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천주교순례길은 서울시내 주요 천주교 성지를 연계한 길로 총 세 코스(28.42km)로
2014년 교황 방한에 맞춰 2014년 5월 서울시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함께 개발했다
그 중 2코스는 비교적 짧은 5.65km로 북촌한옥마을에 있는 가회동성당에서 시작해
형조 터 · 우포도청 터 · 경기감영 터 · 서소문역사공원 순교성지 그리고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이어진다
안국역 2번 출구
시점이다
재동관광안내소
요즘 이곳은 중국, 일본 등 외국인들이 많다
안국역 2번출구에서 북촌로를 따라 오르면 있다
가회동성당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가회동성당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부활대축일 첫 미사
그리고 2014년 부활대축일 성당 축성을 기념하는 글귀가 계단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보니 주문모 신부의 첫 미사 220주년이다
가회동성당
북촌한옥마을 특성을 고려해 양옥 성당 앞쪽에 사랑채와 대청마루를 갖춘 한옥이 최근에 신축됐다
가회동성당 상패
2014년 제32회 서울특별시 건축상 최우수상 · 2014년 한국건축문화대상
가회동성당 1층 역사전시실
한국천주교회와 가회동성당의 역사전시실이다
가회동성당 역사전시실
지난 주에 봐서 오늘은 패스다
가회동성당 역사전시실
가회동성당 역사전시실
가회동성당 성전
결혼식이 있어 꽃장식이 있다
옥상 전망대
멀리 남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북촌한옥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 십자가 밑에 종이 있다
옥상 성전
남산
한옥마을
장원서 터
성당을 나와 북촌한옥마을을 지나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는 '형조 터'를 찾아가는 길이다
세계장신구백화점
동아일보사 창간사옥터 빗돌
1920년 4월 민족언론을 표방하며 창간된 동아일보 사옥 터 빗돌이다
그에 앞서 1917년까지 기호학교와 그 후신인 중앙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1926년 동아일보사가 광화문 신축사옥으로 이전한 뒤에는 중외일보 사옥이 되었다
정독독서실(예전 경기고등학교)
1900년 한국 첫 중등고육기관으로 출범한 경기고등학교 터로 1976년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서울특별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기도감 터 · 성삼문 선생 살던곳 · 중등교육발상지 빗돌이 있다
정독독서실(예전 경기고등학교 ·등록문화재 제2호)
언덕을 오르니 경기고등학교 건물이자 현 정독 독서실 건물이 보인다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기념비
비온 뒤 갠 날 이곳에서 보는 인왕의 모습은 예나 이제나 새롭고 아름답다
이 기념비 옆이 인왕제색도와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일치하는 곳이나 지금은 도서관 건물로 인왕산의 정수리만 빼꼼 보일 뿐이다
남산
정독도서관 정문에서 보니 전망이 좋다
앞 분수대를 보니 덕수궁 분수대가 떠오른다
정독도서관
입구에 커다란 그림책이 있다
이철수가 그린 권정생 작품 '몽실언니'가 전시 중이다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
몽실언니 이야기
소담정(이용자 식당)
1938년 건립된 건물로 당시 강당이었다
중등교육발상지 · 경기고등학교 이전기념비
1900년 고종황제께서 최초의 관립중등학교로 세우신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곳을 알리는 비다
김옥균1851~1894) 집 터
공주에서 태여나 1866년부터 북촌에서 살았다
이곳 화동 일대에는 조선 말기 개화파 관료들의 거주지가 자리잡고 있었으나
처음의 학교 터는 김옥균의 주택지였고 이후 서재필과 박제순의 집이 합쳐지면서 넓은 부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서울교육박물관(등록문화재 제2호)
1925년 준공 당시 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현재는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울교육박물관이다
정독도서관과 함께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호다
각 학교 모표 · 뺏지
서울교육박물관은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육의 모습을 보여준다
WE ARE YOUNG
젊은이들은 하지 않는 말...
원래 순례길은 삼청로로 나가야 하나 덕성여고로 가는 율곡로3길로 걸었다
감고당 터
감고당은 조선 숙종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살던 친정집이다
인현왕후는 14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서인되어 6년간 감고당에 갇혀 살다가 환궁하였다
지금은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로 옮겨져 있다
액세서리 판매점
율곡로3길엔 돌벤치에 작은 물건들을 올려놓고 파는 길거리 가게들이 많다
아띠인력거
골목길 여행을 도와주는 인력거가 지나간다
동십자각(東十字閣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호)
경복궁의 궁담(宮墻) 동남 모서리에 위치했던 망루로서 1880년 무렵에 건립되었다.
하부기단은 장대석을 7단으로 쌓아 네모난 축대를 만들고 석 줄의 십자형이 투각된 아담한 전축여장(塼築女墻)을 둘렀다
북쪽에는 조그만 편문(便門)을 내고 그 안에 앞 · 옆면의 길이가 똑같은 방형의 누각을 세웠다
광화문
전기통신 기념탑
이곳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전기통신이 발신된 한성전보총국이 자리했던 터다
사역원 건물을 인수하여 1885년 9월 28일 문을 열고 제물포에 첫 전신을 띄웠으며, 11월 19일에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전신망을 넓혔다
광복 후에는 광화문전화국이 있던 자리다
육조거리
세종로공원 앞 길 바닥에 새겨져 있다
서울의 찬가 노래 비
"유서깊은 수도 서울 시민에게 긍지와 희망을 심어주고 서울 사랑의 마음을 우리에게 아로새겨준
길옥윤 작사 · 곡 '서울의 찬가' 노래 비를 이 터에 세워 시민들이 영원히 애창하는 노래로 불려지기를 바랍니다"
주요한 시비
주요한의 대표시 '빗소리'가 새겨져 있다
조선어학회 한말글수호기념탑
우리 말과 글을 지키는 것만이 겨레를 지키고 끝내 독립을 쟁취하는 유일한 길임을 굳게 믿고
1908년 8월 31일 한힌샘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국어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하였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고 1936년 '조선어 표준말'을 사정하였으며
1940년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함으로써 국어는 비로서 문명어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말 큰사전' 출판에 착수하였는데 조선어 사용금지령, 창씨개명 등 민족 말살 책동을 노골화한 가운데
이야말로 가장 힘있는 민족운동 독립투쟁임을 간파한 일제가 주동인물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함흥형무소에 구금하였다
이에 이윤재, 한징 2분이 옥사하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이 광복을 맞아 반 주검 상태로 풀려나니 이것이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다
한국전보총국 터
조선 고종 22년(1885) 조청전선조약(朝淸電線條約)을 체결한 후
조선과 청과의 사이를 연결한 서로전선(西路電線)을 운영하기 위해 세운 한성전보총국이 있던 자리다
세종문화회관
공조 터
공조는 토목 · 건축공사를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형조 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수많은 교인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는데
그 시작은 정조 9년(1795)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집회를 하던 교인들을 압송한 사건부터 시작된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교인과 성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우포도청 터
1879년 5월 14일 충청도 공주에서 드게트 신부와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월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
이 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은 자행되지 않았으나 드게크 신부와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다가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레오), 김덕빈(바오로), 이용헌(이시도로) 등이 아사로 순교하였다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일민회관 앞쪽 화단에 있다
종로구 경계점 빗돌
청계광장 소라탑
군기시 터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예전 서울시청 벽시계가 3시를 가르키고 그 밑엔 "당신의 ( )가 좋아요, 그냥"
( )은 '껴안기'가 아닐까?
대한문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옆 장터에선 막걸리도 주고 빈대떡도 준다
또 앞 장터에선 고기를 싸게 파는 행사 중이다
시청 옆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장독대 / 이환권 작
크고 작은 독들이 모여있는 눈덮힌 장독대의 모습에서 겨울나기하는 가족들이 떠올랐고
작품에 반영된 가족들은 작가 친구의 가족 3대로 구성하였다 한다
장미빛 인생 / 최정화 작
플라스틱 합성 재료에 빨간 공업용페인트로 채색한 거대한 꽃송이는 대중적 키치미학으로 풀이된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발언이라 한다
정동로터리 서울시립미술관 들머리에 있다
정동교회(사적 제256호)
고종 32년(1895) 착공하여 광무 1년(1897) 10월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이다
원래 정동교회는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아펠젤러가 설립한 감리교회다
처음에는 '벧엘 예배당'으로 명명한 한옥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신자 수가 늘면서 벽돌식 예배당을 지었다
이 건물은 일본인 요시자와가 설계하고 심의석이 시공하였다
탁사 최병헌 목사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였던 최병헌 목사는 1858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여
1888년 아펜젤러 목사를 통해 기독교를 소개받은 후 1893년 세례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택하였다
헨리 게어하트 아펜젤러 목사
조선선교 감리교회 50주년 기념탑
감리교회 100주년 기념탑
중명전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인 동시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서양선교사들의 거주지였던 이곳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에 궁궐로 편입되었고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과 같이 사용했다
증명전은 왕실도서관으로 정관헌과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했다
어서각 터
어서각은 최규서(1650~1735)의 집터 안에 있던 영조의 어필을 봉안하던 곳이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1182~1226)
1182년 이태리 아씨시에서 부유한 포목점의 아들로 태여났다
1205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생활을 시작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회칙을 인준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작은형제회'가 시작
1224년 라베르나에서 양손, 양발, 옆구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받았고
1226년 10월 3일 아씨시의 포르지운꿀라에서 하느님 품에 안꼈다
경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던 장소다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경기감영 터
경기도 관찰사가 행정사무를 보던 곳이다
경기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이곳에서 조용삼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후 순교했다
서대문 정거장 터 비
경인선 개통 당시 시발점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되었고, 1900년 7월 한강 철교가 개통됨에 따라 서울~인천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서소문 역사공원 · 순교성지 현양탑
서소문은 조선시대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집행지였다
서소문을 통해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하였고 또 시장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도 좋았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나온 103명의 순교 성인들 중
성 정하상 바오로와 성 남종삼 요한을 비롯한 44명의 순교자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된 성인들이다
중림동 약현성당(사적 252호)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벽돌조 서양식 교회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수많은 순교자의 처형지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를 염두에 두고 설립되었다
성당을 지을 때는 명동성당과 같이 순교자가 암매장된 용산 왜고개 성지의 흙으로 벽돌을 빚어 사용했다
약현은 이곳에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중림동약현성당 내 서소문순교성지 전시관에 있다
고산자 김정호 약현에 살다 빗돌
중림동약현성당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있다
서울역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4km, 소요시간 6시간 4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