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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국영화박물관 한국영화사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한국영화박물관은 2008년에 개관해 2015년 국립박물관으로 등록되었다

영화 매체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100년이 넘는 한국영화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

한국영화박물관은 상설전시와 기획전시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상설전시는 한국영화사를 세부 주제별로 14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기획전시는 한국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주제로 개최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박물관이 1층에 있다

 

 

 

 

한국영화박물관 안내소

입장료 무료 · 지하에선 영화도 상영한다

 

 

 

 

영화의 탄생

흔히 영화의 탄생일은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라는 기계를 통해

파리 그랑 카페에서 대중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영화를 상영한 날로 기록된다

그러나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전에도 움직이는 영상의 촬영과 상영기계는 발명이 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은 1893년 키네토스코프(kinetogrape)를 발명했다

에디슨의 발명이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보다 빠름에도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의 발명가로 인식되는 것은

이들이 대중 공개와 보급에서 선구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세계의 영화 상영에 관한 내용

1893년 미국 뉴욕 · 키네토스코프 / 1894년 영국 런던 일본 고베 · 키네토스코프 / 1895년 독일 베르린 바이오스코프

1896년 영국 런던 씨어트로그래프 / 1897년 일본 오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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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 1895년 프랑스 루미에르 감독

모니터에서 상영되는 영화다

 

 

 

 

신기한 경험의 시작 · 활동사진 조선에 오다

황실어람(皇室御覽)이라 일컬어졌던 황실 영화관람의 시작은 미국여행가 버튼 홈즈로부터 비롯된다

1901년 한국을 방문한 버튼 홈즈가 서울의 여러 모습을 촬영했고 고종에게 활동사진을 보여준 것이다

버튼 홈즈는 1900년 개통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서부터 극동지역을 여행하는 아시아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제물포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대문에 도착했는데, 영상물 초반 서대문을 통과하는 전차 위에서 주변 풍경을 담은 부분은 인상적이다

버튼 홈즈는 한국의 각종 민족지적 풍경뿐만 아니라 이동하는 전차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한국사람들의 모습 등을 담아낸다

한편 할동사진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시초는 1903년 무렵으로 보인다

이 시기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과 협률사(원각사)에서 활동사진이 공개 상영되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버튼 홈즈의 여행동선

 

 

 

 

한국영화 100년의 시간 / 세계영화사 · 한국영화

한국영화의 탄생 시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연표를 통해 한국영화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다

 

 

 

 

남매가 김치를 놓고 국밥을 먹는 동영상이다

 

 

 

 

근대, 식민, 조선영화

1900년대 초에서 1919년까지 조선영화는 등장하지 않았고, 서구와 미국의 영화들이 수입되어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1919년 최초의 한국영화라 일컬어지는 〈의리적 구토〉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본격적인 영화가 아니라 연극에 삽입되는 연쇄극(키노드라마) 형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첫 극영화는 〈월하의 맹서〉(조선총독부 제작 1923)라는 주장과 〈국경〉(송죽키네마주식회사 제작 1923)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자본에 조선인 스태프만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24년 〈장화홍련전〉(김영환)이다

1926년 〈아리랑〉(나운규)의 성공 이후 식민지 조선의 무성영화 전성기가 시작된다

1935년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등장했다

무성영화에 비해 대규모 자본과 설비 · 기술을 요구하는 발성영화는 영화기업의 등장과 영화인의 세대교체를 낳았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지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위해 재편되었고 조선영화는 군국주의 이념의 선전도구로 동원된다

1940년 조선영화령이 공포되면서 영화인 등록제와 생필름 배급제가 시행되었고

1942년에 기존 영화사들은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통폐합되었다. 이로써 조선영화는 완전한 국가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초기 한국영화 시나리오 · 촬영용 카메라

 

 

 

 

풍년가 상영 초대권 / 1942 · 조선영화주식회사 봉투

 

 

 

 

「청춘의 십자로」 광고 전단 / 안종화 · 1934

 

 

 

 

단성사 프로그램

나운규의 유작 「오몽녀」의 광고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시대」 8월 특별호(제5권 제7호)

발행인 김현수 소화(昭和) 10년(1935) 8월 1일 발행

 

 

 

 

「황무지」 친필 시나리오

영화화되지 못한 나운규의 유작 / 감독, 각본 이규설 · 출연 복혜숙, 이규설, 나운규

 

 

 

 

「방아타령」 이구영 친필 시나리오 / 1931

 

 

 

 

나운규 사진첩

 

 

 

 

청춘의 십자로 / 안종화 1934

1930년부터 1960년까지 총 12편의 영화를 연출한 안종화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자 유일한 유품으로

2007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굴하여 2008년에 공개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현재 남아 있는 영화중에 가장 오래된 작품이고 · 둘째, 무성영화시대의 한국영화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질산염 오리지널 필름이며

셋째,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이름만 전해지는 〈아리랑〉(나운규 1926)의 여주인공 신일선과

〈낙화유수〉(이구영 1926)의 이원용 · 〈잘 있거라〉(나운규 1927)의 김연실 등 무성영화 초기의 이름난 배우들의 연기를 볼 수 있으며

넷째, 서울역 주변 · 플랫폼 · 급유소와 서양패션 · 골프를 치는 한량들 등 1930년대의 서울풍경과 문명을 엿볼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안종화 감독이 「한국영화측면비사」(춘추각 1962)에 남긴 내용을 바탕으로

오늘날 일반 대중들에게 당시 변사 역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연 작품을 제작하여 공개하기도 했다

 

 

 

 

나운규와 〈아리랑〉

〈아리랑〉(1926)으로 조선 무성영화의 황금기를 열었고, 이 시대를 주도한 인물은 감독이자 배우였던 나운규(1902~1937)였다

〈아리랑〉과 〈풍운아〉로 큰 성공을 거둔 나운규는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잘 있거라〉(1927)를 비롯한 다섯 작품을 만들었다

무성영화시대에 나운규는 최고의 감독이자 스타였고 나운규프로덕션에는 당대 최고의 영화인들이 모여들었다

나운규가 감독하고 주연한 〈아리랑〉은 민족영화의 기원이자 조선영화의 미학을 확립한 영화로 평가되고 있는 한국영화사의 전설이다

이 영화는 조선 민중들의 민족주의를 집단적으로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컷 백 · 심리적 몽타주의 활용

적합한 캐릭터와 연기 등 예술적인 측면에서 한국 무성영화를 한 단계 높여 놓았다

요컨대 예술적 완성도와 흥행 · 사회적 영향력 모두에서 〈아리랑〉은 한국영화 최초의 빅 힛트작인 것이다

〈아리랑〉의 흥행을 기점으로 1930년대 초까지 조선 무성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해방과 전쟁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자 좌우 양 진영의 영화인 단체들이 앞 다퉈 결성되면서 영화판을 새로 짜고 민족영화를 재건하려는 욕망이 분출하였다

일제 말기 전시체제를 거치며 영화제작 시스템은 무너져 있었고 기자재는 낙후했으며 필름도 귀해 영화제작 여건은 최악이었다

많은 영화가 16미리 필름으로 제작되었고, 심지어 무성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 ·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등 뚜렸한 성취를 남긴 영화가 공개되었다

해방 후 재정비를 위해 노력하던 한국영화계는 1950년 전쟁의 발발로 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많은 영화인들이 국방부나 공보처 · 미공보원 소속으로 전선에 파견되거나 부산 · 대구 · 진해 등 피난지에 흩어져 주로 기록영화를 찍었다

그러나 이 전란의 와중에서도 신상옥 〈악야〉(1952) · 정창화 〈최후의 유혹〉(1953) 등의 감독들은 극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지원병 / 안석영 1941

일제 식민지와 6 · 25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당시 영화제작 환경과 시스템을 극복하고

한국영화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활동과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6 · 25전쟁 당시 김학성 촬영감독이 사용했던 노출계 · Elmo 8-S 카메라 · 코닥 레티나 카메라

6 · 25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의 촬영기사로 활동하다가 부상당한 김학성의 스틸카메라가 있다

코닥 레티나 카메라는 전면 오른쪽에 총탄이 뚫고 들어간 흔적이 있다

 

 

 

 

매혹과 혼돈

전후 정부의 한국영화 면세조치와 〈춘향전〉(이규환 1955)의 흥행 성공과 함께 영화는 급속히 인기를 끌게 된다

1954년 18편에 불과했던 제작편수는 1959년이 되면 100편을 넘어선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빈곤 · 이산 · 전통 질서와 와해와 그로인한 무질서 ·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화

미국 소비문화의 급속한 이식과 전파 등이 진행되는 전후 한국사회는 혼란기였다

이러한 혼란과 근대(미국 소비문화)에 대한 매혹은 당대 한국영화 속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그 중 북한 간첩을 소재로 한국형 스릴러를 모색했던 〈운명의 손〉(한형모 1954) · 한국사회의 왜곡된 체제와 이념으로 고뇌하는 〈피아골〉(이강천 1955)

전통과 모던이 혼재한 전후 한국의 생활상을 탁월하게 묘사하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자유부인〉(한형모 1956)

그리고 농촌의 현실을 뼈저리게 묘파한 〈돈〉(김소동 1958) 등의 작품은 이 시기를 적실하게 그려낸 걸작으로 평가된다

한편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은 최초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기도 했다

 

 

 

 

프랑스 데브리(Debrie)사의 파르보(Parvo) 35mm 카메라

1950년대 작품 시나리오와 수도영화사에서 사용했던 촬영용 카메라가 있다

카메라는 1930년대에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운명의 손 / 한형모 1954

북한 간첩을 소재로 한국형 스릴러를 모색했던 작품이다

 

 

 

 

피아골 / 이강천 1955

한국사회의 왜곡된 체제와 이념으로 고뇌하는 작품이다

 

 

 

 

시집가는 날 / 이병일 1956

최초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사진으로 된 영화이야기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 단기 4289(1956)년 6월 1일 남향문화사 발행

영화의 스틸 컷을 풍부하게 수록한 「왕자호동과 낙랑공주」의 영화소설

 

 

 

 

「이국정원」 시나리오 / 전창근 · 도광계 1957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와 홍콩 쇼브라더스가 합작하여 만든 해방 후의 첫 합작영화이다

첫 줄에는 한국어 · 아랫 줄에는 중국어로 적혀 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

1960년대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기였다는 것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1960년 92편이었던 제작편수는 1969년 299편으로 · 극장 수는 1961년 302개에서 1971년 717개로

관람객 수는 1961년 5천8백6십만 명에서 1969년 1억7천3백만 명을 기록한다. 가히 영화의 시대였다

이 가운데 김기영 〈하녀〉(1960) 〈고려장〉(1963) · 신상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 〈성춘향〉(1961)

유현목 〈오발탄〉(1961) 〈김약국의 딸들〉(1963· 이만희 〈만추〉(1966) 〈귀로〉(1967) · 김수용 〈갯마을〉(1965) 〈안개〉(1967)

정창화 〈노다지〉(1961) · 정진우 〈초우〉(1966) 등의 감독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대표작을 발표했다

이들 영화는 당대 관객의 환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작품들로 기억되고 있다

1960년대 초 김승호를 주인공으로 하는 가족극과 궁중사극이 유행했다면

1960년대 초중반에는 청춘영화 · 1960년대 후반에는 문학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와 액션 스릴러영화 · 코미디영화가 강세를 띠었다

한편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기업화와 대량 제작을 강조했던 영화정책이 모순이 깊어지며 70년대 쇠퇴기를 예감하게 했다

 

 

 

 

1960년대 서울의 개봉관

1960년대 서울에는 광화문 · 종로 · 을지로 등 시내 중심가를 중심으로 12개 내외의 개봉관이 존재했고

나머지는 재개봉관 · 3번관 등 계층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개봉관은 한국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하는 방화관과 외화를 중심으로 상영하는 외화관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구분은 엄격하지 않았는데 70년대 스크린쿼터제의 영향으로 구분이 무너질 때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마부 / 강대진 1961

1960년대 초 한국영화의 주요 장르였던 가족드라마의 대표 작품이다

마부로 일하는 하층민 아버지와 그 가족을 다룬 이 영화는 당대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드러내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김승호 · 황정순 · 신영균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제1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 심사위원 특별상)

 

 

 

 

청년문화의 시대

1970년대 한국영화는 쇠퇴와 불황의 시기로 기록된다

1969년 229편을 기록했던 제작편수는 1975년 83편까지 곤두박질쳤다

질적으로도 저예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며 관객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며 급격히 보급되던 TV의 영향 · 경제성장과 함께 다양해진 레저문화

1970년대 들어 더욱 엄혹해진 검열 · 영화정책의 실패 등이 겹쳐진 결과였다

그 가운데 1970년대 중반 이장호 〈별들의 고향〉(1974) · 하길종 〈바보들의 행진〉(1975) · 김호선 〈영자의 전성시대〉(1975) 등으로 대표되는

신인 감독들이 청년영화를 기치로 새로운 표현방식과 정서를 가진 영화들을 만들어 흐름을 주도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고교얄개〉(1976) · 〈진짜진짜〉 시리즈와 같은 하이틴 영화들과 호스티스 영화 · 액션영화들이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받기도 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1975

 

 

 

 

바보들의 행진(검열서류) / 하길종 1975

 

 

 

 

동서영화회보 2호 / 1979년 6월 15일 동서영화동우회 발행

동서영화동우회는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던 대학생들이 1978년 결성한 시네클럽이었다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은 당시 영화광들이 서구의 예술영화를 접하던 주된 통로였다

 

 

 

 

1919 한국 최초의 영화

 

 

 

 

1934 현존하는 최고의 영화

 

 

 

 

1935 최초의 유성영화

 

 

 

 

1954 최초의 영화 속 키스장면

 

 

 

 

1957 최초의 해외영화제 수상작품

 

 

 

 

1961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1967 최초의 음란죄 처벌

 

 

 

 

2005~2015 한국영화 관객동원 기록

 

 

 

 

변화의 바람 · 1980년대 영화 포스터들

불황이 더 깊어진 1980년대 영화계의 작품 경향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분야의 영화 활동 등을 당시 사회상과 더불어 살펴볼 수 있다

 

 

 

 

변화의 바람

1970년대에 시작된 불황은 1980년대 들어 깊어진다

이 기간 신군부의 정책으로 성에 대한 검열이 완화되며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이 영화들은 관객의 호응을 받기도 했지만 역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임권택 · 이장호 · 배창호 · 이두용 감독 등이 자신의 영화세계를 꾸준히 펼치며 국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87년 6월민주화항쟁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화되고 소재의 제약이 사라지게 되면서 젊고 패기에 찬 감독들이 등장한다

박광수 〈칠수와 만수〉(1988) 〈그들도 우리처럼〉(1990) · 장선우 〈우묵배미의 사랑〉(1990) 〈경마장 가는 길〉(1990)

정지영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 · 이명세 〈개그맨〉(1988)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2) 등

이 시기 한국영화계를 대표한 감독들은 훗날 코리안 뉴웨이브(새로운 물결)라 명명되었다

이와 함께 김동원 〈상계동올림픽〉(1988) 〈장산곶매 (파업전야)〉(1990) 등으로 대표되는 독립영화 진영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이원세 1981

 

 

 

 

1980년대 영화 포스터들

불황이 깊어진 1980년대 영화계의 작품 경향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분야의 영화활동 등과

신군부의 정책으로 성에 대한 검열이 완화되며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꼬방동네 사람들 / 이동철 作 · 배창호 연출 1982

 

 

 

 

웰메이드 영화의 시대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신호탄으로 이창용 감독의 〈박하사탕〉(2000) ·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 등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독특한 크리에이티브로 무장한 감독들이 자본과 연결되면서 지난 세기와 확연히 구분되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창조해냈고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이른바 「웰메이드 영화」는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끌어냈다

2003년 연말에 개봉한 〈실미도〉가 천만을 돌파한 이후

2020년까지 총 19편의 영화가 「천만 영화」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영화산업의 양적 성장을 견인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 ·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 〈시〉(2010) ·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2012) ·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2019)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 등이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처럼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산업의 양적 성장 · 미학적 성취 · 글로벌 영화로서의 지위까지 획득하며

그야말로 한국영화 역사상 유래없는 르네상스 시대를 만들었다

 

 

 

 

아카이브(Archive)

영상자료는 영화필름 외에 포스터와 영화음악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미디어테이블을 통해 연대별 주요 영화작품 · 감독 · 배우 등을 검색하여 정보를 볼 수 있으며
포스터 · 영화음악 등을 검색하여 보고 듣는 등 직접적인 감상을 할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40년사 · 1990년대 한국영화

 

 

 

 

한국영화 100선 (동률작 포함 101편)

한국영상자료원은 2013년 국내 대표적인 영화사연구자 · 비평가 · 영화인들의 설문을 거쳐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100선을 선정하였다

선정의 기준은 한국영화 초창기부터 2012년까지 개봉한 현존하는 장편영화 중

1)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

2) 당대의 대중의식을 반영하였거나 한국사회의 독특한 맥락에서 제작되어 사적 연구 가치가 높은 작품

3) 장르적 혹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 등이다

이 101편은 그 자체로 높은 완성도나 예술성을 가진 작품들이지만 한국영화 100년의 시간을 증거하는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국영화 100선

필름이나 콘텐츠가 남아있는 장편영화 중,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

당대의 대중의식을 반영하였거나 한국사회의 독특한 맥락에서 제작되어 사전 연구가치가 높은 작품 · 장르적 혹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 등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 100편을 선정하여 주요 장면의 영상물과 영화 타이틀을 함께 전시하였다

*

년도 / 영화제목 / 감독 / 배우 등이 아래에 있다

 

 

 

 

영화인

한국영화 100선의 작품에 출연 또는 연출 · 스태프 등으로 참여하였거나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경력이 있는 영화인들을 기리는 섹션이다

영화인들의 주요 필모그래피와 연출 노트 · 소장품 및 각종 영화제 트로피 등을 보실 수 있다

 

 

 

 

각종 영화제 트로피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명예황금곰상 트로피 / 임권택 기증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은 소중한 문화유산인 영상자료를 국가적 차원에서 수집 · 보존하는 우리나라 유일한 기구로서 1974년 설립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우리 영상문화유산이 최적의 환경에서 보존 · 복원되어 후대에 영원히 전달될 수 있도록 기반조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많은 국민들이 영상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한국영화박물관 · 시네마파크 KOFA · 영상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디지털영상 자료의 수집 · 디지털 복원 · 아날로그자료의 디지털화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영화사 연구 및 발간사업을 통해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영웅

나라를 위해 싸운 그들 · 과연 누가 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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