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봄내길과 북한강변 걷기 등으로 여러 번 걸었지만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은 오른적이 없어 찾았다
봉의산은 비교적 낮은 산이기에 걷는 거리와 시간을 맞출 겸 춘천역에서 걸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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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의산(301.5m)은 춘천분지 중앙에 우뚝 솟은 잔구(殘丘)로 마치 상서로운 봉황이 나래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것 같다고 해 유래하였다
춘천분지는 북쪽 오봉산(779m) · 서쪽 삼악산(654m) · 동쪽 대룡산(899.4m) · 남쪽 금병산(652.2m)으로 둘러싸인 타원형 분지이다
춘천역 2번출구
시점이다
소양강변길 안내도
소양강변을 따라 걷다 소양정에서 되돌아오는 길이다
소양정을 봉의산 들머리로 잡았다
춘천대교
춘천 레고랜드 테마파크가 걸설 중인 중도로 들어가는 다리다
강변 둑으로 올라가는 계단
춘천대교 오른쪽 길로 걸으면 있다
춘천대교
북배산 방향이다
둑길을 걷는 빅터
봉의산
둑길에서 봤다
청춘수상레저
춘천 평화공원
중도 주민선착장 옆이다
겨울연가 촬영지 안내판
겨울연가 촬영지 안내판
소양강 스카이워크
입장료 2천 원이다
너에게 잠기다
사랑의 자물쇠를 매다는 곳이다
소양강 스카이워크
소양강 쏘가리상이 가린다
북한강 상류 방향
스카이워크 데크에서 봤다
소양강처녀상
소양강처녀 가사 · 악보 빗돌이 앞에 있다
지하도로 차길을 건넌다
소양로 비석군(향토문화재)
선정비란 관찰사와 부사 등 고을이 수령의 공적이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비로서 우리나라 어느 고장에 가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칭송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영세불망비 · 애민선정비 · 송덕비 · 공덕비 · 흥학비 · 청백비 등 다양한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 비석군은 소양1교 주변과 춘천 관내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1940년과 1983년에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서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비 가운데는 조선시대의 종이품직으로서 지금의 도지사급인 관찰사비 3기 · 종삼품직인 시장급인 부사비 15기 · 종사품직인 군수비 2기 등 총 26기가 있다
춘천절기 전계심묘비(春川 節妓 全桂心墓碑)
춘천에서 태어난 관기 전계심 무덤 앞에 있던 묘비이다
외형적으로는 오랜 세월 비바람으로 훼손되어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비석에 불과하나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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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심은 조선 22대 정조 때 천한 가정에서 태여나 기생이 되었으나 17세 되던 해 춘천부사의 소실이 되었다
행복도 잠시 부사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나 기회를 보아 데려가겠다는 약속만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무 소식도 없는 약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서울의 기방에 팔아버렸다
계심은 어쩔 수 없어 기방에 있게 되었으나 이미 부사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기에 부사가 자신을 찾아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녀의 고결한 성품과 곧은 절개를 꺽어 보려는 사내들의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은장도를 가슴 속에 간직한 채 모진 마음을 먹고 정숙하게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폭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정조를 유린 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낙태하게되자
사랑했던 사람에게 애절한 사연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한편 계심이 자결하던 날, 계심이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와 보니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부사는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 봉의산록에 장사지내 주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순찰사가 행적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문을 세워주었고 1796년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고
뜻을 모아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춘천절기 전계심묘비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기생의 묘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무덤은 본래 봉의산록 소양강변에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7년 이곳으로 옮겼다
공병중대 전적지
6 · 25동란 초기 이곳에 배치되었던 6사단 공병대 1중대가 소양교를 건너 공격해 오는 적과 혈전을 전개했던 장소이다
소양정 마당 앞쪽에 있다
춘본학교 설립자 윤용성 공덕비 · 춘본학교부형일동 을유년시월
1942년 가난한 소년 · 불구자 · 학령기가 지난 아이들을 위해 「춘본학교」를 설립했다
해방 후엔 일본 미도리학교 자리에 춘주(春州)학교를 새로 건립하고 춘본학교 학생들을 춘주학교에 편입시키고 춘본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 즈음 춘본학교 설립자 윤용성씨를 기념하여 당시 학부형들이 세워준 공덕비다
6 · 25전쟁 뒤엔 춘주학교는 「춘천 중앙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소양정(昭陽亭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호)
창건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말 문인 운곡 원천석의 시에 「소양정」이라는 명칭이 쓰인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인 15세기에는 「이요루(二樂樓)」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1647년(인조 25) 춘천부사 엄황이 정자를 수리하면서 지금의 소양정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소양정은 본래 현재의 위치보다 아래인 소양강변에 있었으며 1780년(정조 4) 부사 이동형이 홍수로 유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66년 지금의 위치에 정면 4칸 ·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재건립되었다
현판은 재건립 당시 강원도지사였던 박경원(朴敬遠)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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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이동식을 했다
소양정부(昭陽亭賦)
소양정 내부에 붙어 있는 많은 기(記) · 부(賦) 중 단기 4301년으로 가장 오래된 것 같다
단기 4301년이면 1968년이니 재건립 2년 후에 쓴 것이다
스카이워크 · 자연의 생명(소양강 쏘가리) · 소양강처녀 등이 보인다
소양2교 방향
공병중대 전적지 안내판이 마당에 있다
구봉산 방향
봉의산성
석축이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봉의산성이 있던 곳 같다
소양정 우측 들머리로 10여 분 오른 지점이다
충원사 갈림길 안내판을 지난 곳이다
운동기구
정상 바로 밑이다
자연환경 보존을 위해 폐쇄된 구간 알림판
운동시설이 있는 곳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봉의산 정상 복원 안내문
정상부에 1973년부터 운용하던 통신시설을 2013년 산림생태복원을 통해 철거하고 봉의산의 옛 모습을 되찾고자 산림으로 복원한 곳이다
봉의산 정상
지적삼각점이 봉의산 정상석을 대신한다
순의비 방향안내판
춘천 봉의산성(강원도 기념물 제26호)
이 산성은 언제 쌓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7세기 이후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217년(고종 4) 거란족 일파의 침입으로 안찰사 노주한이 전사하였다고 하며
고려사에서는 1253년(고종 40) 몽고병이 침입하자 춘천 주민이 이 산성에 들어가 항전하였는데 몽고병의 포위가 장기화되면서
성안의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여 소와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시게 되는 등 비참한 광경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돌파구 마련을 위해 교주도 안찰사 박천기가 조직한 결사대의 공격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산성이 함락되자 대부분의 군 · 관 · 민이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진을 쳤던 곳이며 한국전쟁 때에는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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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둘레는 약 1,280m에 달하며 높이는 5~6m 내외이나 지형에 따라 다르다
성벽은 대체로 붕괴되었으나 일부 구간에는 석축이 남아 있으며 일부 구간은 지난 1991~1994년에 복원공사를 하였다
봉의산 샘터
음용불가 안내문이 붙어 있는 샘물은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철 펜스로 폐쇄한 곳은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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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이동식을 하고, 손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면 했다
충원사로 가는 길이다
의암호
충원사로 가다 내려다봤다
충원사 방향안내판
충원사
극락전 · 대웅전 · 범종각 등이 보인다
충원사 범종각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학월 경산대종사 승탑
다음 지도에 「봉의산성」으로 써있는 곳으로 용산배수지 옆이다
용산배수지 때문인지 사리탑 경호가 대단하다
춘천역
충원사에서 내려오며 봤다
신매대교
충원사에서 내려오며 봤다
소양로 현대아파트 옆길로 내려왔다
근화초등학교
춘천장애인스포츠센터 앞이다
봉의산
춘천역으로 가며 봤다
춘천역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거리 8.9km, 소요시간 4시간 5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