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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강화도 이건창 생가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은 15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강직한 성품으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문장에서도 조선 9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지행합일 학풍을 내세운 양명학의 마지막 강화학파 학자로서 외세를 배척하였고
충청우도와 경기도 암행어사 등을 지내면서 관리들의 비행을 단속하고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저서로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락」 등이 있다
곧은 성격으로 유배를 세 번이나 간 뒤 강화도로 낙향했다

 

 

이건창 생가 / 인천기념물 제30호
조부(祖父) 이시원(李是遠)과 5대조 묘소가 오른쪽 뒤로 보인

 

 

 

 

대문채
대문채 좌우로 초가를 얹은 자연석 흙담이 정겹다

 

 

 

 

안채(명미당 明美堂)
9칸 규모의 「ㄱ」자 형태로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3량 가구로 몸체를 짰다
구조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지방의 전형적인 한옥 모습이다

*
현재 건물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 정비한 것이다

 

 

 

 

명미당(明美堂) 편액
안채 대청에 걸려있는 현판 명미당은 매천 황헌(1855~1910)의 글씨다
매천은 1875년(고종 12) 이건창(李建昌)에게 시를 추천 받아 당시의 문장가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특히 이건창 · 김택영과는 그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동안 교유하며 지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 4편을 남겼으며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1910년 8월 음독 자결하였다

 

 

 

 

안채 · 대문채 · 우물
우물은 자연석과 시멘트로 형태만 복원한 것 같다

 

 

 

 

안채 뒷편

굴뚝이 두 개 · 방엔 각 하나씩 있다
두 개의 굴뚝 사이로 조부(祖父) 이시원(李是遠)의 묘소가 보인다

 

 

 

 

안채 뒷편

대청마루에서 뒤꼍으로 통하는 두 개의 문이다

 

 

 

 

대문채

 

 

 

 

명미당 이건창 선생 문학비
문학비 앞면 「숭양 가는 길에」가 있다

 

 

 

 

문학비 뒷면
"... 조선 왕조 제2대 왕 정종의 별자 덕천군의 후손으로
1852년 강화도 사기골에서 상학공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898년 47년을 일기로 세상을 버리셨다 ..."

 

 

 

 

생가 전경

 

 

 

 

생가 전경

 

 

 

 

이건창의 조부 이시원(1790~1866) 묘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아우 지원과 함께 유서를 남기고
죽어 귀신이라도 적을 물리치겠다는 각오로 음독 자결하였다

*
저서로 시문 10권과 고금서 1백여 권 등이 있다

 

 

 

 

시원의 고조부 이대성(1651~1718) 묘
정부인 풍산홍씨부좌(貞夫人 豐山洪氏祔)
증이조판서 행가선대부((贈吏曹判書行嘉善大夫)
호조참판 이공대성지묘(戶曹參判 李公大成之墓)

 

 

 

 

참의공 이광명 묘소 안내판
이대성의 묘소 옆에 있다

 

 

 

 

안내판 뒷산으로 올라보니 두 개의 묘소가 있는데
어느 묘소가 「참의공 이광명의 묘소」인지는 안내판이 없어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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