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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동작충효길3코스(한강나들길)

동작구는 예로부터 충효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동작의 길에는 충효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역사와 문화공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작충효길」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되었다

「동작충효길」은 산과 강을 지나며 도심을 걷는 총 7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

동작충효길3코스(한강나들길)은 동작역부터 노량진역을 잇는 구간으로

한강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효사정과 용양봉저정 · 배수지공원 · 사육신공원을 거치는 4.7km의 길로

효(孝)와 충(忠)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동작역 1번출구

동작충효길3코스는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왼쪽 길이다

시점이다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반포천교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반포천과 만나고 오른쪽으로 동작교와 올림픽대로의 교각을 지나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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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천이 한강으로 스미는 지점이다

 

 

 

 

동작노을카페

동작대교 옆으로 56층의 래미안 첼리투스아파트가 보인다

 

 

 

 

반포 수난구조대

 

 

 

 

한강하구로부터 43km 안내봉

동작대교 건너 남산도 희미하게 보인다

 

 

 

 

실비 오는 한강길이다

 

 

 

 

강가로 나가 본다

 

 

 

 

용산구 이촌동

동작대교와 한강대교 사이 아파트단지가 물 위에 떠있는 작은 배 같다

 

 

 

 

노들섬

올림픽대로 교각과 한강대교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올림픽대로 교각 밑이다

 

 

 

 

남산

래미안 첼리투스아파트를 함께 넣어본다

 

 

 

 

원불교소태산기념관

커다란 원이 붙어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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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명수대 자전거 이야기 정거장」이 있다

 

 

 

 

명수대 자전거 이야기 정거장

맑은 물이 보이는 곳이라는 뜻의 명수대(明水臺)는 처음에는 일본의 부호 목하영이 서달산 정상에 지었던 별장 이름이었으나

이후 경성의 부호들이 앞 다투어 이곳에 별장을 지어 살자 동네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한강나들길 안내목

흑석초등학교와 흑석역으로 나가는 길이다

*

이곳에 흑석역 150m · 효사정 0.4km 방향안내판이 있다

 

 

 

 

흑석동 천주교회

1901년에 태여난 문학가 심훈의 생가 터이다

*

흑석초등학교와 흑석역을 지난 지점이다

 

 

 

 

효사정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효사정(孝思亭)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한강변 남쪽에 있는 정자로써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이정을 지낸 공숙공 노한의 별장이었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이 자리에 정자를 짓고 3년간 시묘를 하였으며

때때로 정자에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가운데 경관이 일품인 것으로 유명했다

신숙주 · 정인지 · 서거정 등 내노라 하던 문인들이 효사정의 정취와 이름의 참 뜻을 시로 읊어 기렸을 정도로 조선시대 효도의 상징으로 이름을 떨쳤다

서울의 우수경관 조망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효사정(孝思亭) 현판

 

 

 

 

한강을 바라보다 안내판

 

 

 

 

래미안 첼리투스아파트 · 동작대교 · 올림픽대로

효사정 본 오른쪽이다

 

 

 

 

노들섬 · 용산

효사정에서 본 왼쪽이다

 

 

 

 

효사정

효사정이란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호조참판 강석덕이 지었으며

정면 3칸 · 측면 2칸 · 규모 46.98㎡의 5량 집으로 난간을 두르고 팔작지붕을 얹은 형태로써

일제 때 한강신사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서달산 방향

조석견과 완성군 이귀정 묘역(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7호)이 보인다

 

 

 

 

심훈 상

효사정 바로 아래에 있다

 

 

 

 

동작구 출생 문학가 심훈 안내판

심훈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 검은돌집(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1901년 태여났다

또한 그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이곳 흑석동에서 살았다

심훈이 태여난 곳은 천주교 흑석동성당 자리로 흑석동성당에는 「심훈생가 터」표석이 있다

1930년 3 · 1만세운동 11주년을 기념해서 지은 항일저항문학인 시집 〈그날이 오면〉에는

심훈의 고향 흑석리를 그리워하는 시 고향이 그리워도가 실려있다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빗돌

심훈 상 아래 쪽에 있다

 

 

 

 

학도의용군 현충비

민족의 비극이었던 6 · 25전쟁이 발발하자 30여만 명의 학생들은 조국을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학업을 중단한 채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그 중 5만여 명은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학도의용군들은 당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전투에 배치되어 용감하게 싸웠으며

특히 1950년 8월 11일 포항지구 전투에 71명이 3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 중 48명의 학도의용병들은 후방의 지원이 끊긴 채

대규모 병력인 적의 파상 공세를 4차례에 걸쳐 막아내며 장렬하게 싸우다 꽃다운 청춘을 조국의 제단에 바쳤다

이 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학도의용군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고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추진위원회가 학도호국단 및 관계자들의 협조를 얻어 1955년 6월 25일 건립하였으며

상단에 추모비명과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문학가 심훈의 안내판이 붙어있는 길이다

 

 

 

 

심훈의 가계도 ·  탄생과 성장

1901년 9월 12일, 심훈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윤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심대섭 · 호는 해풍(海風)이다

아버지 심상정은 은로보통학교 교장과 신북면장을 역임했고, 외조부 윤현구는 조선말 3대문장가 윤희구의 막내로 시 · · 화에 능했다

큰형 심우섭은 희문의숙 1회 졸업생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와 경성방송국 과장을 역임하였다

작은 형 심명섭은 동경 청신학원을 졸업했고, 심훈의 미완성 소설 〈불사조〉를 완성하고, 시집 〈그날이 오면〉을 발간하였다

*

1915년, 심훈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 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 입학하고

1917년 3월 왕족 이해영과 결혼하였다

 

 

 

 

판결문(1919. 11. 6 경성지방법원)

1919년 3 · 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심훈 선생의 판결문이다

 

 

 

 

심훈씨 영면(沈熏氏 永眠)

1936년 그의 죽음을 다룬 신문기사인데 요즘 문체와 상당히 다르다

 

 

 

 

노들강변 안내판

경기민요 「노들강변 」악보와 노들나루(鷺梁津)의 설명이 있다

노량진은 한강 남안, 지금의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 강변에 있던 나루터로

옛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 하였고 백로가 노닐어 노량진이라고도 하였다

이 나루는 한양에서 시흥 · 수원 방면을 거쳐 충청 · 전라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있어 조선시대에는 군대가 주둔하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나루로서뿐만 아니라 석벽 위에 아담한 봉우리 밑으로 강물이 교교히 흐르고 절경이 펼쳐져

전국의 명인들이 누정을 짓고 감회어린 시구절을 읊었으며 「노들강변 」이란 민요도 널리 전승되었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란 여관이 있어 도성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쉬었다 갔으며

나루의 북쪽 강변에는 새남터라 불리는 넓은 백사장이 있어 일찍이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이는 행인의 왕래가 많았던 이곳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처형과정을 보임으로써 경계심을 갖도록 한 조치였다

조선 후기 정조 때는 수원 사도세자의 묘소로 향하는 길목인 노들나루에 국왕의 행차를 위한 배다리를 놓았으며

이를 위하여 주교사라는 전담 관청을 설치하였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고 다음 해엔 한강철교가 건설된데 이어 인도교가 준공되면서 나루터로써의 기능이 상실되어 갔으며

지금은 1999년 서울시에서 세운 「노량진 나루터 표석 」이 옛 정취를 지켜주고 있다

 

 

 

 

심훈의 탄생과정과 성장

본명 심대섭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 소설가 · 시인 · 언론인 · 영화인으로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 」을 연재할 때부터 쓰기 시작한 필명이 훈(熏)이다

*

심대섭의 성장이야기

일본인 선생의 모욕적인 언사에 반항하기 위해 수학시험에 백지를 냄으로써 과목낙제로 유급 당함

당시 급우로 외사촌인 동요작곡가 윤극영과 교육가 조재호 · 박열 · 박헌영이 있다

 

 

 

 

영화저널가 그리고 희망의 빛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주 지강대학 국문학과 입학하였다

1923년 중국에서 지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 조선일보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이해영과 이혼하고 〈미인의 한〉이란 외국 장편소설의 후반부를 번안하여 연재하였고

영화 〈장한몽〉의 주역인 이수일 역의 후반부를 대역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서 34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27년 마침내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원작 · 각색 ·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는데

이 영화는 당시 〈아리랑〉에 이어 한국영화 개척기의 또 하나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졌다

〈먼동이 틀 때〉는 매우 사실적이고도 인물의 묘사가 극명하여 무성영화시대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심훈은 수많은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을 많이 남겼지만 직접 감독한 작품은 아쉽게도 〈먼동이 틀 때〉 한 편으로 그쳤다

*

농촌 당진에서 희망을 찾다

1932년 일제의 탄압으로 부모님이 살고 있던 당진으로 이사하여 창작활동에 전념하였으며

봄의 서곡 〈영원의 미소〉를 발표하고, 〈직녀성〉(1934)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筆耕舍)라 불렀으며, 농촌생활의 어려움을 통해서 희망을 찾는 노력을 하였다

1936년 8월 16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 감격하여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로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후 상록수 출판 관계로 상경했다가 당시 전국적으로 퍼진 장티부스에 걸려 9월 16일, 36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심훈의 글

필경 · 오오, 조선의 남아여! · 상록수 ·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 첫눈 · 조선의 영웅 등이 있다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 1919. 8. 29

1919년, 심훈은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3 · 1운동에 참가하여 3월 5일 투옥되었다가 11월에 출감하였으며

이 때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을 썼는데 이 편지는 문인으로서의 심훈의 민족의식을 나타낸 첫 작품이기도 하다

 

 

 

 

그날이 오면 / 1930. 3. 1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

이 정자는 정조 때 배다리(舟橋)로 한강을 건너는 전후에 휴식하던 주정소(晝停所)였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찾았다

그 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는데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보고 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

현재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작은 언덕에 있다

 

 

 

 

용양봉저정

노량주교도섭도 · 정선의 동작진 · 정조능행도 등이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현판

 

 

 

 

노량주교도섭도(용양봉저정 모습)

13회의 화성능행 중 가장 장엄했던 을묘능행(1795)을 담은 〈정조능행도〉 8폭 병풍 중

노량주교섭도 상단에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의 용양봉저정 그림이다

지금은 정자 한 채만 남아있지만 1791년 준공 당시는 상당한 부속 건물을 갖춘 규모있는 행궁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버들이 늘어서 있고 도진촌이 들어앉은 노들나루(노량진)의 전경과 하얀꽃이 만발한 동산과 정조의 행차를 구경나온 군중의 모습이 생생하다

 

 

 

 

1795년 정조의 화성행행 〈반차도〉

원래 두루마리 형태였는데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의 고증에 의해 새로 채색 제작된 것이다

1,700여 명의 인물과 근 800필의 말을 담은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지휘하에

김득신 · 이인문 · 장한종 · 이명규 등 진경시대의 쟁쟁한 화원들의 공동작품이다

 

 

 

 

정조대왕 능행길 · 1975년 화성행차 일정

 

 

 

 

정조대왕 능행길 간략도

 

 

 

 

노들역 3번출구로 들어가 2번출구로 나간다

 

 

 

 

노들나루공원 야외무대

노들역 2번출구로 나와 바로 왼쪽으로 「노량진 정수장 터 비」가 옆에 있다

 

 

 

 

축구장을 지난다

 

 

 

 

래미안트윈파크아파트

축구장을 지나 도로를 건너 오른쪽 길이다

 

 

 

 

천부교(天父敎)

1917년 11월 22일 평안북도 덕천 출생의 박태선(朴泰善)에 의해 창설된 종교이다

교회 탑에 십자가 대신 비둘기 형상이 있어 일명 「비둘기교회」라고도 한다

 

 

 

 

사육신역사관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전시관이다

 

 

 

 

사육신공원 조망대

 

 

 

 

 63스퀘어

사육신공원 조망대에서 봤다

 

 

 

 

한강철교

역시 조망대에서 봤다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불이문」이다

 

 

 

 

의절사(義節祠)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대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문기 등의 일곱 충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의절사에서는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9일 추모제향을 올린다

*

조선시대에는 노들섬이 있던 백사장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다

조선소 인근에는 역적이나 중죄를 지은 죄인을 참수하는 형장이 있었다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실패한 사육신도 이곳에서 참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도비각(神道碑閣)

"유명조선국 육신묘비명"으로 시작하는 비문은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겼다고 적혀있다

정조 6년(1782)에 세워졌다

 

 

 

 

전설의 짬뽕

동작충효길 3코스 마침점인 노량진역 옆에 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1km, 소요시간 4시간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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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충효길3코스와 4코스를 하루에 걸어 GPS지도를 함께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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