1891년 아내 레티샤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빈턴은 복음전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정부 병원이라는 한계 때문에 마음대로 복음전도를 병행하기 어려운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자택에 개인진료소를 마련해 민중들을 대상으로 치료와 복음전도에 노력했다
결국 빈턴 선교사는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을 사임하고 평양 · 의주 · 만주 지역을 돌며 전적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힘을 쏟았다
그는 1894년 선교사공의회 출범을 계기로 〈The Christian news〉, 〈The Korea Mission Field〉 발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문서선교에 헌신했는데
1905년에는 〈The Korea Mission Field〉를 월간으로 바꾸고 수년간 편집인으로 일하면서 선교잡지로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1908년 선교사를 사임하고 귀국했으며, 1936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아내 레티샤 선교사는 1873년 영국에서 태어나 빈턴과 결혼한 후 내한하여 선교사역을 도왔다
그러나 내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자녀를 잃는 슬픔으로 인해 건강을 해쳐 30세 되던 해인 1903년 사망하고 말았다
1908년에는 딸마저 사망함으로써 양화진에는 모두 4가족이 안장되어 있다

 

 

아펜젤러(Henry Dooge Appenzeller · 1858~1902) 가족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로서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았다
결혼한지 두 달만인 1885년 한국에 들어와 첫 사업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의 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또 1885년 10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개척했다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책자들과 독립신문 등 일반신문도 인쇄하였다
그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으로 일하였고
딸 레베카 아펜젤러도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교장으로 일했다

 

 

마벨 영(MABEL B. YOUNG R. N · 1883~1935)
평생을 간호선교사로 헌신하며 우리나라 간호업무 발전에 기여했다
1883년 9월 미국 펜실베니아 스프링필드에서 출생하여 펜실베니아 베들레헴 소재 세인트루크병원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그녀는 이후 수년 간 고향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1919년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언니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 간호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해 11월, 선교사를 지원하여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이로써 마벨 영 선교사 가족 중 언니 플로렌스는 인디아, 헨렌은 일본 등 세 자매가 모두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마벨 영 선교사는 캐나다선교부의 원산 구세병원에서 3년간 간호사로 헌신한 후 1922년부터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일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재능을 지녀 남대문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아이들을 매우 좋아했다
또 마벨 영 선교사의 꿈은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소망을 들어주셨다
그녀는 단 5일 동안만 앓은 후 1935년 11월 7일 아침에 조용히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목사 김선(1897~1956) · 목사 메드 케이스델 젠센(1926~1969)

 

 

졸리(Henry Bencraft W. Joly 졸리(周驪)  · 18571898) 가족
졸리는 1857년 터키(Smyrna)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영국 영사로 중국 상해에 있다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부임하여 주한 영국 영사로 인천에서 활동했다​
1896년 영국 작가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방문시 그의 안내로 한국의 문화를 외국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졸리 부부에게는 3남매의 자녀가 있었는데 막내 딸 릴리안은 서울에서 성장하여 스탠다드 석유회사 사무실의 비서직으로 1920년대까지 일했다
졸리는 1898년 별세하여 처음에는 인천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 후 딸 릴리안에 의하여 부모의 유해를 1950년대 중반에 양화진으로 옮겼다
묘비에는 “Now rests in Peace, perfect peace. not having died but only gone before in 1898
(이제는 평안, 완전한 평안 속에서 안식한다. 죽은 것이 아니라 1898년이 가기 전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날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01년 2월 졸리의 별세를 슬퍼하고 그의 덕업과 혜택을 크게 치하하는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 상공인이 건립한 묘비도 있다
비문에는 “嗚呼周公 德業昭彰 惠澤流長 俾我華商 言念不忘 善人云亡 泲泗沱滂 嗚呼周公 美玉善藏”이라 쓰여 있다
양화진에는 대리석 둥근 기둥에 넝쿨 장미 문양을 아름답게 조각한 양화진에서 제일 높이 솟아있는 묘비가 있다
이 묘비는 인천지역에 거주했던 중국 상공인들이 졸리를 추모하며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왼쪽에는 졸리의 부인 클라라(Joly, Clara Agnes Lillie)가 안장되어 있다
또한 그 중앙에는 졸리 부부의 막내딸 릴리안 A. 휘트만(Whitman, Lilian Agnes Joly)이 안장되었다
당초 헨리 B. 졸리의 묘는 인천에 있었다가 1950년대 중반 양화진으로 이장되었다
릴리안 A. 휘트만은 1968년 별세하여 남편 휘트만에 의하여 양화진 졸리 묘역의 부모 묘 가운데 안장되었다

 

 

소다 가이치((曽田嘉伊智 · SODA GAICHI · 1867~1962)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며, 한국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은 첫 일본인이기도 하다
소다와 그의 부인은 일생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바쳤다. 사실 그의 젊은 시절은 방황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소다가 술에 만취된 채 노상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 때 무명의 한국사람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05년 소다는 은인의 나라인 한국에 은혜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한국에 와 서울 YMCA 일본어 선생이 되었다
소다는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고 41세 떼에는 독실한 신앙인이던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했다
소다는 105인 사건으로  YMCA 동료들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힘썼다
1923년 소다는 카마쿠라보육원을 세워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까지 천 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겪은 역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소다는 일제 패망 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 손에는 세계평화라는 표어를 또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조국 일본의 회개를 외쳤다
그는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94세 되던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소다는 영락보리원에서 1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C지역

 

 

홉스(THOMA HOBBS 허엽(許曄)  · 1880~1934)
홉스 선교사는 1880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영국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9월 16일 구세군 선교사(사관)로 부인(엘렌 P. 홉스)과 함께 내한했다​
1911년 구세군 한국 본영에서 활동하고 개성 지방관으로 전임하였다
원당 사평 장단 등 지방 군영을 개설하거나 관리와 순회 전도를 하였다. 문맹 퇴치와 사회 계몽 활동에도 힘썼다
​1913년 1월, 저다인(J. L. Gerdine)선교사와 밀러(Hugh Miller 민휴(閔休) 총무의 추천에 의하여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부총무로 선임되었다
그가 선임된 배경에는 '구세군 사관(정위)으로 2년간 근무한 32세의 기혼자이며 한국어를 잘하는 동시에 이미 한국인 권서와 함께 전도를 해오고 있고
권서 사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으며 그 부인도 권서인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공회 사업을 관장하면서 특히 권서인(勸書人)의 조직과 관리를 주관하였으며, 전도 활동을 지휘하였다
그의 권서 방식은 ‘모든 가정, 모든 사람(Every home, and Every man)’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호별 방문 형식의 권서 보급 운동을 장려하여 많은 성경을 보급하였다​
1921년에는 권서인을 위한 잡지 를 편집, 발간하였다
밀러의 안식년 때(1916. 7~1917. 8)에는 대리 총무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자 지원 입대 한 후 제대하여 1919년 9월 3일 서울로 돌아왔다​
1937년 10월 제2대 밀러 총무가 정년으로 은퇴하게 되어 후임으로 제3대 영국성서공회 총무가 되었다
부총무로 25년간 경륜을 쌓은 뒤 57세의 나이로 총무직을 맞게 되었으므로 이미 성서사업에 노련한 전문가로서 한국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
밀러 총무가 추진하던 개역성경 번역작업을 성실하게 마무리하고 신 · 약을 합본하여 〈성경 개역〉으로 출간하는 등 성서 출판과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8년 '영국성서공회'(BFBS)의 명칭을 '조선성서공회'로 바꾸는 등 대한성서공회 발전에도 기초를 확립하였다
1941년 3월, BFBS에 속했던 모든 성경 재고와 조성된 자금을 조선성서공회에 기부했다​
그는 1934년 엘렌 부인과 사별한 뒤, 1935년 9월 11일 이화여전 교수 밴플리트(Van Fleet, Edna Marie)와 재혼하였다​
1941년 5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중국 상해에 머물면서 미국 성서공회 임시 총무로 활동하면서
한국 성서사업의 계속 수행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킬보른 가족(KATHLEEN ANN KILBOURNE · 1950~1950)
동양선교회 선교사로서 한국 성결교회 정착에 기여했다
킬보른은 1865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한때 믿음의 길을 떠났으나 20대 후반 찰스 카우만의 인도로 신앙을 회복했다
킬보른은 1894년 시카고에서 열린 무디의 선교대회에서 선교사의 꿈을 품었다
1902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902년부터 일본에서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킬보른은 1907년 한국 최초의 성결교회(현 중앙교회) 설립을 위해 한국에 왔으며
1921년부터 동양선교회 한국 책임자가 되어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성결신앙 대부흥운동을 이끌었고, 경성성서학원 원장으로 교회 지도자 양성에 기여했다
또한 신앙잡지 〈활천〉을 창간하여 성결교의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1924년 동양선교회 총재로 취임하여 미국으로 돌아감으로써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17년 만에 마감했다
킬보른의 한국 선교는 그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아들 로슨은 1923년부터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활동했다
또 로슨의 세 자녀는 몯 동양선교회의 선교사가 되었는데 장남 에드윈과 차남 엘머는 1949년부터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에드윈은 서울신학대 교수 및 학장, 동양선교회 부총재 등으로 1973년까지 활동했으며 엘머는 구제사역자로 1985년까지 활동했다
양화진에는 1950년 태어난 에드윈의 딸 캐슬린이 단 이틀 동안의 짧은 생을 마치고 잠들어 있다

 

 

링콘(FRENCH LINCOLN · 영국 · 1893~1923)
제2대 부래지 사령관(1916~1919 재직)의 아들로 아버지가 한국을 떠난 뒤에도
한국에 남아 한국인을 일깨우는 어학 선생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신태빈 사령관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인도하여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로간(MARY LEE LOGAN · 1856~1919)
로간 선교사는 충청도 지역 여성들을 사랑으로 인도한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충청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1856년 미국 켄터키에서 출생하여 켄터키에서 자란 전형적인 켄터키 사람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젊은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특히 리치몬드 센트럴대학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던 중 1908년 남편 로간 박사가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사망한 후 평소 소망했던 해외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로간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 중이던 포사이드 박사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회신이 오기 전인 1909년 봄, 한국에 자비량 선교사로 들어왔다. 그때 그녀는 53세였다
로간 선교사는 목포에서 옛날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이었던 유진 벨 선교사와 의사 오긍선을 만나 수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선교사역에 헌신했다
이후 로간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으로 청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돌을 펼쳤다
당시 청주 여성들에게 로간 선교사는 언제든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였으며
밀러 선교사의 부인 도티 선교사와 함께 청주지역 여성교육의 초석을 놓은 개척자였다
로간 선교사는 1919년 12월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했으며
청주지역 교인들은 그를 추모하여 1921년 6월, '로간부인 기념비'를 청주제일교회 마당에 세웠다

 

 

게일 가족(JAMES SCARTH GALE · 1863~1937)
게일 선교사는 한국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선교사이다
1863년 2월 캐나다에서 출생했으며, 1888년 12월 토론토대학 YMCA의 후원을 받아 평신도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레이놀즈와 함께 성경번역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성서번역에 기여했다
1900년 9월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 초대 목사인 그는 한국적인 기독교를 지향했으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믿음을 기준으로 천민 출신도 장로로 세웠으며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 설립의 토대를 닦았다
게일 선교사의 가장 큰 공헌은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서양문화를 소개한 점이다
그는 〈구운몽〉 · 〈첨병 · VANGUARD〉 등 한국을 외국에 소개하는 저서를 썼고
많은 신자들에게 감동을 준 〈천로역정〉 등을 번역했으며, 한국 최초의 영어사전인 〈한영자전〉 등을 편찬했다
양화진에는 그의 첫 아내인 해티가 헤론 선교사와 함께 묻혀 있으며
둘째 아내인 아다 루이스 세일과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비비안과 해티와 헤론 사이에서 낳은 큰 딸 사라의 아들 제임스가 묻혀 있다

 

 

뮬렌스테스(HENRY JESSEN MUHLENSTETH · 미륜사 · 1855~1915)
1855년 덴마크에서 아버지가 목사이자 마을 우체국장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0년대 초 중국으로 건너가 청국 전보총국에서 전기기술자로 홍콩과 상해 등에서 일했다
또 1885년 8월 조선 최초의 전신선인 한양과 인천 · 의주를 잇는 서로전선(西路電線) 가설을
전보총국이 담당하게 되었을 때, 기술감독관 자격으로 조선으로 들어와 전선가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뮬렌스테스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남로전설 가설에도 참여했으며 1894년 청일전쟁 때 중국으로 돌아갔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뮬렌스테스는 조선정부가 전신기술자 양성을 위해 설립한 전무학당(電務學堂) 교사로 초빙되어
다시 조선에 들어와 1896년부터 10년 동안 학생들의 전신 관련 기술 지도를 담당했다
그는 당시 조선을 압박하던 일본이 조선의 전화사업권에 대해 부당한 압력을 가하는 것에 대항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등 조선정부 입장에서 일을 처리했다고 전해진다
뮬렌스테스는 1905년 일본에 의해 조선에 대한 통신권마저 강제 탈취되어 해고될 때까지 우리나라 전신기술 정착에 기여했다
1905년 이후 뮬렌스테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파면 당시 귀국 여비조차 없어서 일제에 강점된 한반도에 남아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가 계속해서 한반도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1985년 한국통신연구원 관계자에 의해 양화진외국인묘지에서 그의 묘를 발견함으로써 확인되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H묘역
H묘역에는 모두 63기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중 선교사가 2명이다
이곳에 외국인 묘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50년대 말이며 1960년대 이후 미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묘지로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1950년대에 5기 · 1960년대에 23기 · 1970년대에 14기 · 1980년대에 9기 · 1990년대에 10기 · 2000년대 2기 등이 조성되었다
양화진에는 미군 관련 무덤이 총 73기(H묘역 39 · G묘역 28 · 기타 6) 있다
*
미용 애부런(MI YONG AVELLONE)의 묘비가 가운데 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H묘역 · I묘역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G묘역
64기의 무덤에 65명이 안장되어 있으며, 태어난 지 1년 이내에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곳에는 1960년대에 어린이 무덤이 집단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총 39기(40명)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 어린이 무덤의 조성 배경과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다
이외에 1940년대에 4기 · 1950년대에 10기 · 1970년대에는 10기가 조성되었다

 

 

두영서(杜永瑞) 사관(Lieulenant Commissiower. James Toft · 1865~1928)
1926년 한국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구세군사관학교 · 대구영문 · 해주영문 등을 신축했다
그해 11월 브람웰 대장 내한 시, 한국사관 불평등의 문제로 인해 20여 명의 사관들이 면직되고
사관학생이 휴학 조치되는 등의 구세군 분규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구세군의 명예가 손상된 이 사건의 충격으로 병을 얻어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1928년 순직했다

 

 

로(PHILIP CLYDE ROWE · 1921~1955)
아시아재단 한국지부 초대 대표로 한국과 미국의 우호적인 관계 증진에 기여했다
그는 한국전쟁 전 주한 미국공보원에서 근무했고, 1954년 아시아재단 한국지부 설립 당시 초대 대표로 임명되었다
필립 로는 아시아재단 한국지부의 발족과 정착에 기여했으나 지부가 안정되어 갈 즈음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1955년 7월 17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그의 유언대로 가족에게는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며, 정동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양화진에 안장됐다

 

 

애비슨(Oliver R. Avison · 1860~1956) 가족
올리버 에비슨(1860~1956)은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근대의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에비슨은 캐나다의 영국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였다
그는 모교에서 외과 교수로 봉직하면서 선교사의 소명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캐나다에 와 강연을 한 언더우드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헌신하라는 권유를 받고 조선 선교사역을 결심했다
1893년 한국에 온 에비슨은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서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에비슨은 교단별로 설립한 진료소들을 하나로 묶어 규모가 있는 병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바람은 ‘세브란스’라는 강철회사 사장이 에비슨에게 1만 달러를 기부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또 에비슨은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의 양성을 위해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개설하였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서 ‘연희전문학교’의 학장으로 1916년부터 18년 동안 일했다
32세 때 한국에 들어온 에비슨은 43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후 은퇴하였다
에비슨의 4남 더글라스 부부는 1920년부터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세브란스병원장을 역임하며 27년 동안 헌신하였다

 

 

라일리 사관 · 옥거흠 사관 · 고든 실베스터 · 더글라스 실베스터

 

 

라일리 사관 · 옥거흠 사관 · 고든 실베스터 · 더글라스 실베스터

 

 

이도식 사관(Brigadier Williams Richards · 1878~1920) · 영국 · 계급 부령 · 직책 서기장관
1918년 한국 서기장관으로 부임한 그는 부래지 사령관(George French)이 전근되어
사령관 대리 근무를 하던 중 1918년 한국 구세군 개전 10주년대회 준비로 인한 과로와
서울후생학원에 퍼진 천연두 치료 사역에 전념하다 자신도 전염되어 42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E묘역

 

 

엘리자베스 밀러(Elizabeth H. Miller · 1840~1919)
한국에서 41년 동안 교육선교사로 헌신한 에드워드 밀러(Edward H. Miller 밀의두 · 1840~1966)의 어머니다
그녀는 환갑이 지난 1901년 9월 아들과 함께 내한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사와 서교동교회 전도사로 열성적으로 헌신하다가
1919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
아들 에드워드 밀러 선교사는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나 로스엔젤레스의 옥시덴탈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어머니와 함께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내한 이듬해에 그보다 수개월 전부터 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매티 헨리(Mattie Henry · 1873~1966)와 결혼하고 부부 선교사로 헌신했다
에드워드 밀러는 선교사 생활 41년 동안 경신학당 교장과 연희전문 교수로 일하며 학원 선교에 주력하여 학생들을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또 교육 선교사로 헌신하면서 서교동교회 당회장과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 교회를 보살폈다
그는 1941년 일제가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할 때 간첩 누명을 받고 5개월간 옥고를 겪은 후 1942년 5월 강제 추방되었다
헨리 밀러 선교사는 남편 에드워드보다 4개월 전에 조선에 와 정신여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05년 이후에는 두 차례에 걸쳐 6년 동안 교장을 역임하는 등 여성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에드워드와 헨리 선교사 부부는 1942년 한국을 떠난 이후에도 미국에서 한국어방송을 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선교를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양화진에는 어머니 선교사 엘리자베스 밀러의 묘가 있으며
그 앞에는 아들 부부 역시 조선을 위해 죽을 때까지 헌신할 것을 다짐한 듯 죽은 해가 미처 기록되지 못한 묘비가 서 있다

 

 

치로키네(Sergie V. Tchirkine · 1875~1943)
대한제국 시기에 활동한 제정 러시아의 외교관으로 약 30년 동안 서울에서 살았다
1900년 초, 20세에 러시아 외교관으로 한국에 왔으며, 내한 4년 만인 1904년 이 땅을 떠났다
당시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함에 따라 외교업무를 프랑스 공사관에 위탁하고 모든 외교관들은 조선에서 철수했다
이후 그는 부카라(현 우즈베키스탄) 타시켄트 등지에서 러시아 호민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가 공산화 된 후에는 인도에서 살았다
치르키네는 1918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외교관 시절 서울에서 알게 된 친구로부터 일제에 강점된 한반도에 살고 있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제에 강제 합병된 한국에는 소련 공산혁명을 피해 이주해 온 러시아인들이 상당수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무국적 상태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이들을 보호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서울외국인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는 1943년 서울에서 사망해 양화진에 안장됐다

 

 

제넷 오벅 맥기 추모비(Jeanette Oberg Mcghee · 1918~1995)
스탠턴 오벅과 해럴드 오벅 형제가 한국에서 재림교회 개척 선교사로 30년간 봉사한 부모 해럴드 오벅과 엘시 오벅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이 벨(에임스) 류(Mae Belle (Ames) Rue · 1900~1936)
1928. 11 한국 의료선교 사업에 부름을 받음
1929. 5. 7 일본 경유 한국 도착 후 순안병원장 부임함
1931. 6 서울 이사. 장곡천정(현 소공동)에 2층 집 두 칸을 세로 얻어 진료소 개원. 회기동에는 출장소 설치
1932. 11. 1 소공동에서 인사동의 본래 병원으로 사용하던 6베드의 입원실을 갖춘 좋은 병원으로 이사하여
경성요양의원 개원. 1년 후 경성요양병원이라 개칭
1933. 3. 22 휘경동 29-1(현 소재지)에 새 병원부지 12,000평을 12,000원에 구입하여 병원을 신축
1936. 2. 15 병원 완공. 성별식을 갖고 경성요양병원(Seoul Sanitarium & Hospital)이라 명명함
1936. 4. 부속 간호원양성소를 개원
1936. 6. 15 여름에 인사동에 있던 병원을 낙원동 141번지로 옮기고 경성요양병원 시내출장소로 1937년까지 운영함
Mae Belle 여사는 간호원장으로 남편을 도와 헌신적으로 병원 일을 도움
1936. 12. 16 병을 얻어 주님 품에 잠듦

 

 

류제한(George Henry Rue. M. D. 1899~1993)
나는 한국에 구경삼아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러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로서가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할 각오로 온 선교사였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를 치료할 때나 시골 아낙네를 치료할 때나 똑같이 나의 최선의 노력을 바쳤습니다

 

 

릴리안 앤더슨(Lillian E. Beede Anderson · 1892~1934)
1892년 8월 네브래스카주 세드론에서 출생하여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으며 옥시덴탈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교를 졸업했다
릴리안은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온 일본 청년들과 교유하며 동양 선교의 꿈을 갖게 되었다
릴리안은 대학 졸업 후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일본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1917년 8월 한국 선교사로 결정된 앤더슨과 결혼하고 함께 한국으로 오게된 것이다
릴리안은 안동에 여성성경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사했으며
1922년 남편 앤더슨 선교사가 전국기독면려회 총무로 선임된 후에는 수년간 여성선교사모임 회장과
정신여학교 성경교사로 일하는 등 한국에서 17년 동안 헌신했다
릴리안 앤더슨 선교사는 1934년 11월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
남편 앤더슨(Wallace Jay  Anderson 안대선(安大善) · 1890~1960)
우리나라 청년면려회 창설을 주도하고 기독학생운동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안동을 중심으로 인근 농촌과 산촌을 방문하며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했다
특히 국내 최초로 기독청년면려회를 조직하고 이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1924년부터 10년 동안 만국조선기독청년면려회 초대 총무로 활동했다
이후 기독교서회에서 문서선교에 종사하다가 1942년 일제의 강제추방으로 한국을 떠났다

 

 

모리스(Charles Morris 모리시(慕理是) · 1869~1927)
모리스 선교사는 20세기 초 북한 지역 선교의 공로자다
17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아일랜드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위그노의 후손으로 1869년 5월 아일랜드 퀸즈카운티에서 출생했다
19세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1900년 드루신학대학을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선교사의 소망을 지녔던 모리스 선교사는 1900년 9월, 존 H. 빈센트 목상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1901년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903년 9월, 루이스 오길비와 결혼한 이후 모리스 선교사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선교사역에 헌신했다
그는 영변, 평양, 해주 등 북한 전 지역을 선교지로 삼아 10여 년 동안 활동했으며
1916년부터는 강원도 원주선교부에서 이천, 강릉 등을 책임지는 감리사로 헌신했다
모리스 선교사는 한국에서 26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하며 '가장 이상적인 선교사'라는 평을 들었다
모리스 선교사는 1926년 말경 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전도여행 중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 1월 18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원더우드 부부 · 원한경 부부 · 원일한 부부 등 4대에 걸친 7명의 가족묘
언더우드는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이다
선교 초기 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그는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언더우드는 1885년 부활절에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언더우드는 8살 연상의 의료 선교사 릴리아 호튼과 서울에서 결혼하였는데 이들은 신혼여행조차 전도여행으로 다녀왔다
이들 신혼부부는 1,600km 이상을 여행하였고 600여 명 이상을 치료하였다
언더우드는 미국으로 돌아간 안식년 기간 중에도 강연과 신학교 방문 등을 통해서
에비슨 · 무어 · 레이놀즈 · 테이트 · 리 등 후배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게 했다
언더우드는 초대 성경번역위원장을 맡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원장으로서의 그 책임을 다하였다
그는 영한사전 · 한영사전 · 한국어문법서들을 직접 만들어 출판하기도 했다
또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구세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과 연희전문학교을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 교육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언더우드 2세(원한경)는 아버지를 이어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으로 학교 발전에 공헌하였고
언더우드 가문 3세인 원일한과 원요한도 각각 연세대학교와 호남신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봉직하였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부부를 비롯해 원한경 부부 · 원일한 부부 등 4대에 걸쳐 모두 7명이 안식하고 있으며 언더우드 가족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본윅(Cathie Bonwick · 1914~1927) 가족
본윅 선교사는 일제강점기 20여 년 동안 구세군 선교사와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전신)의 초대 총무로 일하며 문서선교에 기여했다
본윅 선교사는 영국의 식민지이던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나 1892년부터 구세군 사관이 되어 봉사하던 중 1908년 10월에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1910년 2월부터 새로 설립된 구세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며 성직자 양성에 기여했다
본윅 선교사는 1910년 말, 구세군 선교사를 사임하고 조선예수교서회의 초대 총무로 부임하여 우리나라 문서선교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예수교서회는 1890년 설립되어 문서선교에 주력하였는데 본윅 총무의 부임을 계기로
기독교 독서인구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출판을 통한 선교영역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해나갔다
특히 1910년 12월부터는 선교사들의 신학연구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를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본윅 총무는 1936년 8월까지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중반 일제의 선교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조선예수교서회의 활동이 침체될 무렵
본윅 선교사는 선교사를 은퇴하고 캐나다로 돌아갔으며, 1954년 별세했다
양화진에는 13년간 살다 간 딸 캐시가 안장되어 있다

 

 

유순한(1912~2003)
한국의 나이팅게일 인간 유순한 여기 잠들다
전후 황폐했던 조국과 간호계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나이팅게일 정신을 아낌없이 실천하시다
빈손으로 떠나신 선생님 하나님의 품에 편히 쉬소서
*
장녀 홍남형(洪南螢) · 장남 인표(仁杓) · 차녀 미사(美士) · 삼녀 덕실(德實)

 

 

쇼(William Earl Shaw 서위렴(徐偉廉) · 1890~1967) 가족
윌리엄 쇼 선교사는 우리나라 군목제도 창설에 기여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군목으로 종군했으며,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선교사역을 담당했다
그들은 일제 치하 평양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요한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힘을 썼다
쇼 선교사는 1947년 다시 선교사로 들어와 주한미군 군목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군에 군목제도 창설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대전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전력하는 한편 미국의 독지가들이 후원한 자금으로
목회자들의 수련과 휴양공간인 목자관과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외아들 해밀튼 쇼 기념예배당을 학교 안에 설립했다
그의 아들 해밀튼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으며 해방된 우리나라에 와 국군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미군에 자원 입대하여 서울 녹번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해밀튼 쇼의 아내 주아니타(서화순)도 1956년부터 10여 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
양화진에는 윌리엄 쇼-아델린 쇼 선교사 부부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외아들 해밀튼 쇼가 안장되어 있다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양(裵偉良) · 1862~1931) 가족
베어드는 평양의 숭실대학을 설립하고 발전시킨 교육 선교사이다
그는 미국 시카고 매코믹신학교 출신으로 1891년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베어드 부부는 처음에는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하였고
1897년에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겨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학당을 열었다
3년 후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였고, 1906년에는 합성숭실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숭실의 특징은 학생들의 학자금 자급제도와 자립정신에 있었다
베어드는 자조 사업부를 두어 육체노동을 경시하는 풍조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베어드는 학생들이 사회에서 어떠한 직업을 택하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베어드는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도 힘썼다
부인 애니 베어드는 학교에서 물리학, 동식물학을 가르치고, 찬송가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기여했다
애니 베어드는 1916년 세상을 떠났으며 윌리엄 베어드는 1931년 평양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소천하여 평양 숭실학교 안에 부부가 함께 묻혔다
베어드의 자녀 중 윌리엄 베어드 2세는 1923년부터 1940년까지 리처드 베어드는 1923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했다
양화진에는 한국에 묻히길 원한 두 아들의 무덤
그리고 평양에 두고 온 베어드 부부의 무덤을 안타까워 한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1959년 세운 기념비가 있다

 

 

윔스(Benjamin B. Weems · 1914~1986)
윔스 선교사는 자신과 두 아내 모두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했으며 네 아들 역시 한국과 관련된 삶을 살았다
클라렌스 윔스와 낸시 윔스 선교사 부부는 1909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모두 31년 동안 개성과 원산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클라렌스 윔스 선교사는 일제강점기 말에 강제 추방되어 미국에서 첫 아내와 사별한 후 율린 스미스와 재혼했다
율린 스미스 역시 1953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했다
이 세 선교사가 한국에서 헌신한 기간을 모두 합하면 72년에 이른다
클라렌스와 낸시 윔스 선교사 부부는 모두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 한국과 관련된 삶을 살았다
이중 넷째 아들인 벤자민은 1939년부터 서울외국인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1940년 추방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의 소리방송, UN군 본부 등에서 일했으며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평화봉사단의 극동지역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조지타운대학에서 '천도교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은퇴 후에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방문교수로 한국학을 연구하다가 1986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룻 윔스는 1930년대 말,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벤자민과 만나 1942년 결혼했다
그녀는 1963년 벤자민과 함께 한국에 왔으나 암이 발병하여 2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1966년 죽었다
양화진에는 벤자민 윔스와 롯 윔스 부부가 안장되어 있다

 

 

웨이드 부부(James Adam Wade · 1930~1983 / Lee McClintock Wade · 1936~1973)
제임스 웨이드는 미국 출신의 작곡가 · 언론인 · 작가로서 한국전쟁을 겪은 기독교인을 소재로 한 오페라 〈순교자 · Martyred〉를 작곡했다
웨이드는 1930년 미국 일리노이 주 그래니트에서 출생하여 10대 후반부터 세인트루이스 · 시카고 등지에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1954년에 미군의 일원으로 처음 한국에 왔으며 1960년에 아내와 함께 다시 와 부부 모두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다
웨이드는 한국에서 살면서 음악가, 언론인 및 잡지 편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웨이드의 오페라 〈순교자〉 작곡을 1968년 6월에 마무리했고 1970년 4월 8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처음 공연하여 한국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다
아내 리 매클린톡은 결혼 후 남편 웨이드와 함께 내한하여 용산에 있는 미군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그녀는 평소 한국음식을 좋아하여 조리법을 정리해 두었는데
그녀가 죽은 후 〈리 웨이드의 요리책 · Lee Wade's Cookbook〉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으며 인세는 전주예수병원의 암 연구기금으로 기증했다
양화진에는 두 부부가 나란히 묻혀 있다

 

 

줄리아 듀랙(Julia A. Durack · 1925~1974)
양화진에 안장된 유일한 천주교 선교사(수녀)로 디트로이드의 머시간호대학에서 공부한 후 1955년 메리놀수녀회에 들어갔다
듀랙은 스리랑카에서 간호 선교사로 6년간 헌신한 후 1966년 한국에 왔다
그녀는 메리놀수녀회가 한국에서 첫 병원으로 설립한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산부인과 개설에 참여했으며 이후 약 5년 동안 간호선교사로 헌신했다
1970년에는 농촌지역 선교를 위해 설립한 충청북도 증평 메리놀병원으로 사역지를 옮겨 1년여 동안 봉직했다
듀랙 선교사는 증평메리놀병원에 온 직후인 1971년 3월, 암이 발병함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다
듀랙 선교사는 마지막 삶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1973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외국인묘지 부근에 있던 서울메리놀센터 사무원으로 일하며 마지막까지 헌신한 후 1974년 1월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절두산 순교자기념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유언에 따라 세브란스병원에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되었고, 후일 양화진에 안장됐다

 

 

박금옥(마리아 · 1924~1995) · 윌리엄스(FLOYD WILLIAMS · 1923~1974)

 

 

번스(Beulah V Bournsvs 보은수 · 1906~1990)
1906년 캐나다 뉴브런스윅주 헤이브락에서 태어나 토론토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캐나다연합교회 후원으로 1932년 내한하여 10년 동안 함경도 회령 · 함흥과 만주 용천 등 외진 곳에서 의료선교에 헌신했다
그녀는 간호사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식을 바꾸었고, 많은 여성들이 간호사를 지원하도록 이끌었다
번스 선교사는 1942년 6월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다가 1948년 10월 다시 내한했다
그녀는 한국전쟁 중 부산과 거제도에 설립한 세브란스 야전병원에서 진료활동을 쉬지 않았으며 병원 안에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았다
1974년까지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학에서 간호원장 · 간호학과 교수 · 간호부장으로 봉직했다
번스 선교사는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우유방(Milk Station)을 설치하고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무료로 공급하여 '가난한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불렸고 '번스 장학기금'을 조성해 가난한 아이들을 후원했다
그녀는 1974년 은퇴했으며 1990년 4월 캐나다에서 별세했으나,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안장됐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55km, 소요시간 7시간 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