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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이회영기념관 · 기억의 터 · 국치길

이회영기념관 · 기억의 터 · 국치길을 이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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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길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남산 예장자락에 약 1.7㎞에 이르는 역사탐방길로

국치터(한국통감관저 터)에서 서울 위안부기림비(조선신궁 터)까지를 잇는 길이다

 

 

명동역 1번 출구

시점이다

 

 

 

 

기억의 터

명동역~대한적십자사~작은미술관~서울유스호스텔 안내판~기억의 터를 잇는 걷기다

 

 

 

 

기억의 터 글

그 좁은 위안소 방에 눠 있으면 부모 형제 생각이 절로 났제

기약없이 떠나왔으니 울 어매는 나를 얼마나 찾았을거여

그래 내 위안소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자주 불렀제

떠나간 그 배는 어데로 갔소. 이런 가사 안 있나?

여기서 떠나간 배는 다신 안 오는 배다

 

 

 

 

기억의 터 글

내가 산속에 숨었다가 나와가지고 그럼 거기 가면 무슨 일 하느냐? 이렇게 물어보니까

가면은 임시간호원을 한다 이러더라고

그래서 가기는 어디로 가느냐? 물어보니까

일본으로 간다 그러더라고

근데 가고 보니까 일본도 아니고 또 간호원도 아니고 어 그런 전쟁난 그런 중국 상해였어

 

 

 

 

소녀에서 할머니로

대한적십자사로 올라가는 길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관사 터

광복 뒤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6국이 있던 자리이다

 

 

 

 

조망대

 

 

 

 

세종호텔 · 이비스 스타일 앰배서더 서울 명동호텔

퇴계로2가교차로 양편에 있다

 

 

 

 

하나은행  · 국민연금공단 종로 중구지사

 

 

 

 

하나은행 · 중부세무서

 

 

 

 

디어스 명동 · 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

 

 

 

 

이회영기념관

 

 

 

 

이회영기념관(李會榮記念館)

남산 기슭은 우당 이회영(友黨 李會榮) 가문과는 인연과 내력이 깊은 곳이다

경주 이씨 백사공파 으뜸이 되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남산 북쪽에 살았다. 쌍회정(雙檜亭)이다

백사 9대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은 백사가 살던 집을 집터를 수습하여 다시 쌍회정을 수습하였다

이곳에서 우당과 6형제 등 가솔들은 시련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뜻을 도모하였다

 

 

 

 

이회영 형제는 북두칠성 같았고 아들들 딸들은 은하수 같았다

아들들 - 딸들 열아홉 특별전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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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천을 이회영기념관에 길게 드리우는 것으로 전시를 구성하였다

은하수 같은 아들들 딸들을 기리는 뜻이다. 그 불빛을 환하게 밝히는 건 우리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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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2층이다

 

 

 

 

어머니 탄신 95주년 기념 병풍 / 이종찬

지난 한 세기를 고난의 민족사와 함께 살아오신 나의 어머님 조계진 여사의 삶의 모습을 여기에 모아 드립니다

 

 

 

 

우당 이회영(友黨 李會榮)

망명을 떠난 순간부터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제국주의 왜적에게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아나키스트 행동조직을 지속적으로 지도 · 운영해오던 혁명가 이회영

그는 노구를 이끌고 중국인들과 항일공동전선 형성 및 지하조직망 구축을 위해

비밀리에 배(영국배 남창호 밑바닥 4등선실)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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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여귀(視死如歸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

이회영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운명을 이렇게 말했다

아들 규창이 황푸(黃浦)강 와이탄(外灘) 부두에서 전송하면서 본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롄(大連)항에서 다롄수상서(大連水上署) 경찰에 붙잡힌 그는 곧 뤼순(旅順)감옥으로 끌려갔다

소식을 접한 동지들은 이회영을 구출하고자 하였으나 손쓸 겨를이 없었다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이회영은 세상을 떠났다

유품은 솜을 누빈 따파오(大袍) · 모자 · 해진 신발 한 켤레가 전부였다. 예순 다섯이었다

1932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당한 날과 날짜가 같았다

동지들의 연락을 받은 딸 규숙이 이를 서울에 있는 어머니 이은숙에게 전보로 알렸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화장된 유해는 한 줌 재가 되어 1932년 11월 28일 경기도 장단 큰댁으로 돌아왔다

 

 

 

 

이회영 가문 내력

기록된 우리 역사 이천 년 이래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나선 숱한 인물이 있었다

단기필마로는 단연 안중근, 군사조직적 대응은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집안으로는 이회영과 6형제를 서슴없이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신분 · 재산 · 목숨 · 자식 · 우정 · 눈물 · 재능 · 배고픔마저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거룩한 인간상을 유산으로 남겼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 · 건석철회시호 ·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 떼어서 읽을 수 없는 6형제 이름

건석철회시호 · 인물을 섬기는 것은 그를 따르기 위함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백사 이항복 이래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열 명이 넘는 정승과 판서를 냈다

정승은 실력과 인품을 두루 갖춰야만 이를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이 집안의 전통과 내력을 이어내는 일은 세습되는 왕족과는 다른 사회적 책무를 안팎으로 거듭 수행해내야만 가능했다

무엇보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들의 행동은 남달랐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가문을 일러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렀다

삼한이란 우리 땅을 이르는 말이고 갑족이란 으뜸집안이라는 뜻이다

이회영 형제는 서울 명례방(명동) · 장단과 개성 · 양주 일대 · 진위(평택) 등지에 넓은 땅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왕실에서 받은 땅이 많았다

나라가 일제 수중에 떨어지자 이들은 전 재산을 서둘러 정리해서 서간도로 떠나는 일을 결행했다

총칼로 빼앗긴 나라를 총칼로 되찾고자 무장투쟁의 길로 나섰던 것이다

모든 집안 사람들이 이와 같이 목숨과 재산을 송두리째 바쳐 나라를 구하는 투쟁에 나선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꽃다발을 목에 건 김구 주석 · 안미생(안중근 의사 딸로 김구 며느리) · 중절모를 쓰고 눈물을 닦고 있는 이시영 · 가운데 소년이 이종찬(10세)

6형제 중 다섯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이시영만 홀로 광복을 맞아 환국하였다

이시영은 김구와 동행하여 돌아오던 상하이 공항에서 여섯 명 몫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1945년 11월 5일

 

 

 

 

대한적십자사

오른쪽 남산예장버스주차장 건물이 이회영기념관이다

 

 

 

 

남산서울타워

 

 

 

 

느티나무 · 은행나무 보호수

 

 

 

 

은행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1.3m · 둘레 594cm · 나이 400년 · 지정일자 1996. 8. 16

 

 

 

 

느티나무 보호수

나무 높이 23m · 둘레 637cm · 나이 450년 · 지정일자 1996. 8. 16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빗돌

 

 

 

 

 

국치 터 / 거꾸로 세운 동상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1860~1939 일본공사로 부임)는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하여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을 강요하는 등 병탄의 발판을 닦은 자다

일제는 그 공으로 남작 작위를 내리고 대한제국이 국치를 당한 이곳 한국통감관저에 동상을 세웠다

동상 이름은 남작 하야시 곤그케상(男爵林權助君像)이다

광복70주년을 맞아 흩어진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워 욕스러움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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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광복70주년을 맞아 이곳에 「거꾸로 세운 동상」을 세웠고, 이듬해 「기억의 터」를 조성하였다

 

 

 

 

국치 터 / 한국통감관저 터 빗돌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국치 뒤 이곳은 조선총독관저가 되었다

 

 

 

 

기억의 터를 만든 사람들 빗돌 / 총 기부자 수 19,755

 

 

 

 

세상의 배꼽

 

 

 

 

옛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제1별관 터

통신과 도청 · 감청을 수행하는 건물이 있던 자리로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다

 

 

 

 

서울종합방재센터

 

 

 

 

서울유스호스텔

 

 

 

 

세계인권선언문

이곳은 우리 민족의 인권을 말살하던 일제의 통감관저 터 인근 부지로, 근 ·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전문의 원 안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같이 화합하며 만들어 가는 지구촌 사람들을 표현하고

평화와 화해의 의미를 담아 인종과 인종 · 나라와 나라 · 개인과 개인을

친근감 있는 긴 띠의 형태로 연결하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인권의 존엄함을 담았다

 

 

 

 

세계인권선언문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국치길 바닥안내판

국치의 「ㄱ」을 의미하는 한글 자음 「ㄱ」 모양으로 된 바닥 표식이다

 

 

 

 

이회영기념관

늦은 점심을 하려고 서두르는 바람에 옛 중앙정보부장공관을 빠트렸다

 

 

 

 

서울시 가족센터

 

 

 

 

한양교회

 

 

 

 

대한적십자사

 

 

 

 

서울예대 동랑센터 드라마센터

 

 

 

 

명지빌딩

예전 명지초등학교 자리다

 

 

 

 

국치길 안내판

 

 

 

 

숭의학원(옛 경성신사 터)

19세기 말부터 일제 종교시설인 신사는 남산 북쪽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 건립(1925년) 이전까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제의를 지내는 최고 신사 시설이었다

광복 뒤 이곳에 잠시 단군성조 묘를 설치했다가 숭의학원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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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갑오역기념비 터

「갑오역」은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일본군 전사자 일부의 유골을 남산 북쪽 언덕에 비밀리에 묻고 추모 기념비를 세웠다

 

 

 

 

남산 돈까스거리

1976 원조 남산 왕 돈까스 · 1977 원조 남산 왕 돈까스 · 101번지 남산돈까스 등이 줄지어 있다

 

 

 

 

남산케이블카

 

 

 

 

한양공원(漢陽公園) 빗돌

1885년부터 일본인들의 도성 내 거류가 정식으로 허용되고 충무로 일대가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이 되었다

1908년 서울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남산 기슭 30만 평을 무상으로 임대받아 2년여 간의 공사 끝에 1910년 5월 29일 공원을 개원하였다

고종은 칙사를 보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양공원비는 공원의 입구를 알렸던 비석으로 앞면의 漢陽公園(한양공원)은 고종의 친필로 전한다

166cm의 높이로 공원의 입구 쪽인 남산3호터널 입구에 세워졌다가 터널공사 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앞에는 비석 보호용으로 보이는 사각 돌기둥 3개가 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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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 비석은 2002년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철조망 안쪽 풀숲에서 발견되었는데

비석 뒷면은 정으로 쪼아놓은 듯, 인위적으로 훼손이 되어 정확한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에서 바라본 조선의 풍경과 당시 생활상을 담은 사진집인 「은뢰」(1937)에

비석 뒷면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내용이 대부분 해독되었다

이 비석은 명치(明治 메이지) 45년인 1912년 조성되었으며 전체 내용은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로 전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품고 있는 한양공원비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이다

 

 

 

 

남산 제2시범아파트

 

 

 

 

남산돈가스

지날 때면 들리던 곳인데 예전 맛이 아니었다

 

 

 

 

남산돈가스 메뉴

 

 

 

서울 회현동 일신교회(예전 쌍회정(雙檜亭) 터)

조선시대 이항복의 집이었다

 

 

 

 

남대문시장

노점들이 전부 사라졌다

 

 

 

 

화폐박물관

우리나라 초기 근대 건축물로서 대한민국 금융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유서 깊은 건물이다

1907년 일본 제일은행이 사용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으나 1909년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으로

(구)한국은행이 설립되어 준공 이후에는 (구)한국은행 건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구)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개칭되고, 1912년 건물이 완공된 뒤에는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이용되었다

2001년 한국은행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화폐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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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국은행이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중앙은행 / 중앙은행은 화폐의 변천과정에서 탄생

2천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금이나 은으로 만든 금속화폐가 사용되었는데, 금속화폐는 가지고 다니기에 불편하였다

이에 따라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이탈리아에서는 무역업을 하는 상인들이

나중에 금속화폐로 지급해 줄 것을 약속하는 어음을 발행하여 금속화폐 대신에 사용하였다

17세기 들어 영국 사람들은 금 세공업자에게 금속화폐를 맡기고 이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예탁증서를 받아 돈 대신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상인이나 금 세공업자들은 본래의 업무보다 어음과 예탁증서를 많이 취급하게 되면서 은행을 세워 경영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이들이 발행한 어음과 예탁증서가 점차 지폐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상업은행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발행 지폐에 상응하는 금 · 은 등의 보유율을 낮게 유지하였고

이들 은행 중 일부는 파산하면서 경제 전반에 큰 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은행의 자격을 제한할 필요가 생겼으며

그 결과 왕이나 정부에 대출을 하고 세금을 관리해 주며 지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할 수 있는 특별히 허가된 상업은행이 설립되었다

19세기 들어 정부의 은행으로 설립된 초기 중앙은행은 상업은행의 기능을 줄이는 대신

다른 은행으로부터 여유자금을 예탁 받고 지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토대로

다른 은행들에게 부족자금을 대출해 주는 은행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현대적 의미에서의 중앙은행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화폐의 일생

 

 

 

 

우리나라의 고대화폐

물물교환시대

구석기시대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한 한민족은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농경법을 익히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물품을 서로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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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화폐의 등장

물물교환이 점차 늘어나자 사람들은 누구나 원하면서도 합치거나 나누기 쉽고

운반이 편리하며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물품을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화폐의 시초인 물품화폐이며 대표적으로 조개껍질 · 곡물 · 농기구 · 소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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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의 화폐

기원전 957년, 고조선에서 자모전(字母錢)이라는 철전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삼한시대에는 철기문화가 발달하면서 철이 화폐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마한에서 동전이 주조되고(기원전 109년) 동옥저에서 금은무문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뒷받침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에는 금속으로 제작된 주화보다 쌀과 조 · 비단과 삼베 같은 물품화폐가 더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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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화폐광장이다

 

 

 

 

조개화폐

 

 

 

 

고려시대의 화폐 / 918 

대외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여러 종류의 금속화폐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996년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화폐인 건원중보가 발행되었고

우리나라 지형을 본떠 만든 은병과 은 덩어리를 쪼개어 사용하는 쇄은 등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화폐들은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곡물 및 옷감 등의 물품을 화폐 대신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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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화폐 / 1392

조선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각종 제도를 정비하면서 그 일환으로 화폐를 발행하여 유통체제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건국 초기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인 저화와 주화인 조선통보 · 십전통보 등이 발행되었으라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화폐의 유통은 숙종 4년(1678) 발행된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사용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상평통보는 조선의 대표적인 화폐로서 200여 년간 널리 사용되었다

 

 

 

 

제1차 통화조치 환 표시 은행권 발행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오르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짐에 따라 물가안정이 중요해졌다

이에 정부는 1953년 2월 15일 통화조치를 단행하여 그때까지 사용하던 모든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화폐의 단위를 1/100로 변경한 (圜)(한글로는 원으로 인쇄되어 있음) 표시 한국은행권 5종을 발행하였다

이 은행권은 통화조치에 대비해 광복 직후 미국 재무부 인쇄국에서 만들어 금고에 보관해오던 것이었다

 

 

 

 

한국의 국립공원

 

 

 

 

부조전(浮彫錢) · 투조전(透彫錢)

 

 

 

 

돈의 어원

돈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 화폐의 순환에서 유래되었다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며 천하를 돌고 돈다는 데서 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로 민간 어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한자 刀(도)에서 유래되었다

고대에 사용되었던 칼 모양의 화폐를 일컫는 「도화(刀貨)」의 刀(도)에서 유래되어

도와 돈이 혼용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돈으로 고착되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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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어 화폐박물관은 다 보지 못했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로...

 

 

 

 

3 · 1독립운동기념비

3 · 1독립만세 시위대가 일제 헌병경찰과 격돌하여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낸곳이다

 

 

 

 

명동

 

 

 

 

시청역

마침점이다

 

 

 

 

걸은거리 4.3km · 소요시간 4시간  4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