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을 가기 위한 걷기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서울둘레길이자 은평둘레길인 봉산 마루금을 이용해 찾았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 5번출구
시점이다
천주교 수색교회(증산동 천주교회)
증산동은 마을 뒷산 반홍산이 시루를 엎어놓은 모양 같다 하여 나온 지명이다
원래 증산(甑山)이었으나 시루는 밑이 뚫려 있어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 하여 갑오경장 무렵부터 증산(繒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DMC 청구 · DMC 우방
두 아파트 단지 사잇길로 오른다
DMC 청구 · DMC 우방
두 아파트 단지 사잇길로 오르면 봉산 들머리 철계단이 있다
봉산 들머리 계단을 돌아 봤다
숲 터널
봉산(209m) 마루금
은평구에서 제일 큰 산으로 갈현2동 · 구산동 · 신사동 · 증산동 · 수색동에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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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둘레길 관광명소(가볼만한 곳 · 맛집) 안내도가 있다
은양정(恩陽亭)
은평구라 정자에 모두 「은(恩)」자가 들어간다
서울둘레길 방향안내판이 있다
봉산 포토아일랜드(봉산전망대)
2018년 구 참여예산으로 만든 전망대다
이곳에서 이동식을 했다
봉산 포토아일랜드(봉산전망대) 안내판
63스퀘어 · 국회의사당 방향이다
안산
왼쪽 인왕산 · 오른쪽 남산 · 백련산자락이 앞에 있다
북한산
수색역 · 서울둘레길 방향안내판
고령산 · 사패산 · 도봉산 · 북한산
도봉산 · 북한산 · 인왕산 · 백련산
백련산
인왕산 · 안산이 좌우에 있다
은평구둘레길 관광명소(가볼만한 곳 · 맛집) 안내도
봉산 산책로 안내도
운동기구가 있는 정자 쉼터
산악기상 관측장비
우리나라는 64%가 산악지형으로 국민안전을 위해 조밀한 산악관측망이 필요하다
산악날씨는 평지보다 바람은 약 3배 강하고 일 최대 강수량은 약 2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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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지나며 비가 내렸다
봉산정(烽山亭)
봉산(烽山)은 일명 봉령산(鳳嶺山)으로 조선시대 서울 무악 봉수로 이어지는 봉수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봉산의 다른 이름인 봉령산은 이 산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평화롭게 앉아 있는 형상에서 유래했다
봉수대(烽燧臺)
고려 초기 설치되어 조선 중기에 걸쳐 운영되었던 봉현봉수가 소재하였던 곳으로
서쪽 고양시 고봉산 봉화의 신호를 받아 남쪽 한양의 안산 서봉수대에 전달하는 제4기 직봉 노선의 봉수다
또 1919년 3 · 1운동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이 횃불을 밝히고 만세시위를 벌이던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둘레길 리본
앵봉산(鶯峰山) / 조은(造隱)
은평둘레길 이야기
새로운 길 시비 / 윤동주
서오릉고개 녹지연결로 앞 쉼터에 있다
서오릉로
갈현동 · 구산동 방향으로 서오릉고개 녹지연결로에서 봤다
서오릉고개 녹지연결로봉산과 앵봉산을 연결해주는 생태통로다
고양 서오릉(西五陵)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이란 뜻으로 구리 동구릉(東九陵) 다음으로 규모가 큰 조선왕릉군이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묘(지금의 경릉 敬陵)가 조성된 것을 시작으로
예종의 창릉(昌陵) · 순회세자의 순창원 ·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 숙종의 명릉(明陵) ·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 영빈 이씨의 수경원과 옥산부대빈 장씨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옮겨져 5기의 능과 2기의 원 · 1개의 묘가 있는 현재의 서오릉이 되었다
명릉(明陵)
제19대 숙종(1661~1720)과 계비 인현왕후 민 씨(1667~1701) · 인원왕후 김 씨(1687~1757)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으로 조영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 쌍릉과 단릉, 동원이강의 특이한 형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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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1674년 13세의 나이로 왕에 오른 후 46년 동안 재위했다
숙종은 3차례에 걸쳐 왕비를 맞이했는데 원비는 인경왕후 · 둘째와 셋째 왕비는 인현왕후와 인원왕후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에서 대부호가 된 장경의 딸로 조선 왕조 최초로 역관 집안에서 왕비가 된 여인이다
재실(齋室) · 향랑청(행랑채)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무르면서 제례에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 향을 보관하고 축문을 준비하는 안향청(安香廳) ·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제물을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그 외 부속공간인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실은 기본적으로 능 하나에 재실이 하나씩 별도로 지어졌으나 지금 서오릉에는 명릉 재실의 일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재실(齋室)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담당하던 종 9품 능참봉이 쓰던 건물이다
수경원(綏慶園)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1764)는 이유번의 딸로 궁녀가 되었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어 1730년(영조 6) 영빈에 책봉되었다
영조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장조)와 6명의 옹주를 낳았다
수경원은 처음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서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뒤에 조성되었고 1899년(정조 12) 선희묘(宣禧墓)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생모 지위에 맞게 묘를 원(園)으로 높여 이름을 수경원이라 하였다
1969년 서오릉으로 이장했으며 지금은 정자각만 남아 있다
익릉(翼陵)
조선 19대 숙종(肅宗)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71년(현종 12) 왕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20세 때 천연두에 걸려 경덕궁 회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경(仁敬)은 「인덕을 베풀고 정의를 행했으며 자나 깨나 항상 조심하고 가다듬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경왕후는 남편인 숙종보다 40년, 아버지인 김만기보다 7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왕비가 천연두에 걸렸기 때문에 병문안도 하지 못한 숙종은 천연두가 자신에게 전염될 것을 염려해 창경궁으로 집무실을 옮겼고
영의정이 홍화문에 머물면서 양쪽 궁궐의 상황을 보고했다
아버지 김만기는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의 친형이며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다
이들 집안은 대제학을 7명이나 배출했고, 김만기와 김만중 형제도 대제학을 지내고 현종과 숙종의 묘당에 공신으로 들어간다
그렇기에 인경왕후는 당대 최고 가문의 규수라고 볼 수 있다
정자각(丁字閣) · 향로(香路) · 어로(御路)
정자각은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이 있으며, 향· 어로는 경사진 땅에 박석을 깔고 지형에 맞춰 조성된 점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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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는 제향을 지낼 때 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 어로는 왕이 제향을 올릴 때 다니는 길이다
고양 서오릉 안내도
순창원(順昌園)
조선 13대 명종(明宗)의 맏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와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1552?~1592)의 원(園)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3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은 1561년(명종 16)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1592년(선조 25) 세상을 떠났는데,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신주를 만들어 순회세자와 합장하였다
경릉(敬陵)
경릉은 추존된 덕종(德宗 1438~1457)과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0세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의경세자(懿敬世子)라 하였다
이후 1471년 둘째 아들이 자을(잘)산군이 왕(성종)이 된 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정난공신 1등에 오른 한확의 딸로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세조 3년(1457) 본래 병약했던 남편 덕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수빈(粹嬪)이 되었고 세조의 법통은 시동생인 예종이 물려받는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책봉되었다
정자각(丁字閣)
소혜왕후 한 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의 능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의 능, 오른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한다
이와 달리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을 모셨는데, 이는 세상을 떠났을 때 신분의 차이(덕종 왕세자 · 소혜왕후 대왕대비) 때문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로 인해 덕종의 능은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태로 조성된 사실도 흥미롭다
대빈묘(大嬪墓)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賓 張氏 1659~1701)는 장형의 딸로 숙종대의 대왕대비(장렬왕후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다
1688년(숙종 14) 숙종의 맏아들 경종을 낳아 희빈(禧嬪)에 봉해졌다
1년 후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5년 후 갑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면서 다시 희빈이 되었다. 이후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목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景宗)이 왕위에 오른 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어 묘를 대빈묘라 하였다
원래 구리 인창동에 조성되었다가 1719년(숙종 45) 현 광주 문형리로 옮겼고,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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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묘 봉분에서 약 7m정도 떨어진 거리에 커다란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위로 묘역을 눌러야 희빈의 억센 기를 누를 수 있다."며 가져다 놓은 바위라는 소문이 있었다
2008년 경 대한민국의 인터넷 상에서, 대빈묘를 찾아가면 남자친구가 없는 여성에게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였다
홍릉(弘陵)
조선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3세에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의 부인이 되었다가
1721년(경종 1) 왕세자빈이 되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조선 역대 왕비 중 중전 재임 기간이 약 33년으로 가장 길었으나, 영조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1757년(영조 33) 66세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자각 왼쪽에는 예감, 오른쪽 뒤편에는 산신석이 있다
홍릉(弘陵)
홍릉의 전체적인 배치는 쌍릉 형식이나,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능의 왼쪽이 비어 있다
영조는 생전에 왕후가 먼저 사망하자 지금의 장지를 정하면서 장차 자신도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는 왕비 능의 오른쪽 정혈에 돌을 십자로 새겨 묻도록 하고 자신의 터를 비워둔 수릉을 조성했다
하지만 영조는 지금 동구릉 내에 있는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영조를 홍릉에 모시지 않고 동구릉 내 효종의 영릉 터에 안장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다른 일화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영조와 함께 묻히기 원해 서오릉에 있는 영조의 유택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홍릉은 조선 왕릉 42기 중 유일하게 왕의 유택이 지금까지 비어 있다
서어나무 숲길
길이 1.92km · 소요시간 약 40분으로 창릉 앞에 있다
늦은 시간이라 소나무길을 걷기로 했다
창릉(昌陵)
예종(睿宗) ·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능이다. 서오릉의 영역 내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이다
조선 제8대 예종(睿宗 1450~1469)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아들로 아버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형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68년 왕위에 올랐다
세조 때부터 편찬하던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를 앞두었으나 즉위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98)는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1463년(세조 9) 당시 왕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언덕 왼쪽에 소나무길이 있다
소나무길
길이 1.08km · 소요시간 약 20분으로 홍릉 고개 앞에 있다
늦은 시간이지만 이 길로 올랐다
소나무길
소나무길
소나무길
소나무 식재 안내판
소나무길을 내려가는 빅터
맹꽁이 서식지 안내판
서오릉 해설사 운영안내