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삼릉에는 공릉(恭陵) · 순릉(順陵) · 영릉(永陵)이 있다
공릉은 조선의 제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 한씨 · 순릉은 제9대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
영릉은 제22대 정조의 양아버지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를 모셨다
삼릉으로 들어가는 길
호상사 AS센터에 미스 잠발란을 입원시키고
덕암초등학교 정류장에서 31번 버스로 삼릉정류장에서 하차해서 길을 건넌 곳이다
봉일천마을
공릉천 물줄기가 흐른다
홍원연수원
내를 따라 가다 드라마 「더 킹」 촬영장소라는 안내판이 있어 가보았으나 문이 닫혀 있다
파주 삼릉의 정문 · 조선왕릉 세계유산 비
조선왕릉은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파주삼릉 역사문화관
오른족 보라색 건물이다
입장료 천 원이다
파주삼릉 역사문화관
조선왕릉과 파주 삼릉 그리고 주변의 왕실 무덤에 대해 설명해 놓았다
역사문화관 입구에 있는 사진이다
진종 · 효순왕후 영릉
공혜왕후 순릉
장순왕후 공릉
조선왕릉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석실과 회격으로 만드는 조선왕릉을 동영상으로 보여준다
효순왕후 발인 동영상
발인은 돌아가신 분을 장지로 모시는 것으로 조선 왕실의 발인은 많은 인력과 물자가 들었다
따라서 발인행렬의 순서를 그림(발인반차도)으로 그려 철저하게 점검하였다
영릉의 부장품
영릉의 부장품과 공릉과 순릉의 설명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조선왕조의 연대표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역사문화관에서 재실과 능으로 가는 다리다
재실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있다
재실 안채
재실 정면에 있다
재실 · 행랑채
공릉 홍살문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가 ㄱ자로 꺾여있다
공릉 전경
정자각 · 비각이다
정자각
넓은 신도 · 좁은 어도다
정자각 신계
조선국 장순왕후 공릉
공릉 예감
공릉
조선 8대 예종의 원비인 장순왕후(1445∼1461)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1460년 16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이듬해 돌아가셨다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돌아가셨으므로 왕후릉이 아닌 세자빈 무덤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병풍석 · 난간석 · 망주석 · 무인석이 없다
그러나 성종 2년(1472)에 세자빈에서 왕후로 추존되었으므로 이후 공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릉
능침과 난간석 등이 없어 소박해 보인다
장순왕후가 1461년(세조 7)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세조는 이듬해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470년(성종 1)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그러나 왕후로 추존된 후에도 세자빈묘로 조영한 능에 더 이상의 상설을 하지는 않았다
혼유석
아무 문양이 없이 단순하게 만들어진 4개의 고석(북돌)이 받치고 있다
장명등
역시 문양없이 간결한 모양이다
문인석
비교적 듬직한 크기다
공릉 정자각 · 비각
순릉으로 가며 봤다
순릉 홍살문
순릉 배위
정자각 · 수라간 · 수복방 · 비각
거친 참도에는 신도 · 어도 구분이 없다
수라간
신계
공릉보다는 작고 간결하다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
순릉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의 능이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다
순릉
장명등과 혼유석 고석에 문양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한명회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1명 · 딸이 4명 있었는데 그 중 넷째 딸이 공혜왕후이며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 바로 옆의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가 바로 셋째 딸이다
두 사람은 자매간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사이가 된 것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으로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영릉
추존왕 진종과 효순황후의 능이다
정자각 신계
대한 진종소황제영릉 효순소황후부좌
(大韓 眞宗昭皇帝永陵 孝純昭王后祔左)
조선국 진종대왕영릉 효순왕후부좌
(朝鮮國 眞宗大王永陵 孝純王后祔左)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부좌
(朝鮮國 孝章世子墓 孝純賢嬪祔左)
영릉
추존왕인 진종과 효순황후의 능이다
1719년(숙종 45)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난 진종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그 해 11월 3일 경의군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숨을 거두자 영조는 그 해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영릉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 영조는 40세가 넘어 둘째 아들을 얻자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그가 사도세자이다
그러나 영조는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를 폐세자시키고
그의 맏아들인 왕세손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하였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유지를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영릉이라 했다
장명등
혼유석
역시 4개의 고석이 받이고 있다
조선 왕릉 봉분의 평균 높이는 해발 53m고 혼유석의 무게 7~8톤에 달해 건릉 조성 당시 혼유석을 옮기는 데 천 명이나 동원됐다고 한다
그 혼유석 밑에는 박석이 있고 그 아래 왕의 시신이 안치된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결국 혼유석을 들어내지 않고는 석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조선 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9대 성종 능인 선릉과 11대 중종 능인 정릉을 훼손했을 뿐이다
귀면상
고석 사면에 있다
망주석 · 석양
문인석
곡장 옆에 서있다
파주 삼릉을 돌고 재실 방향으로 나가는 길이다
재실
삼릉
검표소 앞에서 봤다
공릉교
파주 삼일운동기념비
삼릉 버스정류장에서 64번 마을버스를 타고 금촌역으로 나가다 버스 안에서 만들었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6.7km · 소요시간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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