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횃불 · 지평의병
민족의 암흑기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항일의병의 효시
일제에 의한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와 그 해 11월의 단발령 공포 후
지평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 명이 국가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하였다
지평의병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인 척사의병이다
지평의 함성
민족의 암흑기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의병의 발원지
6 · 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재반격의 거점
지평리에서 전하는 희망의 승전보
의향(義鄕) 양평
의(義)를 중요한 덕목으로 배운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나라의 수치에 보복하고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양평에서 목숨 건 항일 의병이 시작되었다
한말 일본 침탈에 거센 저항을 보여준 인물들이 양평에서 적지 않게 배출된 데에는
그 밑바탕에 투철한 의사상을 일깨우고 발현하게 한 정신적 · 지리적 조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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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리적 여건으로 뱃길과 육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그로 인해 중앙의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의병 봉기는 양평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퍼져 갔다
또한, 용문산이 있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하기에 알맞은 지형과 지세를 갖췄다
후기 의병인 정미의병 전쟁 때 권득수 · 조인환 의병대장 등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지형 · 지세와 지리적 조건은 의병을 불러모으고 주둔시키기에도 적합했다
지평의병 중군장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 · 1869~1896)
조선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우삼(友參) · 호는 괴은(槐隱) · 본관은 덕수(德水) · 경기도 지평(砥平) 출신이다
고종 32년(1895) 민비가 시해되자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4백여 명을 모집, 단양(丹陽)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어 제천으로 향하다 관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이 해산되자 유인석의 의병 부대에 들어가 중군(中軍)이 되었다
조령(鳥嶺) · 달천(撻川) · 안보(安保) 등지에서 관군 · 일본군의 연합군과 싸운 뒤에 충주에서 전사했다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 1792~1868)
양평을 대표하는 인물 화서 이항로에 의해 정립된 위정척사사상을 통해 양평인들의 머릿속에 국방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에 대한 반발로 지평에서 의병을 창의한 것도 화서학파의 유림들이었다
화서학파는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맞서며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 상해임시정부 · 광복군을 이끌었다
화서학파에서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사람이 233명이고 · 103명은 순국했다
김평묵 편지(重庵 金平默 · 1819∼1888 簡札)
이항로의 첫째 아들인 이준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준의 아들이 성년식을 치른 일에 대한 축하, 강익성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 등을 적고 있다
또 자신이 지은 시(詩)를 교정해준 일에 대해 감사해 하고 있다
이어 이항로의 명에 의해 편찬하고 있는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의 원고 수정 때문에 차질이 있을 것 같다는 내용과
만사(輓詞)를 이인구에게 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를 한 후 같은 문인인 송내근의 상황에 대해 전하고 있다
금계집(錦溪集)
조선 말기의 학자 이근원(李根元 1840~1918)의 시문집으로 원(元) 형(亨) 이(利) 정(貞) 4책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스승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에게 올린 서신 · 사우 및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주로 외세의 침략과 급변하는 시사(時事)에 관한 것이 많다
이를 통해 20세기 초의 국제정세와 국내정세 및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고 역사적 변천과정에서 유학자들의 활약상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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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원은 지평 출신으로 자는 문중(文仲) · 호는 금계(錦溪) · 본관은 전주이다
1866년(고종 3)에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스승이 서거한 후 김평묵, 유중교를 사사(師事)하여 화서학파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일제침략과 저항의 역사 · 연표로 보는 의병 투쟁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동아시아 삼국(한 · 중 · 일)은 문호를 개방한다
조선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의 갈등 속에서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고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반영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운동 등 국권 수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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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거쳐 한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의병의 역사와 전통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어렵다
한말 의병의 경우만 보더라도 당시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결사항전을 벌었고
그러한 정신은 기나긴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항일의병의 효시 · 지평의병
일제에 의한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와 11월 단발령 공포 후
지평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 명이 국가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하였다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진을 창의하여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원주 관아와 제천 관아를 잇달아 점령하고
단양의 장회협 전투와 충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지평의병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인 척사의병이다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는 밤
안종응은 거병을 상의하기 위해 지평 상동면 집으로 찾아온 이춘영에게 김백선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이춘영은 야밤인데도 불구하고 즉시 김백선의 집을 찾아 나서고 그 자리에서 함께 거병을 다짐한다
이날이 1895년 11월 21일(양력 1896. 1. 5) 이춘영과 김백선이 만나 지평의병 창의에 합의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로부터 7일 후인 1895년 11월 28일 창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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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춘영)는 먼저 어머니에게 하직을 고하고 지평에 들어와서는 밤마다 친근한 포수들과 만나 설득하니
여러 포수들이 감격하여 울고 즐거이 따르므로 드디어 김백선을 찾아보고 뜻한 바를 말하였다
- 이정규 「육의사열전 이괴은전」 중에서 -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下沙安公乙未倡義事實)
지평 출신 안승우, 이춘영 등이 원주 안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영월에서 유인석을 총수로 추대하고, 경기 · 강원 · 충북 일대에서 전투를 감행하다가
1896년 4월 13일 제천 싸움에서 중군장 안승우가 장렬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약 반 년에 이르는 항쟁 사실을 기록했다
육의사열전(六義士列傳)
의암 유인석 선생 휘하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던 이춘영 · 안승우 · 서상렬 · 주용규 · 이범직 등 5인의 의병장과
병신년(1896) 4월 13일 제천 싸움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홍사구의 항쟁을 기록했다
종의록(從義錄)
의병항쟁의 최고 지도자였던 유인석 선생과 함께했던 지평출신 이춘영 · 안승우 의병장 등의 피 묻은 전투기록이다
꺼지지 않는 희망 · 양평 의병전쟁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의 반식민지화되자 의병활동은 다시금 봉기하게 되었다
을미의병이 화서학파에 의한 거의였다면 정미의병은 평민층과 해산된 군인들이 주도했다
1907년 11월 초, 각지의 5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 작전을 목표로 지평 삼산리(三山里)에 집결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삼산리전투를 치르게 되었고
의병 근거지라 하여 양평지역의 유서깊은 사찰인 용문사 · 상원사 등이 불태워지는 피해를 보는 등 탄압이 혹독했다
그러나 의병의 항일 의지는 독립군으로 계승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양평 의병전쟁의 전개
후기 의병이라 말하는 양평의 의병전쟁은 1905년 5~6월 경 · 구만서가 이끄는 의병부대 50여 명이 지평군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양평 의병전쟁은 1907년 7월 고종의 퇴위와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한말 정미의병의 중심지가 되었고
13도연합의병진이 결성될 당시에는 원주 - 제천 - 양근 - 지평 - 양주를 잇는 의병부대 이동축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용문사전투와 삼산리전투를 한말의병항쟁사에 남겼다
의병의 무기 VS 일제의 무기
화승총은 의병전쟁 전체 시기에 걸쳐 전국 각지의 의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무기로
일본군이 사용한 근대식 소총과는 기본적으로 구조와 개념이 다른 재래식 화기였다
의병은 객관적 전력에서 막강한 화력을 지닌 일제 군경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지평의병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1861~1896)
푸른 눈의 이방인이 본 지평의병
1906년부터 1907년까지 2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의병전쟁 지역을 답사한 맥켄지는
1907년 11월 7일과 8일, 삼산리전투가 벌어진 직후의 양평지역을 방문해 그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만난 의병에는 군인과 유생, 농민, 어린 소녀병사도 있었다
그는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고 기록하고 한국인들의 애국심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의병장과의 만남 · 일본군의 잔혹상
11월 7일 맥켄지는 어느 의병부대 의병장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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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켄지 : 야간 습격에 대비해 초병을 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의병장 : 초병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주민 모두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맥켄지 :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의병장 :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
대한제국의 비극
영국의 신문기자였던 맥켄지(Mckenzie, F. A.)s는 1904년 런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 특파원으로
내한한 후 겪은 구한말의 폭압적인 현실과 일본의 만행 그리고 탄압을 적나라하게 작성하여
「조선의 비극(THE TRAGERY OF KOREA)」이라는 책과
1919년 3 · 1운동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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