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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야기

한국영화박물관 초기 영화로의 초대

한국영화박물관은 「초기영화로의 초대」 전시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화의 탄생 과정과 당시 영화인을 조망한다
총 4개 섹션을 통해 초기 영화의 중요한 순간들을 마주하며

과연 〈영화〉는 무엇인지, 미래의 영화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

 

 

초기 영화로의 초대

 

 

 

 

초기 영화로의 초대

19세기 후반 수많은 발명가들의 노력과 열정 · 경쟁 속에서 탄생한 영화는 지난 130여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기록매체이자 대중적 예술 매체였다

영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중이 함께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도록 한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를 영화의 시조로 보는 입장이 일반적이고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경험은 영화의 중요한 본질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극장보다는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과연 영화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 전시는 1) 함께 보는 영화를 탄생시킨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2) 필름 영화와 1인용 영사기를 최초로 만든 에디슨과 딕슨의 키네토그래프

3) 영화의 서사를 도입한 최초의 여성 감독 알리스 기

4)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영화를 통해 이야기와 환상을 만들어 낸 조르주 멜리에스를 중심으로

초기 영화가 어떻게 발명 · 발전했는지를 소개하고 관객들이 직접 초기 영화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초기 영화의 중요한 순간을 마주하며, 과연 영화는 무엇인지, 미래의 영화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자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

시네마토그래프 모형을 통해 초기 영화 10편이 상영된다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

 

 

 

 

 최초의 유료 상영회 당시 상영된 10편의 초기영화 중 한 편이다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는 그들이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로 촬영한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1895년 3월 22일 국립산업진흥원에서 산업관계자들로 구성된 대중을 대상으로 최초 상영했다

그리고 1895년 12월 28일에는 파리 그랑 카페의 인디안 살롱에서 최초 유료 상영회를 개최했다
이 상영회가 개최되었던 1895년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화의 원년으로 기념한다

움직임을 기록할 수 있는 장치들을 앞서 발명했던 다수의 선구자가 존재했지만

시네마토그래프는 스크린 영사를 통해 대중이 동시에 영화를 보는 공동체적 관람을 가능하게 했고

영화는 이렇게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의 발명보다 함께 관람하는 공동체의 경험을 영화의 시작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뤼미에르 /1862. 10. 19~1954. 4. 10 왼쪽

루이 장 뤼미에르 / 1864. 10. 5~1948. 6. 6 오른쪽

1894년 키네토스코프의 시연에 참석했던 뤼미에르 형제의 아버지 앙트완 뤼미에르는 두 아들에게

촬영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와 영사 장치인 키네토스코프의 기능을 하나로 대체할 방법에 대해 연구할 것을 주문한다

17세의 나이에 건판 사진 필름의 상용화 방법을 고안해 아버지의 사업 번창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던 루이는

형과 함께 카메라 · 영사기 그리고 인화기의 복합기능을 갖춘 장비 개발에 나섰고, 1895년 2월 13일 시네마토그래프의 특허권을 출원한다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래프를 사용해 당시 아버지의 건판사진 필름공장의 노동자들이 공장문을 나서는 장면을

1895년 3월 19일을 시작으로 3번에 걸쳐 각기 다른 버전으로 촬영했는데 이 영상이 세계 최초로 상영된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다

 

 

 

 

사용과 운반이 용이한 경량의 시네마토그래프

시네마토그래프는 촬영 · 인화 · 영사의 세 가지 복합적 기능을 겸비하고 있으면서도약 5kg에 불과한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전기를 사용하는 키네토그래프와 달리 크랭크를 수동으로 돌리는 방법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사용자가 스튜디오 내부뿐만 아니라 야외 · 이동차량 등에서도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고 간편하게 영사할 수 있었다

오퍼레이터들은 경량의 시네마토그래프를 작은 나무 궤짝에 담아 세계 곳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이런 특성은 이 기기의 광범위한 상용화를 이끌었다

 

 

 

 

필른 카메라로 장착된 시네마토그래프

시네마토그래프는 에디슨의 키네토그래프와 유사한 전진과 중단을 반복하는 간헐적 움직임을 통해 필름을 이동시키지만

재봉틀의 노루발 원리를 적용하여 키네토그래프보다 더 정교한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시네마토그래프는 발톱이 있는 구동시스템과 릘르(Reuleaux)캠을 사용하는데

여기에 편심 캠을 이용하여 회전 운동을 노루발의 운동과 같은 간헐적 수직 왕복 운동으로 전환시켰다

이 시스템에 의해 오퍼레이터가 기기 측면에 달린 손잡이인 크랭크를 돌리면

천공된 필름이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되풀이하여 전진과 멈춤을 반복하게 되면서 이동하게 된다

이 간헐적 움직임에 의해 렌즈 앞의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이미지의 상은 순간적으로 정지된 사진과 같은 프레임의 형태로 필름에 각인된다

시기별 시네마토그래프의 기종과 오퍼레이터의 숙련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시네마토그래프는 오퍼레이터가 1초에 두 번 크랭크를 돌리면, 초당 16프레임의 속도로 필름이 전진하게 설계되었다

이 속도는 이미지의 선명성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며 촬영된 움직임을 연속적인 운동으로 인지하기에 무리가 없는 속도였다

 

 

 

 

시네마토그래프로 필름을 영사하는 모습

오퍼레이터가 크랭크를 돌리면서 필름을 이동시키면 후면에 위치한 램프의 빛이 필름에 조사되고

전면에 위치한 렌즈를 통해 필름에 각인된 이미지가 확대되어 스크린에 영사된다

위 사진 속의 시네마토그래프는 초기 버전으로, 영사된 필름이 되감기는 시스템이 아직 구비되지 않아

하단에 있는 상자 속으로 영사된 필름이 바로 떨어져 쌓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상영본의 인화기로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생필름과 네거티브 필름을 겹쳐 기기에 장착하고

렌즈를 태양광 같은 빛이 비치는 흰벽을 향해 놓고 작동하면 포지티브 필름 즉 상영본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가 최초로 유료 상영된 장소 · 파리 그랑 카페 인디언 살롱

1895년 12월 28일, 파리 오페라 광장과 근접한 그랑 카페 지하의 인디언 살롱에서 최초로 유료 상영회가 개최되었다

일반 극장이 아닌 카페를 임시 대여해 상영회를 개최했기 때문에 살롱 내부에 간이 의자와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를 상영했다

영사기로 변신한 시네마토그래프가 관객석 사이에 설치됐는데 전지를 사용하던 타 영사기와는 달리

수동으로 작동하는 시네마토그래프는 영사시 큰 소음을 발생하지 않아 이런 형태로도 상영이 가능했다

 

 

 

 

키네토그래프 & 키네토스코프 / 필름 영화의 시대를 열다

1887년에서 1892년 사이 축음기 · 전구 등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발명가이자 사업가인 토마스 에디슨은

영화 영사기의 전신인 주프락시스코프를 발명한 에드워드 제임스 마이브리지를 만난 후

그의 발명품의 영감을 받아 1888년 그의 조수 윌리엄 딕슨에게 축음기를 보조할 수 있는 시각 장치를 개발할 것을 주문했다

딕슨은 시계 침을 전진하게 하고 멈추게 하는 시계의 규칙적인 움직임의 매커니즘을 응용하여

사물의 움직임을 촬영하고 재생할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는데

그것이 1888년 발명된 영화 필름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와 1889년 발명된 1인용 영사기인 키네토스코프다

이 장치들은 시네마토그래프보다 앞서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 상영되는 대중 상영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초의 영화」라는 타이틀을 시네마토그래프에 내주었다

그러나 이 장치들을 위해 처음으로 상용화한 영화용 셀룰로이드 필름의 천공 방식은

현재까지 사용되는 국제 표준으로 인정받으며 필름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Aliva Edison) / 1847. 2. 11~1931. 10. 18

 

 

 

 

윌리엄 딕슨(William Kennedy Laurie Dickson) / 1860. 8. 3~1935. 9. 28)

 

 

 

 

세계 최초의 영화 카메라, 키네토그래프
고대 그리스어의 운동(Kinetos)과 기록(graphein)이라는 단어가 조합된 이름을 가진 키네토그래프는 세계 최초의 영화 촬영 카메라로 간주된다

키네토그래프의 원리는 멈춤과 전진을 반복하는 필름의 움직임과 셔터의 움직임을 정확히 동기화시킴으로써

렌즈 앞의 움직임을 분절된 프레임의 형태로 촬영하는 원리였다

필름을 규칙적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키네토그래프는 필름의 양 측면에 각각 4개의 직사각형 구멍을 뚫고

역진 방지 톱니바퀴(래칫 - 미늘 톱니바퀴)에 의해 구동되는 톱니 드럼과 맞물려 움직이게 했다

이렇게 천공된 필름은 1909년에 영화 필름의 국제 표준규격으로 정착된다

키네토그래프는 1초당 18에서 40프레임을 촬영했으며, 촬영할 수 있는 영상의 길이는 최초의 10초에서 60초 정도까지 점차 늘어났다

키네토그래프에서 사용되는 필름은 이전의 카메라들이 사용하던 종이 롤 필름이 아닌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견고하지 못한 재질의 특성상 아주 짧은 분량만을 촬영할 수 있었던 종이 롤의 치명적 단점을 보완했다

최초의 셀룰로이드 필름은 너비 70mm인 이스트만사의 사진 필름을 19mm의 너비로 자른 것이었으나

이미지의 크기가 너무 작아 가독성이 떨어지는 단점으로 인해 70mm를 반으로 자른 35mm 필름 형태로 사용되었다

초기 19mm 필름을 이용해 촬영된 인물의 쇼트는 얼굴에서 무릎 위까지만 담은 쇼트가 많았는데

이는 인물의 전신을 담는 롱쇼트의 경우 이미지의 가독성만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쇼트는 이후 프랑스 평론가들에 의해 「아메리칸 쇼트」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지금까지 쇼트 분류의 한 종류로 정착되었다

 

 

 

 

1인용 영사기, 키네토스코프

1891년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를 이용해 10초 가량의 짧은 영상을 대중에게 실험적으로 공개했다

고대 그리스어의 움직임(Kinesis)과 보다(skopein)를 의미하는 단어를 조합한 이름의 키네토스코프는 뷰파인더의 선조 격인 1인용 영사장치이다

1894년 이르러 뉴욕 브로드웨이에 개장한 키네토스코프 영업점을 시작으로 해외 영업점까지 생기면서 키네토스코프는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관객들은 25센트를 내면 각기 다른 영상의 필름이 설치된 총 다섯 개의 키네토스코프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당시 관객들은 이 기구의 상단부에 있는 작은 확대경에 직접 눈을 대고 영상을 관람했고

영상과 동시 재생되는 사운드를 청진기 형태의 튜브 이어폰을 통해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폭발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태생적 단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에디슨은 한 번에 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장치의 특성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키네토스코프를 판매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고

스크린에 투사가 가능한 방식으로 키네토스코프를 개량하고자 했던 딕슨의 제안을 거절한다

결과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결별하게 되고 그 결과가 영화의 탄생은 뤼미에르 형제의 공로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키네토스코프의 형태와 작동원리

키네토스코프는 약 46cm × 69cm × 123cm의 크기에 약 50kg의 무게를 가진 박스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박스 상단에는 돋보기 렌즈가 달린 약 2.5cm 크기의 원형 관람창이 있고

박스 내부에는 약 15m의 롤 필름이 물레의 실을 감는 장치와 유사한 방식으로 여러 개의 스풀(Spool)에 감겨 있다

키네토그래프처럼 박스 내부 상단부에는 전기를 전원으로 사용하는 톱니바퀴가 설치되어

필름 양 측면에 뚫린 구멍과 맞물리면서 렌즈와 회전하는 디스크 셔터 그리고 백열전구 사이로 필름을 이동시킨다

이때 디스크 셔터는 일정한 간격으로 필름 프레임 사이사이에 순간적인 정지 상태를 만들어내어

결과적으로 분절된 이미지들을 연속된 운동 이미지로 느끼게 하는 광학적 잔상 효과를 가능하게 했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 모형

토머스 에디슨은 1888년 그의 조수 윌리엄 딕슨과 함께 영화 필름 카메라인 키네토그래프를, 1889년에는 1인용 영사기인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했다
이 장치들은 시네마토그래프보다 앞서 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 영사되는 대중 상영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최초의 영화〉라는 타이틀을 시네마토그래프에 내주었다
그러나 이 장치들을 위해 처음으로 상용화한 영화용 셀룰로이드 필름의 천공 방식은

현재까지 사용되는 국제 표준으로 인정받으며 필름 영화의 시대를 열었다
이 키네토스코프를 모형을 통해 에디슨이 제작한 3편의 초기영화를 감상하실 수 있다

 

 

 

 

최초의 여성 감독 알리스 기(Alice Guy)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 제작자였던 알리스 기는

결혼 후 이름인 알리스 기 블라쉐(Alice Guy Blache')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여성 감독이다

알리스 기의 활동시기는 1896년에서 1907년 프랑스 고몽사에서의 활동기와 1907년 이혼 전까지

뉴욕에서 자신의 제작사 솔락스필름과 남편이 세운 복수의 제작사에서 감독 · 제작자로 활동한 시기로 나뉜다

1976년 알리스 기의 사후에 출판된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는 1896년 작 〈양배추의 요정〉을 시작으로 수많은 장 ·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프랑스 활동기 동안 조르주 멜리에스와 서사를 영화에 도입한 최초의 감독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며

고몽사의 크로노폰 싱크 사운드 시스템을 영화에 도입하고 필름의 틴팅과 토닝기법을 이용

흑백영화에 색을 입히는 시술을 사용하는 등 초기 영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도 알리스 기의 프랑스 활동기의 업적은 영화사에서 오랫동안 누락되어 왔다

이처럼 오랫동안 알리스 기가 잊혀 왔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당대의 필름과 아카이브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 대표의 비서직을 겸직하기도 했던 여성의 이름을

현장을 총괄하는 책임자인 감독으로 크레디트에 기록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불충분한 아카이브로 인해, 알리스 기가 연출한 작품의 수는

오늘날까지도 영화학자들에 따라 약 100편에서부터 약 1,000편으로 추정되는 등 큰 오차를 보인다

당대의 사회적 편견은 오늘날까지 그녀의 수많은 작업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에 머물게 하고 있다

 

 

 

 

알리스 기 · 포노센 영화를 촬영하다 / 1907 · 2분

알리스 기가 포노센(phonosce'nes) 영화 〈로미오와 쥴리엣〉 촬영을 지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다

유성영화 또는 뮤직비디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포노센 영화는 축음기와 촬영 카메라 간의 기계적 연결없이

녹음된 사운드를 축음기로 재생하면 그에 맞춰 배우들이 립싱크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상영 시에는 이렇게 녹음된 사운드와 이미지를 동시에 재생했다

고몽사는 당시 제조 · 판매했던 크로노폰(Chronophone)의 판촉을 위해 1902년부터 포노센 영화를 제작했고

알리스 기는 고몽의 포노센 영화 연출 전반을 지휘했다

 

 

 

 

기록되지 않은 영화 선구자 · 알리스 기

1894년 카메라와 영사기 등을 생산하던 프랑스 고몽사의 레옹 고몽(Le'on Gaumont)의 비서로 채용된 알리스 기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상영한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고몽사에 영화제작부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비서직을 겸직한다는 조건으로 1896년부터 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1924년과 1929년 고몽사가 두 번에 걸쳐 출간한 고몽 카탈로그에서 알리스 기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1947년 출간된 프랑스 영화사가인 조르주 사들의 기념비적 저서 「영화의 선구자들」(1897~1909)의 초판에서도 알리스 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사들은 1950년경 알리스 기의 정정 요청을 받고, 자신의 저서를 수정한다

1930년대 중반, 아버지 레옹 고몽의 뒤를 이은 루이 고몽은 알리스 기에게 그녀가 연출한 작품 리스트에 대해 문의한다

그러나 이것은 알리스 기의 감독 지위를 복원하겠다는 고몽사의 뒤늦은 반성이었다기보다는

당시 고몽사가 멜리아스보다 자신의 기업이 더 선제적으로 내러티브 영화의 틀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알리스 기의 작업을 재평가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

사진은 알리스 기가 〈예수 생애의 스물 다섯 장면〉(1906) 촬영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장면이다

 

 

 

 

양배추 요정 / 1900 · 1분

알리스 기의 최초 연출작으로 알려진 양배추 요정〉(1896)은 필름이 소실되었다

이 작품은 알리스 기 본인이 직접 1896년 양배추 요정〉을 리메이크한 1900년 버전이다

 

 

 

 

에스메랄다 / 1905 · 10분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를 각색한 알리스 기의 작품이다

영화사가들에 따라 이 영화를 형식적으로 완성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내러티브 영화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식탐 / 1906 · 4분

임신한 여성이 겪는 신체적 변화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이다

알리스 기는 클로즈업 기법을 최초로 사용하여, 여성의 심리변화를 얼굴에 나타난 표정의 변화를 통해 보여 준다

 

 

 

 

예수 생애의 스물다섯 장면 / 1906 · 33분

약 33분에 달하는 알리스 기의 첫 중편 영화이다

삼백여 명의 등장인물과 스물다섯 개의 세트가 사용된 당대의 대작이다

당시 경쟁사였고, 훨씬 많은 배급사를 갖고 있던 파테가 몇 해 전 제작해 큰 성공을 거뒀던

〈예수의 고난〉에 자극된 고몽사가 당시로서는 역대급의 예산을 들여 제작한 작품이다

 

 

 

 

목맨 남자 / 연도 미상

영화사 파테의 카탈로그에서 알리스 기의 〈목맨 남자〉라는 영화와 동명의 영화가 1906년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스타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막스 린더(Max Linder)가 출연한 파테의 이 영화는 알리스 기 작품의 리메이크였다

파테는 당시 알리스 기의 지휘 아래 연출 · 제작되었던 고몽의 내러티브 영화들에서 영감을 받아 혹은 모방해 많은 작품을 제작 · 배급했다

 

 

 

 

고아 소녀 / 1908

무성영화의 대가 중 한 명인 루이 쬐이야드(Louis Feuillade)의 1908년 영화로도 기록된 이 영화는 알리스 기의 영화로 추정되기도 한다

루이 쬐이야드는 당시 고몽사의 예술 감독 역할을 했던 알리스 기의 조수로 일하면서 영화 연출 작업을 전수  받았다

 

 

 

 

여성 목사 수 / 1911

알리스 기의 서부극 연출작으로 새로 부임한 목사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그려낸 솔락스 시기 작품이다

영화 중간 부분은 필름이 유실되었다

 

 

 

 

미국시민 되기 / 1912 · 11분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가 진정한 미국시민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시민으로서의 덕목에 대한 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솔락스 시기 작품이다

 

 

 

 

조르주 멜리에스

영화로 꿈꾸게 하다

파리 로베르 후댕 극장의 감독이자 마술사였던 조르주 멜리에스는

영화를 연극과 마술쇼 사이 막간 흥밋거리로 관객에게 제공하기 위해 뤼미에르 형제에게 시네마토그래프의 구입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자

영국 최초의 영화감독인 로버트 W 폴의 도움을 받아 촬영기인 이졸라토그래프와 영사기인 테토그래프를 구입하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한다

점차 영화 상영이 성공을 거두면서, 1896년부터 멜리에스는 직접 영화제작에 매진하기 위해 스타 필름 컴퍼니라는 제작사를 설립하고

파리 근교 몽트뢰이에 지상 6미터 높이의 유리지붕으로 구성된 프랑스 최초의 영화 스튜디오를 건설하고 활발한 영화제작 활동을 시작한다

뤼미에르 형제가 주로 일상을 기록하는 영화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다큐멘타리의 시조로 간주되는 반면

극영화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멜리에스는 연극이나, 문학 작품처럼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할 힘을 가진 영화의 잠재성과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환상에 대해 빠르게 자각하고 자신이 마술쇼에서 사용하던 자동 인형 미니어처 등을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멜리에스는 편집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페이드 인 · 페이드 아웃 · 이미지를 합성하는 매트 기법 등

오늘날 특수효과의 시초가 되는 영화 기법들을 발명했다

이런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멜리에스의 대표적인 영화로 최초의 SF영화라 일컬어지는 〈달세계 여행〉과

최초의 호러영화로 명명되는 〈악마의 성〉이 있다

자신의 제작사를 스타 필름으로 명명할 당시, 멜리에스는 영화가 후대에 만들어낼 스타 시스템을 예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미래의 감독을 꿈꾸게 하고 그들의 영감의 원천이 될지 가늠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서 저는 영화의 모든 것이 조르주 멜리에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영화를 들여다보면 감동하고, 영감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100년 전 처음 그 기법들이 발견됐을 때의 흥분이 그대로 살아 있으니까요

영화는 제가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강력한 예술적 표현입니다"

마틴 스콜세즈(Matin Charles Scorsese)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가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었다면, 멜리아스는 영화를 만들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

영화 미술의 선구자 멜리에스화가 · 캐리커처 작가 · 무대연출가로도 활동하며 상당한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멜리에스는

영화사에서 최초로 스토리보드를 영화제작에 활용한 감독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무대 배경 세트 제작 작업에도 직접 참여하곤 했다

 

 

 

 

프랑스 최초의 스튜디오 · 몽트뢰이 스튜디오

멜리에스가 파리 외곽 소도시, 몽트뢰이에 만든 프랑스 최초의 스튜디오이다

두 동의 건물로 구성된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스튜디오로 태양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스튜디오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 앙리 랑글투아의 보존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7년 완전히 철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스튜디오 사진은 1945년 랑글투아가 촬영한 것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멜리에스

1911년 이후 스타 필름의 독점적 배급사가 된 파테와의 저작권 소송과 1차대전의 발발로 멜리에스는 영화제작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25년 자신의 영화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배우, 잔 달시(Jeanne d'Alcy)와 결혼 후

멜리에스는 영화 제작을 중단하고 파리 몽파르나스 역 근처에서 아내가 운영하고 있던 사탕과 장난감을 팔던 가게를 함께 운영했다

이 가게는 멜리에스에 대한 오마주를 보내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휴고〉에서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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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아스가 대중에게 잊혀져 작은 구멍가게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자신을 가게 벽에 사슬로 묶여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자화상이다

 

 

 

 

필름에 컬러를 입히다

멜리에스의 많은 영화는 채색 영화였는데, 멜리에스의 영화를 채색하던 공장의 노동자 수는 약 220명에 달했고 대부분 여성이었다

당시 채색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은 무척 고달픈 수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1초에 16프레임으로 구성된 필름을 노동자들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씩 직접 채색해야 했다

각각의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배당된 오직 한 가지 색만 채색했고 한 영화에 사용되는 색은 총 20종에 달했다

영상은 멜리에스의 대표적인 채색영화 〈요정의 나라〉(1903 · 16분)이다

 

 

 

 

필름 채색 공장과 스텐실 채색 공장 전경

멜리에스는 필름에 색을 입히기 위해 1900년 초까지 노동자들이 손으로 직접 필름을 채색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반면 파테사는 1903년부터 스텐실 기법을 이용해 필름을 채색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모든 상영본의 각각의 프레임들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채색하는 방식과는 달리 파테사의 스텐실 기법은

영화 프린트 한 벌에 대한 각 스텐실 틀이 완성되면 그 후에는 각기 다른 상영장에서 쓰일 복수의 상영본을 완성된 틀로 찍어 손쉽게 채색할 수 있었다

 

 

 

 

〈달세계 여행〉의 명장면 채색 체험 존

태블릿에 설치된 〈달세계 여행〉의 주요 장면을 관람객이 채색하면

거대한 스크린에 반영되는 인터랙티브 체험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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