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무덤이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것을 184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구(李球 · ? ~1822)는 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되어 남연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은신군이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서 죽자 왕족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보냈다
이하응이 아버지의 묫자리를 찾던 중 가야산에는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자리」가 있고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야산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가야사(伽倻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어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훗날 대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高宗)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지만
관은 건드리지 못한 채 돌아간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남연군 비(南延君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
남연군 묘에서 약 700m 떨어진 낮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된 후
이 비를 세웠으며 영의정 조두순이 비문을 지었다
화강암으로 된 두 개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높은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오석(烏石)으로 비신을 놓았다
대좌 높이 134Cm · 비신 길이 186Cm를 합쳐서 전체 높이는 320cm가 된다
비신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지붕 모양의 이수가 올려져 있다
비신에는 큰 글씨로 남연군충정( 南延君忠正)이라고 쓰여져 있고
비문은 작은 글씨로 4면을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
남연군 묘 들머리에 있다
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 손 이병원의 아들로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하여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부탁하였다
지사는 전국을 두루 살펴보고
이곳을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라고 지목하였다
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 묘에는 남연군과 부인 여흥민씨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은 흙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봉분 아래쪽은 원형 호석을 둘렀다
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이곳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남연군의 무덤이 옮겨졌다
이장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역사적으로 이곳은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독일 출신으로 인류학자를 자칭하던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1868년 이 무덤에 잠입하여 보물을 도굴하려고 하였다가
근처 백성들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대원군에게 척양(斥洋) 의식과 쇄국정책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남연군 묘(南延君墓)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상석 · 비석이 있다
남연군 묘비
1864년(고종 1) 7월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가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린 다음
1865년(고종 2) 5월 세운 것이다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올렸으며, 비신은 오석이고 방형 대석을 갖추고 있다
*
유명 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有明 朝鮮國 顯祿大夫 南延君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증시 충정 완산이공 휘구지묘(贈諡 忠正 完山李公 諱球之墓)
군부인 여흥민씨 부좌(郡夫人 驪興閔氏 祔左)
음기(陰記 · 뒷면)
성상 원년 7월 영의정 조두순 계언(聖上 元年 七月 領議政 趙斗淳啟言)
옆면에는 남 흥선대원군 하응 근서(男 興宣大院君 昰應 謹書)라 새겨져 있다
남연군 묘 상석(南延君墓 床石)
왕릉의 혼유석(魂遊石) 규모로 4개의 고석(鼓石)으로 받쳤다
남연군 묘 상석(南延君墓 床石)
북을 닮은 고석(鼓石)은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僻邪)의 의미로
입에 자물쇠를 물고 있는 나어두문(羅魚頭文)을 조각하였다
장명등(長明燈)
능묘 앞에 불을 밝힘으로써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와
후손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장명등(長明燈)
조선 초기에는 장명등에 실제로 불을 켜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명등은 무덤 앞에 실제로 불을 밝히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상징적 석물로서 의미가 더 컸다
간주석(竿柱石)에는 초화문양(草花文樣)을 새겼다
왼쪽 망주석
세호(細虎)는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새겼다
오른쪽 망주석
올라가는 모습의 세호가 있다
보통 망주석에는 동쪽은 촛불을 켜기 위해 올라가고
서쪽에는 끄고 내려오는 다람쥐를 새기는데
이곳에는 반대로 새겼다
동쪽 석양
석양 다리 사이에는 초화문(草花文)을 새겼는데
근심을 잊게 해준다는 망우초(忘憂草 · 원추리)를 새겼다
오른쪽 석양
입 주변이 부러져 훼손되어 있다
남연군 묘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길 때
가야사(伽倻寺)를 불사르고 묘를 썼다고 전해진다
남연군 묘
묘 뒷쪽에는 옛 가야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남연군 묘
남연군 묘 계단 돌난간
남연군 묘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상가리 마을
옥양봉 아래 마을로 남연군 묘 뒷쪽 마을이다
남은들 상여
상가저수지가 뒤에 있다
남은들 상여 보호각
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옮긴 후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하사했다고 전하는 궁중식 상여이다
장강(長杠) 위에 구름 차일(遮日)을 친 용봉(龍鳳) 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의 금박이 있고
중앙 부위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동자상이 있으며
휘장은 검정 · 노랑 · 흰색 천으로 되어 근엄하면서도 호화롭다
대원군은 종실 중흥이라는 큰 뜻을 품고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덕산 가야산(伽倻山)으로 옮겼다
시신(屍身)을 넣은 관(棺)을 운반하는데에는 500리 길을 따라
한 지방을 통과할 때마다 그 지역 주민이 동원되어 각 구간을 연결하여 모셔가는 방법을 택하였다
마지막 구간을 담당한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매우 극진히 모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여를 광천리 마을에 주었고
이후로 마을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남은들 상여 / 국가민속유산 제31호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보관중에 있으며
남은들 상여 보호각에 전시된 복제품은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2012년 국가유산청으로부터 국비를 지원 받아
국립고궁박물관 진품 실측과 정밀 실측보고서를 근거로
상여는 국가무형유산 전흥수 대목장이
유소(매듭)는 무형유산 배순화 매듭장이 제작하여 보호각에 전시하고 있다
상가저수지
가야산 · 석문봉이 보인다
남은들 상여보호각에서 봤다
예산 가야사지(10차) 문화유산 발굴조사 펼침막
예산 가야사지 문화재(국가유산) 발굴조사 현황
가야사지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하며 고려시대부터 존속해 있다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장하면서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유적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가야사지(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 · 남연군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예산 가야사지 문화유산 발굴조사 현장
예산 가야사지 문화유산 발굴조사 현장
예산 가야사지 7차 문화유산 발굴조사 안내판
▪ 조사위치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107-27번지 일원
▪ 사업시행자 : 예산군 ▪ 조사기관 : (재)누리고고학연구소
▪ 조사목적
예산군에서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묘와 함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 예산 가야사지의 문화유산으로서의 유존가치를 확인하고
향후 문화재 개발과 보수 및 정비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연차적인 학술 발굴조사를 진행 중에 있음
이번 7차 발굴조사는 2013년 실시한 2차 발굴조사의 남동쪽에 연접하여 위치한 지역으로
조사를 통해 사역 범위 확인 및 향후 복원 · 정비에 대한 자료 확보를 위함
예산 가야사지 7차 문화유산 발굴조사 항공사진
예산 가야사지 문화유산 발굴조사 현장
가야산 노선안내도
*
2024.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