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길이야기

백남준기념관

백남준기념관

현대 예술가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의 삶과 예술을 기억하는 집이다

193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1950년에 한국을 떠나 일본 · 독일 ·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그는 글로벌 유목민으로서 세계 각지를 누비며 살았지만,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자신의 예술적 모태이자 사상적 기원으로 여겼다

*

서울시는 2015년 창신 · 숭인 도시재생 선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백남준이 1937년부터 1950년까지의 성장기를 보낸 창신동 197번지 일대 집터에 위치한 한옥을 매입했고, 이를 백남준기념관으로 조성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조성과 운영을 맡아 기념관 건물의 리모델링과 콘텐츠 기획을 진행했으며

2016년 7월에 백남준기념관 조성사업의 출발을 알리는 발대식을 갖고, 2017년 3월에 개관했다

 

 

백남준기념관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이다

백남준이 1937년부터 1950년까지의 성장기를 보낸 창신동 197번지 일대 집터에 위치한 한옥으로

1960년에 축조된 총 면적 93.9㎡(약 28평)의 단층 한옥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해체하고, 노화된 부분을 교체 후 재조립하는 공정으로 리모델링됐다

전시공간 외에도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는 「백남준 카페」가 마련되어 관람객의 휴식과 도서 열람이 가능하다

 

 

 

 

문 - 문 - 문 / 9채널 영상

백남준기념관의 철제 대문을 중심으로 앞뒤에 빛의 문과 영상의 문을 설치하여 3중의 문을 연출했다

빛의 문은 조명박스로, 사각의 문은 사각의 아치 모양으로 부착된 9개의 모니터로 제작됐다

영상의 문에는 5대양 6대주를 연결한 세계 최초의 위성예술축제였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의 장면과

34년만에 귀국하여 창신동을 찾아오는 백남준의 모습, 그리고 오늘의 동대문 · 창신동 · 숭인동 풍경이 등장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통과하듯 시공간을 넘나든 백남준의 예술세계와 50대에 어린시절 집터를 되짚어 왔던 백남준의 기억여행

그리고 백남준의 세계에 들어서는 우리의 여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백남준기념관

서울시립미술관이 조성과 운영을 맡아 기념관 건물의 리모델링과 콘텐츠 기획을 진행했다

 

 

 

 

백남준기념관 마당

 

 

 

 

수 - 월 · 水 - 月 · Water - Moon / 김상돈 2017

대야에 담긴 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마루 천장에 물 그림자가 맺히는 현상을 관찰했던 백남준의 어린시절 추억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어린 백남준이 품었던 무한한 호기심과 창 안에 경의를 바치는 〈 수 - 월 · 水 - 月〉은

놋대야 아래 거울 · 유리 조명을 설치하여 과학과 예술 · 공학의 영원한 빛과 상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

남준이네 집 대청마루는 무척 넓었다

햇볕이 따사로운 봄날, 남준이와 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대청마루 천장에서 하얀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놋대야에 담긴 물이 햇살에 반사되어 그렇게 요사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 / 이경희

 

 

 

 

TV경(鏡) - 자화상(自畵像)

백남준은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백남준의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을 그린 초상이 아니라, 남을 돌아보며 남을 비추는 장치다

1989년 작 〈자화상〉은 빈 TV 수상기 상자 안에 TV 모형 선글라스를 싀운 인간의 마스크와 불상 · 지구본 · 피아노 · 미니어처 · 꽃 등이 들어 있다

이는 구체적인 백남준의 생애 자화상이자 현대 문화의 초상이다

백남준기념관에는 기존의 속을 비워내고 다른 것들로 채워진 TV 수상기가 벽을 관통하도록 설치되어

전시실과 카페 사이를 변형시켜 볼 수 있는 통로 역활을 한다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근이다 / 백남준

백남준기념관은 한국전쟁 중 백남준의 옛 집터에 있던 오래된 가옥 중 하나에 새롭게 조성됐다

원본의 발굴 대신 가본의 재구성에서 출발한 백남준기념관은 이러한 태생적 역설에 착안하여

완성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백남준을 만들어가는 「기억의 집」이 되고자 한다

*

백남준은 과거 · 현재 · 미래가 뫼비우스 띠처럼 순환하고

예술과 삶 · 역사가 우연과 필연의 조화 가운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해간다고 믿었다

 

 

 

 

백남준 이야기 /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백남준의 생각들을 공유함으로써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 더욱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획된 스토리텔링 시리즈다

백남준 연구자를 비롯해 작가의 가족 · 친구 · 동료 예술가 등의 다양한 참가자가 구성해 나가는 서사를 선보인다

*

1984년 백남준의 한국 방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의 예술 세계와 어린 시절 무의식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백남준의 읽었던 책 · 들었던 음악 · 학창시절의 흔적 · 그가 남긴 드로잉과 메모 · 지인의 회고 등을 토대로 그의 예술세계의 원천을 탐구한다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최초의 위성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충격을 기억하는 이들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예술을 이야기했다

암울한 시대를 개탄하던 지식인들은 백남준에게서 새로운 꿈과 해방의 언어를 발견했다

백남준은 이렇게 우리가 꿈꾸는, 그러나 낯선 이데아와 세계성의 상징이었다

 

 

 

 

김용옥과의 인터뷰 사진

새로움의 상징이었던 백남준의 입에서 나온 말은 34년 전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그는 헤어진 유치원 친구가 보고 싶다고 했고, 어릴 적 보았던 심청가와 춘향전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큰 대문 집

창신동 197번지에 있던 백남준의 집은 작가 본인에 의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백남준은 특유의 어린 말투로 그가 살던 「큰 대문 문」이 옛날 외무대신이 쓰던 집이었는데 6 · 25 때 폭격을 맞아 쪼가리만 남았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유가족과 친지 · 지인의 기록에 흩어져 있는 백남준의 집에 대한 단상을 엮어본 이야기들이 있다

 

 

 

 

큰 대문 집

백남준은 1996년에 뇌졸증으로 쓰러졌다가 병상에서 일어난 후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에게 각별한 작품을 선물했다

자신에게 의미있는 사진에 글귀를 덧붙인 일흔 세 장의 드로잉이었는데

그 사진들 가운데 큰 대문 집 앞을 지나는 할아버지의 꽃상여 사진이 있다

 

 

 

 

도시의 소리, 음악이 되다

창신동 근처는 지금처럼 항상 시끌벅적했다

백남준은 창신동 · 동대문 · 명동 · 화동 · 정동 일대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도심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사업가이자 상인이었던 부친의 영등포 공장에는 천여 대의 방적기가 굉음을 내며 돌아갔고

창신동 집 안에서는 옷짓는 어머니의 재봉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백남준은 특히 유치원 통학 길에 타고 다니던 전차의 차창 밖 소리 풍경을 좋아했다

이미지와 소리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은 꼬마 백남준에게 시각과 청각이 통합된 공감각의 세계를 열어줬다

그래서 백남준은 일찍부터 코끼리 몸체에서 예쁜 소리를 내는 피아노에 빠졌다

그러나 부친은 백남준의 음악적 감수성을 마땅찮게 여겼고, 백남준은 피아노가 치고 싶을 때는 집 뒤의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 몰래 피아노를 쳤다

 

 

 

 

총체 피아노 / 백남준

1958년 8월, 다름슈타트에서 백남준은 현대음악의 이단아 존 케이지를 만나게 된다

전위작곡가 존 케이지는 불확실성의 음악 · 우연성의 음악을 주장하며 환경의 소음도 침묵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를 스승으로 여겼고, 음악을 해체하는 퍼포먼스와 소음의 콜라주로 케이지에 경의를 표했다

현 사이에 나사못 · 종잇조각 등을 끼워서 소리를 변형한 존 케이지의 〈장치된 피아노〉(1946)에서 나아가

백남준은 〈총체 피아노〉(1958)에서 헤어드라이어 · 라디오 등 사물의 소리로 음악을 연주했다

백남준은 〈걸음을 위한 선〉(1963)은 노면에 바이올린을 끌고 갈 때 발생하는 소리로 음악을 연주하는 「액션 뮤직」이다

그의 액션 뮤직은 음계와 화성 조합을 기초로 한 서양 고전음악을 해체하는 상징적 제스처일 뿐 아니라

소리와 행위 · 음악의 구분을 넘어서는 새로운 예술의 시작이었다

 

 

 

 

원족 遠足

백남준의 학창 시절 기억에는 유독 원족(遠足)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원족은 걸어서 먼 곳을 간다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소풍 · 장거리 도보여행을 의미했다

꽃피는 4월 무렵이면 초 · 중 · 고등학교가 일제히 원족을 갔고, 풍광 좋은 서울 각지는 학생들로 붐볐다

*

백남준은 원족의 추억을 떠올리며 오랜 세월 사람이 사람과 연을 맺기 위해 만들어 온 교통 · 통신 매체의 의미와 새로운 매체의 창안에 대해 생각했다

백남준의 매체 실험은 더 빠르고 현란한 매체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인연을 만들고 서로 공생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사람과 이야기를 싣고 달리며 사람들을 엮어주던 원족의 추억은 백남준의 최첨단 예술의 본질과 통했던 것이다

 

 

 

 

나, 너, 땅 그리고 하늘

1986년 백남준은 당시 신축공사 중이던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 영구 설치될 신작의 구상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규모로 신축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진입부에서 모든 관객과 만나게 될 중요한 작품이었다

처음의 백남준은 러시아의 예술가 블라디미르 타블린(1885~1953)이 구상했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와 같은 나선형 탑 형태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작품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수정이 불가피했고

나선형 대신에 모니터가 동심원의 형태로 퍼져나가는 지금의 「다다익선」이 탄생하게 됐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

물과 달이 대상을 비추는 역할을 한 것처럼 스테인드글라스 또한 바깥의 풍경을 상영하는 TV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스테인드글라스는 대상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색이 칠해진 유리를 통해 새로운 풍경으로 바꾸어 보여준다

스테인드글라스에 펼쳐지는 풍경은 편집을 거친 화면인 셈이다

독일의 작은 성당의 회색빛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드는 새로운 풍경처럼 백남준은 TV를 조작하여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화면을 제시했다

 

 

 

 

책과 영화의 기억

학창 시절 백남준은 고전과 인문학에 빠져들었다

경기중학에 다니면서 여러 자극을 받아 내 예술과 인생에 큰 이익을 봤어요

졸업은 못 했지만(옛 경기고가 있던) 화동 시절이 늘 그립습니다

경기고가 이제는 관리 양성기관을 그만 두고 한국사회의 진보적 세력으로 커가길 간곡히 바랍니다

내가 곧 서울에 나가니 죽기 전에 대폿잔이나 기울입시다

경기고 백주년 기념 영상 메시지 / 백남준

*

백남준이 즐겨본 영화 · 백남준이 읽은 책 등이 있다

 

 

 

 

김순남과 쇤베르크

백남준은 자신이 청년시절에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곡을 통해 현대음악에 입문했으며, 그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는 동경대 졸업논문으로 「아르놀트 쇤베르크」(1956)를 썼을 정도로 쇤베르크에 정통했다

그러나 백남준이 쇤베르크 이전에 김순남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백남준은 당시 이건우 · 신재덕에게 음악을 배우고, 그들의 동료 음악가인 김순남의 음악에 빠져 있었다

백남준은 그 음악가들이 당시에 이미 쇤베르크의 음악을 들었으며, 자신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백남준은 훗날 쉰이 넘어서도 김순남의 곡을 연주하며 그의 천재성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숨쉬는 것, 호홉하는 것은 리듬이다

음악은 리듬이다

숨을 쉬는 한 음악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순남

 

 

 

 

애꾸 무당

큰 대문 집에서는 음력 시월상달이면 매년 재수굿을 했다

북풍이 불기 시작하는 으스스한 초저녁부터 새벽 하늘이 훤해질 때까지 애꾸 무당의 주술에 맞춰

백씨 댁 온 집안 여인들은 한 해 동안 탈없이 돈 많이 들어오게 해달라며 두 손바닥을 맞대고 비벼댔다

어린 백남준은 이 어리숙한 여인네들의 신(神)놀이를 보며

"빨리 인민혁명이 나서 백씨 집이 망하면 좋다고, 그러나 정말 망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돼서, 열심히 무당의 손짓만 주시하게 된다"라고

백남준은 김홍희의 책 서문에 썼다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 / 이경희

 

 

 

 

예술의 혁명

백남준에게 마르크스는 당시 한국의 시대적 갈증이 투영된 대상이었다

그는 1930년대 열혈 청년들이 그러하듯 「자본론」을 읽고 심취했지만 본격적인 혁명의 대오에 나서진 못했다

백남준은 정치혁명에는 나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1991년에 쓴 에세이 「59세의 사유」에서는 청소년기에 본인이 쇤베르크와 마르크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기술했다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기계문명 시대의 역사 인식과 유토피아 건설의 과학적 논리로 배운 것으로 보인다

 

 

 

 

카메라와 모니터

 

 

 

 

테크노 부처

백남준의 세계는 선 불교 철학 · 노자 · 장자 샤머니즘 등 동양적 고전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대기계문명을 인간화했다고 일컬어지는 그의 업적은 통신과학기술을 부정하기보다 그것에서 감하고 통하는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테크노 부처는 백남준의 역작으로 손꼽히는 TV 부처에 경의를 표한 작품이다

 

 

 

 

백남준 이야기 · 백남준 버츄얼뮤지엄

 

 

 

 

백남준 버츄얼뮤지엄

백남준의 무한대 ∞ 시공간을 구현한 가상박물관이자 기념관의 활동자료에 대한 지속가능한 아카이브 기능을 수행하는 데이터뱅크다

6개의 멀티스크린패널과 백남준의 대표적 오브제인 아날로그 TV의 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백남준에 대한 기본 정보와 관련 자료를 탐색할 수 있다

 

 

 

 

백남준의 방

백남준의 세계가 그의 유년 시절 · 지역성 · 아시아 문화의 전통과 맺고 있는 관계를 탐구하고자 별도로 편성된 복합설치 공간이다

백남준과 관련된 독특한 오브제들로 채워진 방에서 펼쳐지는 백남준의 말과 글은 현재 우리를 그의 시간에 더욱 가까이 데려갈 것이다

 

 

 

 

뉴욕 소호의 백남준 작업실 · 백남준의 책상

백남준은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그의 부음에 평소 백남준을 잘 알던 지인들이 왕생(往生) · 즉 "삶으로 돌아갔다"는 조사를 바친 이유다

〈백남준의 책상〉은 백남준의 〈태내기 자서전〉과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의 회고록 일부를 미디어 극장처럼 연출한 설치물이다

독서와 글쓰기 · 추억여행은 백남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활동이었다

 

 

 

 

백남준의 아카이브

2006년 타계한 백남준의 작업실에는 평소 그가 모았던 사슴뿔 · 장난감 · 구제 기계 · 불상 등 많은 유품을 남겼다

그것들은 〈백남준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 되었다

작가의 상상과 영감이 묻어나는 아카이브를 실제로 만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백남준기념관은 스미소니언박물관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며 그의 유품과 유사한 물건을 구제시장에서 수집하고

모친의 재봉틀과 고장난 TV 등 백남준의 생애에 주요한 기억 소품을 추가로 제작하여 〈백남준아카이브〉를 구성했다

 

 

 

 

백남준의 책상

종이로 된 공책 한 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라디오와 TV · 프로젝터가 작동한다

*

구제 책상 · 구제 라디오 · 구제 TV · 미니 프로젝터 · 카메라 · PC · 소프트웨어 · 종이책자 · 필통 · 연필 등이 있다

 

 

 

 

어머니와 함께한 사진 액자

 

 

 

 

구제 TV

 

 

 

 

구제 라디오

 

 

 

 

백남준의 움직이는 이야기

Chapter. 1 자궁 안이 너무 무서워요

백남준의 태내기자서전과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의 회고록 일부를 미디어극장처럼 연출한 설치물이다

종이 공책을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라디오와 TV · 프로젝터가 작동한다

 

 

 

 

오늘은 백남준 태어나기 마이너스 110일째

백남준은 자궁 속에서 어둡고, 축축하고, 어둡다고 느꼈다

 

 

 

 

백남준은 아직 마이너스 108일째

내가 물었다. 한국이 뭔가요?

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건 너의 아버지가 될거야

내가 물었다. 왜요?

엄마가 말했다. 이유는 없어

백남준, 큰 나라인가요?

엄마는 말했다. 아니

엄마 : 아니 후진국이란다

백남준 : 난 태어나지 않을래요

엄마가 말했다

그렇지만 약한 것이 좋은 것일 수도 있어

우리는 1946년에 피난을 갈거야

 

 

 

 

백남준 마이너스 101일째

엄마에게 말했다. 자궁 안이 너무 어두워요

엄마의 우유는 달콤하고 시큼해요

아빠는 어디 있나요?

그는 운이 좋은 남자야. 그렇지만 아주 조용한 사람이지

아빠는 너에게 말도 거의 안할거야

또한 몇 명의 첩도 거느릴거야

(난 백남준과 자고 싶어)

백남준

아니요, 난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세상의 괴로움을 원하지 않아요

나는 그냥 작은 태아가 되게 해 주세요

제가 천국으로 바로 갈 수 있게 절 낙태해 줄 수 있나요?

 

 

 

 

오늘 백남준은 유럽에서 낮 시간에 태어났다

백남준은 서울에서 밤시간에 태어났다

 

 

 

 

왕생 · ·  · 

우리의 천재 예술가 백남준은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유치원 친구, 이경희(李京姬)

 

 

 

 

모친의 재봉틀

백남준기념관은 스미소니언박물관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며 그의 유품과 유사한 물건을 구제시장에서 수집했다

 

 

 

 

백남준의 큰 대문 집 그림 / 설송(雪松) 고혜란(高蕙蘭)

 

 

 

 

옛 백남준 집터(약 10,000㎡)

'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로구 창신동  (0) 2023.12.09
삼각산 안양암  (0) 2023.12.09
구로올레길 산림형  (0) 2023.12.03
푸른수목원  (0) 2023.12.03
류순정 · 류홍 부자 묘역  (0)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