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가옥(張勉 家屋 등록문화재 제357호)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통령 ·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건립하여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하였던 곳으로 근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대문
운석 장면 선생 상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부산 세관장을 지낸 장기빈와 황루시아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안채 · 사랑채
전시실 1 (건너방)
미국유학과 신앙활동
구한말 서울 관립 영어학교를 나온 부친 장기빈의 영향으로 유학의 필요성을 자각하였다
1920년 3월 기독교청년회관(YMCA) 영어과 최우등 졸업 후 미국에 건너갔다
교육자 장면과 저술활동
일제에 의해 정치 참여 기회가 봉쇄되어 있던 식민통치기간 중
양식있는 한국인이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민족의 미래에 투자하는 교육운동에 투신하는 것이었다
장면선생은 1931년 동성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를 가르치다
1947년 교단을 떠날 때까지 후진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화학실험서와 학습장
신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노트
장면 선생의 묵주와
1921년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 후 장면 선생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기도서
교부들의 신앙(1944) · 젬마 갈가니(1953)
장면 선생이 번역한 책이다
건국과 외교를 통한 나라 세우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선출되었다
유엔회원국 대표를 상대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6 · 25전쟁과 나라 지키기
6 · 25전쟁이 터진 지 하루만에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보이사회에 참석하여
북한군의 철퇴와 유엔회원국의 침략자 원조금지를 규정한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 냈고
트루먼 미국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대한민국이 유엔에서 찬성 48표 · 반대 6표 · 기권 1표로 합법정부로 승인 받는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주미대사 신임장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정한 신임장
재외국인등록증
주미대사 재직시 재외국민등록증으로 1949년 10월 16일자로 발급되었다
유엔총회 연설문
1948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촉구하는 영어 연설문 한글 저본이다
연설 후 찬성 41표 · 반대 6표 · 기권 2표로 한국 독립 승인 안이 총회에 상정되었다
유엔총회 참석자격증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 등 외교관 시절의 신분증들이다
장면 연보
전시실 (부엌)
전시실 / 안방
지아비와 아버지로서의 삶
일생의 반려 김윤옥 여사와의 만남
18세 되던 1916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부친이 간택한 천주교 집안인 김상집의 막내딸로 당시 16세의 김윤옥과 결혼하였다
부인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결혼하였지만 금혼식을 맞기까지 평화스런 가정생활을 누렸다
가족사진
김윤옥 여사의 받짇고리
장면 박사 · 김윤옥 여사 사진
장면(요안) 박사 · 김윤옥(마리아) 여사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
각종 명함
영문으로 표기된 명함이 대사 시절 사용했던 것이다
믿음을 실천하다
장면 선생은 태어나자마자 영세를 받고 10세 때 견진성사를 받었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시절 일제의 지배하에 고통받는 민족의 영혼 구제를 위한 천주교 신앙전파에 자신을 바칠 생각을 품었다
1921년 8월 장면 선생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였다
이후 그의 세속적 지위는 교육자 · 외교관 · 정치가로 바뀌어 나아갔지만
평생토록 성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으로서 서약한바대로의 의무를 지키는 삶을 살았다
전시실 2 / 사랑채
민주주의 황금시대를 열다
1960년 6월 내각책임제 개헌이 단행되었으며 장면 선생은 선거에 출마하여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인준되었다
이후 5 · 16군사정변으로 실각하기까지 4 · 19혁명이 제기한 시대적 소명인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꽃피웠다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 당하고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어 사형을 구형 받는 등 박해를 당했다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선생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 악화로 명륜동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서거 국민장으로 포천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중요한 정치사 몇 가지를 모니터로 보여준다
시대를 앞선 진정한 리더
1956년 5월 15일 총선에서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해 9월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우려한 자유당 핵심부의 사주로 저격 당하였다
이후 선생은 순화동 공관을 반독재투쟁의 보루로 삼아 국민의 권익수호에 전념하였다
관용의 리더십
1956년 부통령 재직시 저격을 당해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오른 선생은 사형이 확정되었던 저격범의 감형을 주선하는 관용을 실천하였다
1956년 4대 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장면의 홍보 전단
4대 부통령 시절 장면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공한
장면 부통령 공한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신
저격범 최훈이 보낸 참회의 봉함엽서
인동 장씨 세보(仁同張氏世譜)
시정연설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개획
'5 · 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내놓은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고
당시 부흥부 산업위원회 위원이었던 김입삼 전 전경련 고문은 증언했다
사상과 신념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철권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배운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며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저술된 책 · 친필노트 · 훈장
좌우명
장면 선생이 삶의 좌표로 삼은 좌우명이다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1967년 2월 서거한지 8개월 뒤 간행된 회고록이다
회고를 비롯해 연설문과 기고문이 수록되어 있다
친필 연보
1899년 출생부터 서거 1년 전인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연보로
노트 한 면에는 '가족 및 국내상황'을 다른 면에는 '국제정세'를 기술해 놓았다
건국훈장
1999년 8월 13일 영전에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행원동
장면 가옥
사랑채(왼쪽)와 안채(오른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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