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첫 봄나들이로 〈한국 근현대회화 100선〉을 전시하는 덕수궁을 택했다
며칠 전 다 읽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의 영향도 있었지만
봄 햇살을 편안하고 가볍게 맞고 싶은 생각에서 찾았다
*
원래 덕수궁 터에는 월산대군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활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고 많은 전각들을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춰나갔다
대한문(大漢門)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런데 동문(東門)이었던 대안문(大安門) 앞으로 여러 방향의 도로들이 건설되고
환구단이 건립되면서 궁궐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이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안문은 '크게 편안하다'는 뜻인데 1906년 수리와 함께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이다
금천교(禁川橋)
1896년 발굴하여 정비한 것으로 이 다리를 건너 중화문에 이르는 길이 궁궐의 중심 행차로였다
다리 가운데 높은 어도가 있다
하마비(下馬碑)
종묘나 향교 등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궁궐엔 이곳만 있다
금천교 옆에 있다
중화문(中和門)
중화전의 정문으로 원래 좌우 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남쪽 모퉁이 일부만 남아있다
중화문 답도(中和門 踏道)
중화문 서수(中和門 瑞獸)
중화전(中和殿)
경운전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 신하들의 하례 ·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한 후 5년 남짓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에 중층의 중화전을 새로 지었다
이때 중화전 행각 128칸과 중화문 · 조원문도 함께 건립되었다
그러나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재건하면서 당시 어지러운 시국과 궁핍한 재정상황으로 단층으로 축소 건축되었다
중화전을 둘러싸고 널찍한 마당, 조정을 형성했던 행각들은
고종 승하 후 대부분 헐리고 동남쪽 모퉁이 부분만 남아 있어 옛 모습을 추측할 뿐이다
광명문(光明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의 정문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건립되었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하자 국장 때 고종의 관(재궁 · 榟宮)이 광명문을 통해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이 크게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이 철거되었고
1930년대 광명문도 중화문 서남쪽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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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전기화차 · 1462년 제작된 정릉동 흥천사 동종(보물 제1460호) · 자격루(국보 제229호)가 전시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덕수궁관) · 석조전
석조전 서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덕수궁관)
1938년에 석조전 서관이 들어서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73년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였고,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정식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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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앞에 있는 정원과 청동제 분수는 서구형 정원으로 1938년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전통 정원은 건물의 뒤에 배치하여 후원이라 하는데 반해, 석조전은 건물 앞에 정원을 조성하였다
또한 우리 전통 조경에서는 분수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한국인의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 여겼기에
정원에 인공으로 폭포를 만들긴 했지만 물이 역으로 치솟는 분수는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등나무 쉼터
포근한 날씨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덕수궁관)
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의 큰 업적을 남긴 화가 57명의 수묵채색화 · 유화 등 회화작품 100점이 전시되고 있다
제1전시실을 관람 후 2층으로 올라가며 봤다
가족 관람으로 아이들이 눈에 많이 뛴다
석조전(石造殿)
고종의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부터 1910년에 걸쳐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이다
경운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1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시설로, 돌계단을 올라 들어서는 2층은 대접견실과 대기실로
3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고종황제 승하 후에는 경운궁이 황폐해지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회화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준명당(浚明堂) · 즉조당(卽阼堂) · 석어당(昔御堂)
준명당은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즉조당(卽阼堂)
즉조당 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 거처했던 곳으로 덕수궁의 모태가 된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다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인조 즉위 이후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해왔던 까닭이다
현재 즉조당에는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석어당(昔御堂)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가 10여 년간 감금생활을 했던 곳이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때 경운궁은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서궁 유폐는 결국 반정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능양군(인조)은 경운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가 정통성을 인정받고 여기서 즉위한다
유폐의 한이 맺혀 있던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꿇어앉히고
36조의 죄를 물은 후 능양군에게 옥쇄를 전하였다
살구나무
덕수궁에서 가장 오래된 살구나무로 꽃이 피는 시기는 3월 말이다
궁에서 보기 드문 2층 목조 건축물인 석어당과 활짝 핀 살구꽃 풍경은 덕수궁의 아름다운 봄을 잘 보여 준다
석조전 연보
보수공사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가림막에 왕가 사진이 붙어 있다
석조전 연보
석조전 보수공사 가림막에 있다
석조전
1909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합니다
기대합니다
후문
회화나무
2013년 7월 태풍으로 줄기 윗 부분이 부러졌다
즉조당 후원 굴뚝
창신문(彰信門)
정관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정관헌(靜觀軒)
이름처럼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서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보는' 휴식용 건물이다
위치도 함녕전 뒤에 자리 잡고 있어 전통 궁궐에서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하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 · 남 · 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베란다가 둘러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석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식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기둥 상부에 청룡과 황룡 · 박쥐 · 꽃병 등 한국 전통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고종황제는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설이 있기는 하나
그에 대한 근거자료나 기록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태조 · 고종 · 순종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할 뿐이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정관헌 내부
예전엔 유리문으로 닫혀있어 들어갈 수 없었는데 슬리퍼로 바꿔 신고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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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와 닥터만 커피박물관에서 본 영화에서는
덕수궁 정관헌이 고종이 커피나 다과를 드시던 곳이 아니라 한다
덕홍전으로 들어가는 삼문
덕홍전(德弘殿)
명성황후 혼전으로 사용되었던 경효전(景孝殿)이 위치했던 곳으로
고종황제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내부 천장의 썅들리에나 봉황문양의 단청, 창방의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함녕전(咸寧殿 · 보물 제820호)
고종의 환어와 함께 1897년에 건립된 왕의 침전으로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기거하다가 68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승하 후 함녕전은 고종의 빈전 및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중화전(中和殿) · 덕홍전(德弘殿) · 함녕전(咸寧殿)
연못
예전 한때 스케이트장이었던 곳으로 대한문을 들어서면 바로 우측에 있다
이제 덕수구을 나서 남대문시장을 거쳐 서울역으로 간다
돌담길
전환국(典圜局) 터 빗돌
고종 22년(1895)~광무 2년(1898) 근대식 백동전을 찍어 만들던 관아가 있던 곳이다
남대문
새로 지어서인지 밝아진 느낌이다
남대문시장에서 늦은 점심으로 먹은 만두와 칼국수다
남대문시장을 지날 때 상인이 한 마디 한다
"날씨가 좋으니 어중이 떠중이 다 나왔네"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흑미 찰호떡
호텔 마누
마침점인 서울역 앞에 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3.5km, 소요시간 4시간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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