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西五陵)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란 뜻으로 구리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릉군이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묘(지금의 경릉 敬陵)가 조성된 것을 시작으로
예종의 창릉(昌陵) · 순회세자의 순창원 ·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 숙종의 명릉(明陵) ·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옮겨져 5기의 능과 2기의 원 · 1개의 묘가 있는 현재의 서오릉이 되었다
고양 서오릉 입구
고양 서오릉 종합안내도
조선왕릉 세계유산 빗돌
명릉(明陵)
제19대 숙종(1661~1720)과 계비 인현왕후 민 씨(1667~1701) · 인원왕후 김 씨(1687~1757)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으로 조영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 쌍릉과 단릉, 동원이강의 특이한 형식을 볼 수 있다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 · 인원왕후) 안내판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 ·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이다
명릉(明陵)
숙종은 1674년 13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후 46년 동안 재위했다
숙종은 3차례에 걸쳐 왕비를 맞이했는데 원비는 인경왕후 · 둘째와 셋째 왕비는 인현왕후와 인원왕후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에서 대부호가 된 장경의 딸로 조선 왕조 최초로 역관 집안에서 왕비가 된 여인이다
진설도(陣說圖) · 기신제(忌晨祭)
정자각 정전 앞이다
기신제(忌晨祭)
왕릉제향 은 역대 제왕과 왕후에 대한 기신제향 의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규정인 오례의(五禮儀) 중 길례(吉禮)에 해당한다
창릉 제향일은 1월 9일이다
왕릉제향 진설도(陣說圖)
진설도(陣說圖) / 축상 · 향상 · 준소상
비각(碑閣)
왕릉에 모신 왕과 왕비의 생애와 업적을 적은 비석인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보통은 정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비석 수가 늘어나면 칸 수를 늘려 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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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숙종과 인현왕후)와 명릉(인원왕후) 표석이 있다
명릉(숙종과 인현왕후) 표석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 부좌(朝鮮國 肅宗大王 明陵 仁顯王后 附左)
명릉(인원왕후) 표석
조선국 인원왕후 부우강(朝鮮國 仁元王后 附右岡)
명릉(숙종과 인현왕후) 표석 비문 · 명릉(인원왕후) 표석 비문 안내판
신교(神橋) ·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 ·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이다
명릉(明陵)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이다
명릉(明陵)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이다
예감(叡感)
제향을 지낼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수복방(守僕房)
능을 지키는 수복들이 근무하던 건물이다
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에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 향을 보관하고 축문을 준비하는 안향청(安香廳)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제물을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그 외 부속공간인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실은 기본적으로 능 하나에 재실이 하나씩 별도로 지어졌으나 지금 서오릉에는 명릉 재실의 일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재실(齋室) · 재실 배치도 해설
재실(齋室)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담당하던 종 9품 능참봉이 쓰던 건물이다
안향청(安香廳) · 제기고(祭器庫) · 전사청(典祀廳)
행랑청(행랑채)
대문 · 부엌 · 마구간 · 창고 등이 있다
금천교(禁川橋)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물길을 건너는 돌다리다
수경원(綏慶園) 안내비
수경원(綏慶園)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는 이유번의 딸로 궁녀가 되었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어 1730년(영조 6) 영빈에 책봉되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장조)와 6명의 옹주를 낳았다
수경원은 처음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서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뒤에 조성되었고 1899년(정조 12) 선희묘(宣禧墓)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생모 지위에 맞게 묘를 원(園)으로 높여 이름을 수경원이라 하였다
1969년 서오릉으로 이장했으며 지금은 정자각만 남아 있다
대한소유영빈수경원(大韓昭裕暎嬪綏敬園) 표석
익릉(翼陵)
조선 19대 숙종(肅宗)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71년(현종 12) 왕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20세 때 천연두에 걸려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익릉(翼陵)
인경(仁敬)은 「인덕을 베풀고 정의를 행했으며 자나 깨나 항상 조심하고 가다듬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경왕후는 남편인 숙종보다 40년, 아버지인 김만기보다 7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왕비가 천연두에 걸렸기 때문에 병문안도 하지 못한 숙종은 천연두가 자신에게 전염될 것을 염려해 창경궁으로 집무실을 옮겼고
영의정이 홍화문에 머물면서 양쪽 궁궐의 상황을 보고했다
아버지 김만기는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의 친형이며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다
이들 집안은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했고, 김만기와 김만중 형제도 대제학을 지내고 현종과 숙종의 묘당에 공신으로 들어간다
그렇기에 인경왕후는 당대 최고 가문의 규수라고 볼 수 있다
익릉(翼陵) 안내판
정자각(丁字閣) · 향로(香路) · 어로(御路)
정자각은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이 있으며, 향· 어로는 경사진 땅에 박석을 깔고 지형에 맞춰 조성된 점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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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는 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 어로는 왕이 제향을 올릴 때 다니는 길이다
신교(神橋) ·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수복방 · 홍살문
비각(碑閣)
조선국 인경왕후 익릉(朝鮮國 仁敬王后 翼陵) 표석
익릉 표석 비문 안내판
익릉(翼陵) 산신석
능이 위치한 곳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리이다
익릉(翼陵)
예감(叡感)
제향을 지낼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수라간 초석 같다
배위(拜位)
헌관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4배 한다
판위(版位)라고도 한다
고양 서오릉 안내도
순창원(順昌園)
조선 13대 명종(明宗)의 맏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와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1552?~1592)의 원(園)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3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은 1561년(명종 16)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1592년(선조 25) 세상을 떠났는데,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신주를 만들어 순회세자와 합장하였다
순창원(順昌園) 안내판
정자각(丁字閣)
왕릉에서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침전이라고도 한다
정자각은 제향 음식을 차려 놓는 정전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이 합쳐져 있는데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丁(정) 자와 같아 정자각이라 불렀다
왕릉에는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경우에도 정자각은 하나를 세우고 제향을 함께 지냈다
대한제국 때는 침전 안에 집 모양 장식인 당가를 설치하면서 건물의 규모를 늘려, 건물 모양이 '一(일)'자형으로 바뀌었다
신로(神路)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예감(叡感)
제례가 끝난 뒤 제물을 묻거나 지방을 태워 묻는 곳으로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한다
경릉(敬陵)
경릉은 추존된 덕종(德宗 1438~1457)과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의경세자(懿敬世子)라 하였다
이후 1471년 둘째 아들이 자을(잘)산군이 왕(성종)이 된 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정난공신 1등에 오른 한확의 딸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세조 3년(1457) 본래 병약했던 남편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수빈(粹嬪)이 되었고 세조의 법통은 시동생인 예종이 물려받는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책봉되었다
경릉(敬陵) 안내판
정자각(丁字閣)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의 능, 오른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한다
이와 달리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을 모셨는데, 이는 세상을 떠났을 때 신분의 차이(덕종 왕세자 · 소혜왕후 대왕대비) 때문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로 인해 덕종의 능은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태로 조성된 사실도 흥미롭다
수복방(守僕房)
비각(碑閣)
경릉(敬陵) 표석
조선국 덕종대왕 경릉 소혜왕후 부우강(朝鮮國 德宗大王 敬陵 昭惠王后 附右岡)
경릉(敬陵) 표석 비문 안내판
경릉(敬陵) 덕종(德宗)
정자각(丁字閣)
소혜왕후 한 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의 능이 보인다
신교(神橋) · 신로(神路)
정자각 뒤에서 능상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이다
경릉(敬陵)
소혜왕후 한 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의 능이다
예감(叡感)
옆에 돌은 예감 뚜껑 같다
정자각(丁字閣)
수라간 기단석 같은 돌들이 앞에 있다
대빈묘(大嬪墓)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賓 張氏 1659~1701)는 장형의 딸로 숙종대의 대왕대비(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다
1688년(숙종 14) 숙종의 맏아들 경종을 낳아 희빈(禧嬪)에 봉해졌다
1년 후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5년 후 갑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면서 다시 희빈이 되었다. 이후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목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景宗)이 왕위에 오른 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어 묘를 대빈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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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묘 봉분에서 약 7m정도 떨어진 거리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위로 묘역을 눌러야 희빈의 억센 기를 누를 수 있다."며 가져다 놓은 바위라는 소문이 있었다
2008년 경 대한민국의 인터넷 상에서, 대빈묘를 찾아가면 남자친구가 없는 여성에게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였다
대빈묘(大嬪墓)
원래 구리 인창동에 조성되었다가 1719년(숙종 45) 현 광주 문형리로 옮겼고,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홍릉(弘陵)
조선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3세에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의 부인이 되었다가
1721년(경종 1) 왕세자빈이 되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조선 역대 왕비 중 중전 재임 기간이 약 33년으로 가장 길었으나, 영조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1757년(영조 33) 66세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홍릉(弘陵) 안내판
정자각(丁字閣) · 수복방(守僕房)
정자각 왼쪽에는 예감, 오른쪽 뒤편에는 산신석이 있다
홍릉에는 홍살문과 금천교가 남아 있으며 어정의 흔적도 있다
홍릉(弘陵)
홍릉의 전체적인 배치는 쌍릉 형식이나,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능의 왼쪽이 비어 있다
영조는 생전에 왕후가 먼저 사망하자 지금의 장지를 정하면서 장차 자신도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는 왕비 능의 오른쪽 정혈에 돌을 십자로 새겨 묻도록 하고 자신의 터를 비워둔 수릉을 조성했다
하지만 영조는 지금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영조를 홍릉에 모시지 않고 동구릉 내 효종의 영릉 터에 안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다른 일화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영조와 함께 묻히기 원해 서오릉에 있는 영조의 유택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홍릉은 조선 왕릉 42기 중 유일하게 왕의 유택이 지금까지 비어 있다
비각(碑閣)
홍릉(弘陵) 표석
조선국 정성왕후 홍릉(朝鮮國 貞聖王后 弘陵)
홍릉(弘陵) 표석 안내판
영조가 친히 내린 왕후의 시호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가 새겨져 있다
이렇게 존호가 긴 이유는 정성왕후가 43년간 긴 궁궐 생활을 하면서, 무수리 출신인 시어머니 숙빈 최 씨로부터
희빈 장씨 ·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 계비 인현왕후 · 인원왕후에 이르기까지 왕실 어른을 잘 모시고 살림을 잘해냈다는 행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홍릉(弘陵) 수복방
홍릉(弘陵) 산신석
능이 위치한 곳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리이다
예감(叡感)
비호교
홍릉에서 창릉으로 들어가는 다리다
서어나무 숲길
길이 1.92km · 소요시간 약 40분으로 창릉 앞에 있다
창릉(昌陵)
조선 제8대 예종(睿宗 1450~1469)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아들로 아버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형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68년 왕위에 올랐다
세조 때부터 편찬하던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를 앞두었으나 즉위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98)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1463년(세조 9) 당시 왕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창릉(昌陵) 안내판
창릉(昌陵)
양쪽 능침 아래 중간에 정자각 양 옆으로 수라간 · 수복방 등이 대칭하여 배치되어 있다
창릉(昌陵)
예종(睿宗) ·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능이다. 서오릉의 영역 내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이다
조선왕릉의 혼유석 받침돌인 고석은 일반적으로 귀면 조각으로 장식하는데, 예종 능 혼유석의 고석에는 북고리를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정자각(丁字閣)
향로(香路) · 어로(御路)가 정자각 윗 단부터 없다
신계(神階) · 어계(御階)
월대(月臺)는 궁궐의 정전 · 향교와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기단이다
신교(神橋) · 신로(神路)
향로 · 어로처럼 땅에 묻혔는 지 없다
비각(碑閣) · 수복방
비각(碑閣)
창릉 표석(昌陵 表石)
조선국 예종대왕 경릉 소혜왕후 부좌강(朝鮮國 睿宗大王 昌陵 安順王后 附左岡)
창릉 표석(昌陵 表石) 비문 안내판
창릉(昌陵) 예종(睿宗)
창릉(昌陵) 안순왕후(安順王后)
수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