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구의 서측, 개화산 · 치현산 · 서남환경공원 · 강서한강공원을 연결하고
강서구의 생태 · 역사문화 · 자연경관 등 특색있는 지역 문화 볼거리와 다양한 테마가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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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둘레길 1 · 2 · 3코스 중 1 · 2코스를 걸었다
방화역 3번출구
집에서 나올 땐 하늘만 흐리더니 지하철 밖으로 나오니 가랑비가 내린다
시점이다
방화근린공원
길꽃 초가집 작은도서관
방화역에서 1코스 시점으로 가는 길이다
강서둘레길 아치
강서둘레길1코스 언덕이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안내판
정자가 있는 언덕에서 내려서면 포장된 도로 오른쪽으로 가면 약사사가 있다
약사사 대웅전
대웅전에는 「약사사 석불입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조성된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불상이다
약사사 석불입상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니 보인다
사진을 만들려면 문을 열어야 하는데 비에 바람까지 불어 눈으로만 감상했다
이곳에 계시는 분 말씀으로 약사사 석불과 미타사 석불이 같다며 이곳 석불을 아버지 석불 · 미타사석불을 어머니 석불이라 부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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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석불은 높이 3.3m으로 약사사 3층 석탑과 거의 같은 고려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약사사 석불은 일반적으로 불상의 형태에서 매우 벗어나 있어 토속적인 경향이 강하며 조선시대 민간신앙에 의해 조성된 불상으로 보인다
약사사 삼층석탑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
약사사 석불입상이 모셔져 있는 금당 바로 앞에 있는 삼층석탑으로 그 모습이 투박하면서도 날렵하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희귀한 석탑의 예로 그 가치가 크다
범종
남무미륵존불(南無彌勒尊佛) 각자
대웅전 뒷쪽 바위에 있다
개화산 약사사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사이에 개화산 중턱에 세워진 사찰로 주변 경치로 인해 겸재가 그림의 소재로 즐겨 찾았다
개화사(조선시대에는 개화사라 불렀다)라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절은
냉천이 있어 병자가 목욕을 하면 오랜 병도 낫는 약수터라 하여 약사사로 불려졌다
노년의 지혜
서울시 선정 우수 조망 명소
약사사 담을 끼고 계단 언덕을 오르면 오른쪽에 있다
겸재 정선이 바라본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 안내판
전망대에 있다
서울시 선정 우수조망명소
행주산성 · 북한산 · 방화대교 · 월드컵공원 · 한강 ·서울N타워까지 한눈에 보인다
행주산성 · 방화대교 · 가양대교
서울시 선정 우수조망 명소로 선정된 전망대는 2011년 5월 환경개선사업으로 설치되었다
헬기장 · 조망대
6 · 25전쟁시 개화산 전투가 발생한 이후 장기간 군부대 훈련장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주민들에게 위협감을 주던 폐타이어와 방공호 등을 철거한 후
생태복원사업과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주민에게 되돌려 준 공원이다
봉화정(烽火亭)
조선시대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라도 순천에서 오는 봉화를 받아 남산 제5봉수에 전달하던 곳이므로 봉화정이라 하였다
교통호
강서둘레길 방향안내판이 있다
봉화정 · 아라뱃길전망대 방향안내판
아라뱃길전망대 계단
아라뱃길 전망대
아라뱃길 한강 입구
아라뱃길 전망대에서 봤다
보호수
약 천 년 전 신라시대때 주룡산(駐龍山)으로 전해왔다
주룡선생이란 도인이 친구와 술을 같이 하였는데 그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
그후로 산이름을 개화산(開花山)으로 불리어 왔다
임진왜란 · 병자호란전까지 봉화불을 올리어 왔다 하여 개화화산(開花火山)이라 하였는데
그후로 명칭을 개화산(開花山)으로 불리어 왔다
이 자리에 수령이 높은 나무가 있었는데 6 · 25사변때 소실되었다
그후로 동네 주민들은 제사를 지내왔는데, 그 자리에 유목이 자라서 지금까지 동네주민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돌탑
넘어갈 것 같이 생겼는데 정성 때문인지 바람에도 굳굳하다
호국충혼위령비(護国忠魂慰霊碑)
한국전쟁때 김포비행장을 지키던 육군제1사단 12연대 3대대의 대대장 김무중소령을 비롯한
전사자 1,100명의 영령을 추모하는 호국충혼비다
개화산 미타사(開花山 彌陀寺)
한국전쟁 때 육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곳으로 당시에 절은 전소되는 비운을 맞았다
현재 미타사는 작은 법당과 요사가 전부인 단촐한 가람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100여 년 전 창건 당시의 모습과도 별반 다름이 없다
개화산 미타사(開花山 彌陀寺)
개화산 미타사 석불입상(開花山 彌陀寺 石佛立像)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9호
미타사는 고려 말 창건되었다고 전해오는데 석불만 남아 있었으나 1924년 사찰이 중창되었고 1937년 미륵당으로 석불보호각이 지어졌다
석불입상은 전체 높이 320cm · 상 높이 293cm로 현재의 위치보다 높은 산 위쪽에 묻혀 있었으나
이곳 미타사로 옮겨지면서 대좌가 새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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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사 석불을 아버지 석불 · 미타사 석불을 어머니 석불이라 부른다
개화산 미타사 석불입상(開花山 彌陀寺 石佛立像)
석불입상은 커다란 석주(石柱) 같은 형태로 머리 위에는 원반형의 천개(天蓋)가 올려져 있다
둥근 얼굴에 눈은 가늘고 길게 새겨져 있으며 코는 높은 이등변 삼각형의 형태로 콧등이 편평하다
목이 굵고 어깨가 각이 져 있으며, 두 손은 가슴높이로 올려져 수인(手印)을 짓고 있는데 설법인(說法印)을 표현하려고 했던 듯하다
통견식으로 입은 대의(大衣)에는 넓은 띠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고
앞면에는 넓은 4개의 호형(弧形) 곡선을 이루며 치마(裙) 주름은 수직으로 음각되어 있다
또한 발 부분은 별재(別材)의 돌로 조각되어 이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경기 · 충청 등, 중부지방에서 유행하던
석불 유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조성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김포공항
지금도 개화산 정상엔 김포공항 경비부대가 자리하고 있어 출입금지다
하늘길 전망대에서 봤다
계양산
계양산 오른쪽 비행기 밑으로 산줄기를 짜르고 만든 아라뱃길이 보인다
하늘길 전망대에서 봤다
풍산심씨 사당
조선 중기의 문신 심정(沈貞 1471~1531)은 연산군 1년(1495)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06년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화천군에 봉해졌다
중종 14년(1495) 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경주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이 드러나서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황 · 김극필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게 되었다
풍산심씨 묘역
심정의 아들 심사손(1493~1528)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중종 18년(1523) 비변사낭관으로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많은 관직에 올랐다
심사손의 아들 심수경(1516~1599)은 조선 명종 1년(1546)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풍산심씨 묘 60여 기 중,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이 4분의 묘 · 묘비 · 상석 등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습지생태연못의 중요성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할 수 있도록 야생동물에 물을 제공하고 양서류의 산란장소 및 수서곤충의 은신처를 제공한다
또 먹이사슬을 형성하게 하여 생물종의 증가로 생태적 안정성을 갖게된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6.2km, 소요시간 2시간 3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