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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강화도 전등사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서너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전등사 안내판

삼랑성 동문으로 오르는 길이다

 

 

 

 

삼랑성 동문
온수리에서 강화 종로학원 옆으로 잠시 오르니 도토리묵집과 기념품점 뒤로 보인다

 

 

 

 

정족산 삼랑성 / 사적 제130호 동문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1866)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양헌수 승전비(梁憲洙勝戰碑) / 기념물 제36호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에는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을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잇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182cm · 비신 높이가 163cm · 너비 60cm · 두께가 27cm이다

 

 

 

 

전등사 윤장대(輪藏臺)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은행나무 보호수
조선 철종 때 나라에서는 전등사에 은행 스무 가마를 바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전등사의 은행 수확은 잘해야 열 가마밖에 되지 않았다
분명 불교를 박해하는 관료들의 터무니없는 횡포가 분명했다
사실을 전해 들은 전등사 조실 스님이 백련사 추송스님께 이 사실을 알려

추송 스님의 법력으로 은행이 우수수 떨어지고 다시는 은행이 열리지 않게 되었다 한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열매를 다시 맺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 하나를 노승나무 · 다른 하나를 동승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
나무 높이 25m · 둘레 5m · 나이 600년 · 지정일자 2001. 8. 6

 

 

 

 

죽림다원

아름다운 오미자 · 푸른 솔바람 · 향긋한 모과차 · 그윽한 국화차를 판다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다
연등을 설치하여 대조루 아래만 보인다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 /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7호
대조루를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 안의 건물들을 다시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고 한다
*
대조루는 서해의 조수가 보인다는 뜻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 / 보물 제178호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 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형식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 / 보물 제178호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기둥 사이를 각각 동일한 길이로 분할하고 세 짝씩의 빗살문을 달았다
좌우 측면은 벽을 치고 있으나 앞의 한 칸만은 외짝 열 개의 문이 있다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 · 극락조 ·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돠 닫집의 장식 역시 화려하다

 

 

 

 

전등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추녀를 받히고 있는 나부상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해 놓았다
이것은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목수의 재물을 가로채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이란 전설이 전해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
어떤 이는 사찰을 수호하는 원숭이 상이라고도 한다

 

 

 

 

강설당(講說堂)
일제강점기의 불화인 아미타불탱(阿彌陀佛幀)이 있다
2002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다

 

 

 

 

향로전(香爐殿)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노전(爐殿) 스님이 지내시는 곳이다
정면 3간 ·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불공용 제물의 저장고였으며 병인양요 때에는 중군의 거처였다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전등사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조석 예불 때 사용되는 일반 범종이 있다

 

 

 

 

약사전(藥師殿) / 보물 제179호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 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 측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내부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염라대왕 등 시왕을 모셔 놓은 전각이다

 

 

 

 

달마대사 나무 조각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 보물 제393호

중국 송나라(1097) 때 회주(懷州) 숭명사(崇明寺)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富平)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각의 정사각형을 돌렷다

이 정사각형 안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전등사 범종(傳燈寺 梵鐘) / 보물 제393호

 

 

 

 

전등사 전경

 

 

 

 

극락암(極樂庵)
스님의 수행처로 출입금지다

 

 

 

 

소각로
부처님 계신다

 

 

 

 

삼성각(三聖閣)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임진왜란(1592)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 · 성주 · 전주 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復印)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 · 태백산 · 묘향산 · 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史閣)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 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移安)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문화권사업으로 복원 · 정비하였다
*
전등사 뒷편에 있다

 

 

 

 

취향당(翠香堂)
정족산 사고의 관리사 역활을 했던 곳이다
최근 복원되었다

 

 

 

 

장사각 삼문(三門)

 

 

 

 

장사각(藏史閣) · 선원보각(璿源寶閣)
1678년(숙종 4) 비로소 실록이 이곳으로 옮겨진다
이곳은 조선왕조실록뿐만 아니라 왕실 족보인 선원보 · 의궤(儀軌) · 정부문서도 보관하였다
사고 관리는 본래 춘추관의 소속이었지만, 이 사고의 관리는 전등사에서 맡은 것이 특징이다

 

 

 

 

장사각(藏史閣)

 

 

 

 

선원보각(璿源寶閣)

 

 

 

 

전등사 가는 길
선원보각 옆에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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